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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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혹시 이런 궁금증 가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살까?'

 

 한번쯤 다른 나라를 부러워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의문 또한 한번쯤 품어본 즉 한데요.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도록 학자들을 괴롭혀온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근대 초기 때부터 말이죠. 그 대표적인 학자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삼권분립을 주창한 저서 '법의 정신'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입니다. 단 두 권 밖에 없는 그에게 또 다른 저서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사실은 그 의문을 풀어보려는 시도였기도 했었죠. 오래도록 여러 지방을 여행 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풍습들은 몽테스키외로 하여금 역사적인 삶에는 일반적인 모습이 없으며 각 나라가 지닌 역사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그를 통해 그는 '풍속'을 그 사회를 알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통로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 '왜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할까?'를 풀어갔죠. 그가 주목한 건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각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 역시 달라져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생긴다고 보았죠. 지금도 우리가 흔히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는 생각, 그러니까 그들이 못사는 건 더운 나라라서 한 없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그 생각은 바로 이 몽테스키외에게서 비롯된 것이죠.(최근 이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총, 균, 쇠'를 쓴 제레미 다이아몬드에게도 이어져 보다 세련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똑같은 한계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열대 기후에 속한 나라라 할지라도 다 똑같이 열악한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싱가포르가 있지요. 그러니 환경적 요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고 후일 시간이 지나 거기에 대해 전혀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학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막스 베버 입니다. 그 역시 이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은 왜 서양에서만 자본주의가 부흥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나라들에선 왜 자본주의가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는 이것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정신)'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특유한 개신교 논리가 자본주의가 발흥되도록 했고 결국 서양과 동양의 불평등을 낳았다고 본 것이죠. 그렇게 막스 베버는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원인이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결정적인 해답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외의 존재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지금 우리 가까이에. 네,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단국가입니다.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한민족이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다시말해 북한과 우리는 문화적 차이가 그리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북한과 남한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2006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이 게시한 이 사진처럼 말입니다. 이 사진은 우리나라의 밤을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은 빛으로 여기저기 반짝이지만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문화적 요인을 가지고 있지만 차이는 이렇게 눈에 확 띌 정도로 극명합니다. 그러니 막스 베버의 이론도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이죠. 그럼 도대체 뭘까요? 어떤 이들은 '무지 이론'을 내세웁니다. 이름만 거창할 뿐 사실 별 거 아닌 이론입니다. 즉 그 나라가 가난한 건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론이 쉬운 만큼 속 편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뭐든 그 나라의 탓으로만 돌려버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국민이나 통치자가 부유해지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까요? 물론 아니죠. 이건 우리나라만 생각해도 바로 답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사대강'이 있지요.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40조가 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재정상 부담하기 지극히 어려운 비용입니다. 거기다 우리 국민 전체의 90% 넘는 사람들이 이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고 그 때문에 바로 얼마전엔 한강 식수가 '녹조 라떼'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했죠. 40조는 그냥 허공으로 증발한 셈이 되어버렸고 앞으로 이런 인위적인 자연 재해 때문에 또 얼마나 추가 비용이 들어가야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정말 써야할 데에 못 쓰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만큼 더 가난해지겠죠. 자아, 사정이 이렇습니다. 국민은 분명히 보다 현명한 대안을 알고 있었고 또 한 목소리로 알렸습니다. 하지만 저 위에 있는 자들은 듣지 않았죠. 그들이 믿는 기독교에서 말하듯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소통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뭐, 다들 아시지 않을까요? 그들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올 '돈' 때문이란 걸. 이게 핵심입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건 환경의 요인도, 문화적 요인도, 무지 이론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층의 엘리트 계층이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 하기 때문이죠. 대대손손 잘먹고 잘살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만 불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은 이런 것을 '착취적 제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를 다른 나라보다 못살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제시합니다.

 

 그것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의 그 이유를 밝혀갑니다. 어째 이유가 너무 단순하기도 하고 게다가 경제학이 너무 정치적으로 기운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여 좀 믿을 수 없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문인지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장장 641 페이지에 걸쳐서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즐비하게 나열하면서 그 의심을 불식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가서 이 말을 새삼 다시금 확인하게 되지요. '진리란 본디 단순하다'라는 것을...

 

 아무튼 이 책은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을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나라가 어떤 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즉 제도적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러한 제도적인 관점은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장하준 교수도 취하고 있는 관점인데 어쩌면 지금 영국 경제학의 주류가 '제도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왜 경제학이 이토록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느냐 하실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거기에 대해선 저자들이 이렇게 분명히 답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 그간 경제학은 정치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해왔다. 세계불평등에 대해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p. 110)

 

 그러니까 저자들은 정치적 관점에 기운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문제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분명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상 보다 정확한 경제적 분석을 위해서라도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한 정치적인 문제들을 고려한 결과 결국 한 나라의 경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착취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 포용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뉜다 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착취적 제도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p. 121)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로지 지배 계급의 이익만 불리는 제도인 것이죠. 반면 포용적 제도란 자신의 재능에 가장 걸맞는 직업과 소명을 추구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장을 통해 그럴만한 기회를 잡을 수(p.121)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저자들은 바로 이 포용적 제도가 번영의 원동력이라 봅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포용적 제도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능력에 따른 성과가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에 맞는 성과를 가져갈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느냐 입니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가 착취적 제도냐 포용적 제도냐를 가르는 기준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능력보다 옛날 고려의 '음서' 식으로 출신 성분이나 뒷 배경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SSM 처럼,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으로 동네 자영업자들의 상권을 몰아내는 것 같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착취적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의 번영을 막게 될까요? 이게 바로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 제도가 많은 이들에게 인센티브를 주지 않아서 각 개인들이 보다 나은 향상을 위해서 아무런 창의성도 노력도 혁신도 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느냐가 한 나라의 번영을 좌지우지 하는 열쇠라는 게 이 책의 결정적인 핵심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많은 분들이 '뭐야?' 하실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다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을 듣기 위해 시간도 없는 우리가 무려 641 페이지나 읽어야 하나 눈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럴 때 옛날 저의 은사 한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아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비록 경제학 책이고 아담 스미스의 논의를 보다 많은 근거로서 세련되게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을 절절히 체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경제와 정치의 그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말이죠. 우리는 흔히 생각해왔습니다. 경제와 정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래서 잘살게만 해준다면 까짖 것 정치적 불평등쯤이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눈부신 경제 발전에 비하자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정치현실은 낙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보다 분명히 보여줍니다. 정치적 문제의 해결과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같이 간다는 것을! 그것이 인센티브로만 설명되는 문제점은 있습니다만 사실 인센티브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인센티브가 중요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못지 않게 정치적 인센티브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최근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고 장준하씨 처럼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일독을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결국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번영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책이니까 말이죠.(물론 여기에 미국과 한국이 '포용적 제도'의 대표적 나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저 역시 좀 불만이 있습니다. 아마도 인센티브를 오로지 경제적인 것만 고려한 탓이겠죠.) 이제 정말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오늘의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벗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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