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진보
심보선.장석준.박상훈 외 지음 / 이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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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시기를 사람들은 진보의 무덤이라 말한다. '지금 여기의 진보'에는 홍세화의 글이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 지금 진보신당 대표인 그가 총선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이 취소되고 다시 당사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맞딱드린 현상은 이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여의도 당사를 비워져야 할 기일을 다가오는데 새로 옮길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한 달 보름이 걸려서야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당 이름을 말하는 순간 건물주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계약을 하고 나서 취소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사태 이후 벌어진 풍경이었다. '우리(진보신당)는 그 당(통합 진보당)이 아니'라거나 구차함을 무릎쓰고 우리는 당이 아니라 준비하는 단체라고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p. 283~ 284)

 

 하지만 진보는 이번 총선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진보진영의 주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통합 진보당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지역구 의원 7명에 비례대표 6명. 모두 13명의 의원을 산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3당으로까지 그 지위가 격상했다. 바야흐로 이제 좀 진보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다들 기대가 컸다. 그것으로 총선의 결과가 준 실망감에 대한 위안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기대와 위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구당권파의 선거 조작이 탄로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뒤통수를 더 강하게 내리쳤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비록 부정 선거가 이루어졌어도 도덕적인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진보답게 그 선거로 인해 당선된 사람들이 자진 사퇴했으면 좋게 마무리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보라는 이름표를 붙인 자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 사퇴를 하지 않고 버텼으며 그들의 세력인 구당권파는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로 그들을 비호했다. 더구나 그들의 사퇴를 의결하기 위해 모인 대의원 회의때는 12시간이 넘는 동안 조직적인 의사 방해 공작으로 우리 모두의 공통된 가치인 민주주의마저 망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래도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들은 당당했고 오히려 부정선거로 당선된 자들을 정당하게 사퇴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음모라며 공격했다. MB정권 때 가장 많이 썼던 사자성어는 바로 '후안무치'였다. 정확히 그 때의 구당권파도 거기에 막상막하였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 모두 쌍욕이 작렬했다. 배신의 정도가 컸던 한 사람은 지금도 진보란 말만 들어도 진동 모드의 휴대폰처럼 부르르 떨기도 한다. 그렇게 진보는 비오는 날의 쓸모없는 전단지처럼 바닥에 버려졌다. 진보의 깃발은 남의 말은 전혀 들을 줄 모르는 막귀에다 자기 목소리만 크게 낼 줄 아는 입을 가진 자들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보의 신념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고 비민주와 불합리로 무장한 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진보가 살던 동네는 이제 폐허만 남았다.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들은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나 폐가를 보듯 멀리 떨어져서 이제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무시도 오래갈 수 없다. 거기를 보지 않으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보다 훨씬 더 어둡고 희망없는 세상이 빵셔틀을 하려는 일진들 처럼 '씨익' 웃으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약자들은 언제나 그 모든 것들을 가진 자들의 총알받이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 그래서 네거리만 나가면 만나게 되는 편의점 마냥 상처와 절망을 받게 되는 세상이 말이다. 그러니 '그래, 똥 묻는 개보다는 그래도 겨 묻은 개가 낫겠지' 싶어서 진보를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나마 약자가 살려면 그래도 진보가 좀 나아보이니까. 다시 말해 지금의 세상이 영혼을 익사시킨다고 한다면 진보는 적어도 조금의 숨통은 풀어줘서 자맥질이라도 할 수 있게는 해주니까...

 

 그래서 다시 찾았다. 망해버릴대로 망해버린 진보지만 다 타버린 건물 더미에서 쓸만한 것을 건져내듯 다시금 진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싶었다. 여전히 완전히 믿지는 못해도 칠흙 같은 어둠 보다는 그나마 반딧불 정도의 밝기라 해도 빛이 있는게 나으니까. 오늘의, 너무도 어이없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사태를 보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거쳐야 했던 시행착오로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보게 된 책이다. '지금 여기의 진보'라는 책은...

 진보진영 10명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내게 꼭 진보 위에 드리워진 무덤 속 같은 깊은 어둠 속을 저마다 홀로 날아다니고 있는 진보의 목소리라는 반딧불 하나 하나를  채집해 모아 놓은 유리병 같았다. 진보 진영에서는 제법 명망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너진 진보를 어떻게 새로운 축대와 서까래로써 다시 새롭게 지을 것인가 그 고민이 담겨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고민들이라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어떤 하나의 줄기 아래 같은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 책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마다 생각한 것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광장이다. 그래서 군무가 아니라 독무다. 개성을 가진 열 마리의 반딧불이 저마다의 빛깔로 사람들의 앞길을 비춰주고자 모여 청사초롱과 같은 빛을 내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여기의 진보'라는 책이다.

 

 그러므로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다. 마음에 드는 이 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열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뿌려내는 다채로운 색깔들은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 처럼 당신 앞에서 진보라는 그림으로 탄생한다. 시인이자 사회학자 심보선은 진보의 개념이 옛 것 그대로가 아니라 오늘에 맞게 새롭게 설정되어야 함을 말하고 현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회 정책위원회 의장인 장석준은 이제 진보가 녹색사회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번 총선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녹색당이 참여했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인 박상훈은 진보가 대중들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받을 것인가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번역해서 더욱 유명해진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다시 되살려 그것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이 책은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열 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고유의 선율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진보에 대한 그들이 가진 고민의 깊이는 비슷하고 그것을 그저 말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진지하게 접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모아놓고 들으면 불협화음의 아니라 근사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마음을 도닥여주고 평화로움에 젖게 하다가 나중에는 웅대한 비젼을 연출하여 저절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오케스트라 말이다. '지금 여기의 진보'는 그런 희망을 위해 열 명의 반딧불들이 연주하는 빛의 오케스트라이다. 일독(一讀)이 아니라 일청(一聽)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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