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유영훈(류영훈) 옮김, 우석훈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2011년 9월, 미국의 좌파 잡지, 애드버스터는...

 

 

한 광고를 실었다.

 

 

 

바로, '9월 17일에 월가 금융자본의 부패와 탐욕에 항의하자는 평화 점거를 벌이자'라는 광고였다.

바로 이 광고가 뉴욕의 월가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부르조아 1%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불러일으킨 나머지 99%들의 성난 목소리, 월가 점령 운동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는 뉴욕 도심의 월가에 있습니다. 우리 돈 수십억 달러가 금융권을 구제하는데 들어갔습니다. 혹자는 우리를 보고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언제나 있었던 것은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령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달 내내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잃은 사유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번 것 보다 더 많은 사유재산이 2008년 금융위기로 날아가렸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몽상가라고 합니다. 진정한 몽상가는 과거의 상황이 앞으로도 무한히 계속될 거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몽으로 바뀌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파괴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사회 시스템의 자폭을 목격하고 있을 뿐입니다.

 

 

-2011년 10월 9일 슬라보예 지젝의 주코티 공원 연설 중에서 -

 

 

  월가 점령은 그랬다. 그토록 산재해 있던 모든 개인들의 아픔이 더 이상 그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그 자체로 부터 야기된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당신 자신 때문이다.'라며 자본주의가 주입한 환상과 꿈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처럼 깨어나는 일이었고 이제 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주렁주렁 매달고 타이타닉호 처럼 가라앉아만 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이상 이대로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며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코카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몇 달러를 내고 혹은 수익금의 1퍼센트를 제3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쓴다는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흐뭇해하는 세상에 이제 그만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각 종 일거리를 아웃소싱하다 못해 이제는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이런 모습을 보아왔죠. 우리의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고 있습니다. 이걸 되찾자는 겁니다.

 

 - 슬라보예 지젝의 같은 연설 중에서 -

 

 

 'n+1' 이라는 잡지가 있다.

 'n+1' 은 뉴욕에 기반을 둔 사회문화 비평 잡지다. 이 잡지의 편집인들은 뉴욕 월가 점령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월가 점령이 시작될 당시부터 '월가점령가제트'를 발간하여 베포하기도 하였다. 그 'n+1' 의 편집인들이 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점령운동'에 대해 중간결산한다는 취지로 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점령하라'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점령 운동 당시의 현장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는 '점령 풍경' 섹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점령 풍경들 마다 제기 되었던 주된 문제들에 대한 당시의 발표문이나 연설문들이다. 그러니 전자는 실천 부분을 후자는 이론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 두 개의 섹션은 별개로 묶이어지지 않고 하나하나가 서로 교차로 편집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의 편집자들이 운동이 전개되어나감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일어났고 그 문제가 점령 운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점령 운동'은 어떤 원칙과 이론적 바탕에 의해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는지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점령 운동' 당시 거주하고 있던 '주코타 공원'에서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는 뉴욕의 노숙인들이 무료로 지급되는 음식과 잠자리 때문에 자꾸만 노숙하게 되어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무임승차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노숙자들로 인해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노숙자들의 범람으로 언론들에 의해 '무법천지'로 왜곡 보도 됨으로써 장차 진압을 위한 구실을 주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풍경의 섹션이 이렇게 제기된 문제를 드러내면 바로 그 뒤 이론 섹션에서 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풀어나갈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점령 운동이 성장해가는 가운데 우리는 점령 운동에서 노숙인의 자리라는 문제를 단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체제적 연결과 역사적 연결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 체제적 배제와 사화적 배제, 경제적 배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상대적 잉여 인구의 일부가 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현대 역사에서 추방과 경제적 몰락의 순간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아주 통렬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반드시 이 배제와 경제 위기의 논리를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숙인 문제와 점령 운동 전반을 실제로 아우르는 대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경제적 주변화와 경제 위기 그리고 추방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 지난 40년 동안 노숙자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이제 인종 집단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의 밑바닥에 깔린 공통의 논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1970년대 초반에도 최상위 1퍼센트가 빠르게 득세하자 미국의 거리에 노숙자가 늘어났다. 역사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히 아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의 공통된 곤경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 마침내 우리는 이 불확실함과 불안과 배제가 함께 합류하는 지점에 함께 도착했다. 이 공통적 곤경은 반드시 배제가 아닌 '포함'의 새로운 정치를 세우는 작업을 위한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 '홈리스의 문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크리스토퍼 헤링과 졸탄 클루크의 글 중에서 - 

 

 

 

  이렇게 '점령하라'는 운동의 과정에 생겨났던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어 그 문제들이 운동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람직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하고 원칙을 삼아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들을 함께 붙여둔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문제들이 사실 '점령 운동'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운동들이 그 규모가 커지고 영향력이 증대되면 반드시 가지게 될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가장 비근한 예는 얼마전 '나꼼수'로 일어났던 비키니 논쟁이 될 것이다. 이 책 '점령하라'가 이런 식의 편제를 취한 것은 이러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누가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저마다의 사유를 촉발하는 계기들이며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서 그 계기가 촉발한 저마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진화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정말로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도 앞서 얘기한 노숙자 문제를 비롯 숱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있었다. 타악기라는 것으로 운동의 정체성을 삼았던 드림 써클은 그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회의 순간을 방해하여 원성을 샀다가 지역적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점령 운동의 규모가 커지자 더이상 공개 총회로는 사안의 처리가 힘들어지자 '비대위'를 추진하려 했을 때는 한 이슬람 여성으로 부터 비대위가 모두 백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비난을 듣기도 했다. 사실 모든 운동은 그렇게 결국 근본적으로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배태하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수면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운동의 영향력이 커지자 서로 그 선봉을 잡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며 공격을 위한 선가르기가 횡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비키니 논쟁 때 경향신문이 3일 연속 1면에 실었던 것이 이것에 대한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결국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점령하라'는 이러한 때 '점령 운동'은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그 때 그 때 그 뒤 '이론 섹션'에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언제나 기억했던 것은 '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가?'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본연의 동기들이었다.

 

  지배체제는 동일한 하나를 둘로 나눈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대표적인 예다. 똑같은 분열이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 사이에서도 재생산되고 있었다. 드럼 서클은 '소수 민족'이고 공개 총회는 '백인'이었다. 드럼 서클은 '남성'이고 공개 총회는 '여성'이었다. 지금에 와서 여러 인종과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 현실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 말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도 이 본질을 충실히 반영했다. 이러한 양극 분리야 말로 점령 운동이 깨부수려던 것인데 말이다.

 

 - 드럼 서클에 관한 고찰, 마크 그리프 -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높은 생활 수준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바라는 겁니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맥락이 있다면 우리가 모두의 것(the commons)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연의 공유, 지식의 공유. 아, 물론 지적재산권은 있어야죠. 유전공학의 공유 이것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 

 

 

  만약에 희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불경기에 수익을 얻은 자들에게 부를 재분배하고 탐욕을 멈추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라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게 중재할 어떤 주장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평등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공의 장소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거리와 광장에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연합하여 하나로 뭉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들며 하나로 여기 서 있습니다. '우리가 국민'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 2011년 10월 23일 주코타 공원 발언, 주디스 버틀러 -

 

 

 

  그렇게 이 책 '점령하라'는 단순한 운동의 현장이나 과정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정보 차원만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차라리 하나의 '교본'이다. 어쩌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촉발되어 장차 일어날지 모르는 반자본주의 운동(그 뿐만 아니라 모든 현 체제 저항 운동까지)들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직면했던 문제들로 좌초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꾸준한 지속과 성장을 위해 참조가능한 사유의 계기들을 던져주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설을 썼던 우석훈이 이 책에 대해서 했던 말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2012년 대한민국이 열독해야 할 단 한권의 책"이라는 말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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