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는 제인 오스틴의 네번째 소설이다.

  초기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등, 주로 작품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서(pathos)들을 제목으로 가져왔던 오스틴은 여기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세번째 작품이자 바로 전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맨스필드 파크'란 바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오스틴은 제목을 신중히 고르는 작가다. 그녀에게 제목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안내(그러니까 '여기에 유념해서 보아주길 바란다'와 같은...)이자 그녀 스스로가 작품을 통해서 정말 드러내고 싶은 핵심이기도 하다(어쩌면 결국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핵심이니 일부러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거겠지...). 그렇다면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제인 오스틴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맨스필드 파크'로 대변되는 거기서 더부살이 중인 가련한 패니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자체이며 '엠마'는 주인공인 '엠마'라는 존재 자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임을 말이다.

  

  

 

 



 

 

 

 이렇게 '엠마'가 여성이 쓴 여성 자체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맨스필드 파크' 이후로 여기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 파크'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로 대표되는 여성이란 존재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관찰한 이야기라면 '엠마'는 그 모든 배경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 여성 내부에서만 여성을 관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여기서 신중하게 엠마라는 캐릭터를 형성한다. 엠마는 오스틴의 그 많은 여성 주인공들 중 유일하게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전작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비교하면 이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따라서 결혼만이 현재 겪고있는 모든 사회적 곤궁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엠마는 결혼에 대해서도 그리 강박적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혼자 살겠다고 선언까지 하여 그녀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씨를 안심시킨다. 오스틴은 그러한 엠마의 경제적 독립(그녀는 어머니의 사후, 저택 살림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꾸려왔다.)과 결혼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을 엠마의 가정교사로 더할나위 능력과 매력이 있는 그녀이지만 별다른 재산과 가문의 후광이 없는 관계로 양자로 보낸 아들까지 있는 홀아비와 결혼해야 했던 미스 테일러와 매력은 있지만 가난해서 늘 실연의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해리엇을 통해 강조한다.

 사실 이 둘, '경제적 여력의 요구'와 '그것을 위한 결혼으로의 강요'는 미스 테일러와 해리엇에게서 보듯이 당시 여성들을 억죄고 있었던 두가지 주요한 사회적 굴레였다. 오스틴은 작품에서 이 두 가지를 내내 강조해왔으며 바로 전작인 '맨스필드 파크'는 그 흐름이 최고조에 다다른 작품이었다. 이 두가지 굴레는 영국사회에서 오스틴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주욱 이어져 2차대전 후나 50년대에 이르러서도  혼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을 - 결국은그래서 아무런 경제적 여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 '잉여여성'이라 경멸을 담아 부르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두 가지로부터 엠마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스틴이 '엠마'에 이르러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하던 가장 주요한 요구들을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것이 그 바깥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 내부에만 천착해서 여성을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그 바깥에서 살펴봄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벗겨낸다면 과연 여성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또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우리가 이 다음 작품 '노생거 사원'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엠마' 그리고 '노생거 사원'까지 죽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성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단순히 말하자면 일종의 시점(바라보는 것)의 변화라 할 수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이 있으니 이 시점의 변화가 바로 전작의 결론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맨스필드 파크'에서 여성의 구원(진정한 자유를 쟁취했다는 의미에서)에 있어 '경제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면 뒤에 이은 '엠마'는 그것을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찰함으로써 과연 경제력만 있다면 여성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고 '엠마'에게 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나이틀리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임을 말했다면 '노생거 사원'에서는 과연 그렇게 남성과 제대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면 여성은 진정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묻는 것이다. 

 

   물론 오스틴은 전작의 결론들을 모두 부정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경제력은 엠마에게 와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엠마에게 있어 자신을 교정해주고 적절한 충고와 사랑으로서 보다 완전해질 수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남성은 '노생거 사원'에 와서는 전적으로 신뢰만은 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남성의 내면으로 들어갈 경우 배척당해 버리는 그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필요할 때 어루만질 수 있는 정도의 애완동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생거 사원'에 이르기까지 찰라에도 변하는 시간을 온전히 담기위해 수많은 덧칠을 했었던 세잔 처럼 전작 위에다 새로운 작품을 수없이 가필하면서 여성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전작의 주인공들 마저 새로운 작품에 다시 삽입하면서 까지 그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엠마'에 와서 '제인 페어펙스'로 다시금 등장하고 '엠마'의 해리엇은 '노생거 사원'에서 주인공 '캐서린'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모두 작품의 전형적인 피해자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데,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오스틴의 작품들은 - 특히 이 세 작품에 있어서 -  전작의 전복적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그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계속해서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적 조건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스틴에게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 조건은 단순히 말하면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후대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3기니'에서 여성의 자유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라고 한 바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스틴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유를 위한 충분 조건은 아니다. 거기엔 뭔가 하나 더 필요하다. '엠마'는 그것에의 추구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도 그랬다. 그녀는 그래서 '자기만의 방'을 쓴다. 그것은 여성이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에세이였다. 그와 똑같은 것을 오스틴 역시 행한다. 말하자면 이 '엠마'는 - 후대의 작가 작품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지만 - 오스틴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자면 오스틴의 소설적 결말이 이상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종국에는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 이어지는 해피엔딩이나지만 이러한 결말은 사실 그녀가 작품에서 천착해 온 것과 정반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스틴의 결말들의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느낌인데 오스틴은 왜 그러한 부정적이거나 혹은 한계지워진 결말들을 작품에다 허락했던 것일까? 이건 내게 아직도 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논의의 전개상 무리를 해서라도 말한다면 어쩌면 오스틴 그녀 자신에게 처음부터 세 작품을 일련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대로 세 작품에 하나의 연속성을 주기 위하여 다음 작품의 주제가 전개 될 수 있도록 정작 나아가야 할 그 순간 발길을 멈추고 그 내부에 머무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므로 다시 '엠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엠마를 통해 오스틴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니까 왜 엠마는 전작 맨스필드 파크의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그토록 절실했던 경제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실패를 경험하느냐에 대해서 오스틴은 엠마가 그녀 스스로를 늘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항상 스스로를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 타인에게서 발현되어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게 만드는 시선의 대표적 상징이 그 시선의 총합이며 그 시선들을 만들어내는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당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가 남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엠마를 구속하는 시선들은 모두 남성으로 부터 오는 규율적 권력의 효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엠마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성으로 부터의 독립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외침이므로 만일 오스틴이 '엠마'에서 천착했던 주제에 충실하자면 결말의 해피엔딩은 과감히 지우고 꿋꿋하게 독신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엠마를 그렸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엠마는 소설 내내 자신을 검열케하고 교정시키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시선의 권력 주체인 나이틀리에게로 가는 것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결말은 오스틴이 작품 내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에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품이 가진 한계라기 보다는 작가 스스로 다음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시점을 이동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잠정적 결론이 아닐까 하는 게 지금 내 생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오스틴의 세 작품은 그대로 헤겔의 변증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엠마'에서 오스틴이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보다 더 궁극적인 것을 말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며 작품속에서는 흔히 '매너'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자크 르벨에 따르면 '매너'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의 기원은 1530년에 간행된 우리에겐 '우신예찬'으로도 유명한 에라스무스가 쓴 '어린이를 위한 예절서'라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은 세가지 점에서 혁신적이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별없이 그 어떤 계층이든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며 세번째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규범'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자크 르벨이 이 책을 예절(혹은 매너)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이 예절이 특정 계층이나 어린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규범(예절에 대한 하나의 정형적 태도)을 정립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그대로 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어 이제 사회 성원들을 재사회화 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에라스무스가 추구했던 보편적 규범의 추구는 오로지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을 억누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므로 그래서 그는 그 규범을 정착시키는데 있어 '훈육'을 가장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로 보게 되고 그를 수용한 학교 교육은 그래서 강제적이고 채벌이 수반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은 태초부터 개인 본연의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하나의 틀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절이 하나의 보편적 사회관계 형성의 태도로 자리잡음으로서 이제 예절이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있어 그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적인 잣대가 되어버렸다. 정확히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듯 오스틴의 '엠마'는 얼마나 이 매너, 예절이라는 것이 나와 남을 판단하고 스스로 인정받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나타내고 있다. 매너라는 것이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 것이  되었음은 엠마가 결정적으로 해리엇의 짝으로 마틴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매너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도 드러나며  엠마가 엘튼이나 나이틀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만날 때 그 모든 표정이나 몸짓을 눈여겨보고 있음에도 드러난다. 사실 오스틴이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쓰는 동사는 '보이다' '드러나다'와 같은 시각에 관련한 동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엠마는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는 엘튼이 더할 나위없이 무례하게 느껴졌어도 엠마는 '예절' 때문에 스스로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리 경제력을 가진 여성이더라도 아무리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타인의 시선의 매개물이라 할 만한 매너에 깊숙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로 부터 헤어날 가능성은 있는가? 엠마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그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녀는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오스틴은 거기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예절의 형태들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흔히 '엠마'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문학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의 사실주의적 면모는 바로 여기, 이러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달아날 수 없는 꽉 얽혀진 시선의 매트릭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문제는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여성은 오로지 그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그대로 그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교정당하는 대상일 뿐 스스로 평가하고 교정해주는 주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스틴의 '엠마'는 이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작품 속의 여성들은 그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데 남성은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주로 나이틀리의 형제에게서 나타난다. 특히나 엠마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형 나이틀리가 더욱 그러한데 그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타인과 사교해하는 의무를  무시하고 공공연히 혼자만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동생 나이틀리도 기본적으로 관대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인이자 엠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에게 그러한 의무를 종종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엠마는 나이틀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녀는 늘 설득당하는 존재이며 그 앞에서 비평을 받는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나이틀리와 엠마의 일방적 관계에서 여성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에서 규정과 교정의 대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다. 더구나 엠마 스스로 관찰하고 평가해서 이리저리 맺어주려 했던 관계들이 모조리 파국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작품 내내 엠마는 그토록 열심히 보고 평가를 했는데도 자신은 잘못 보았으며 진실은 자신이 본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더구나 진짜 커다란 진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는 아예 보지도 못한다. 제대로 보는 것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로 부터 자유로운 나이틀리 뿐이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엠마가 나이틀리와 이어짐은 그 시선의 권력 주체에게 완전히 포섭되어짐을 의미한다. 작품 내내 그토록 독립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여성이었던 엠마는 그렇게 해서 그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남성에게 상납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오스틴 소설의 기묘한 측면, 즉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표현되어지는 내용의 상반성을 보게 된다. 오스틴 스스로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이 여성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선 그리고 남들이 자신을 보는 그 상상의 시선 자체에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작품에 드러나는 내용 자체는 그러한 시선의 주체가 되려고 할 때마다 내내 실패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의 드러남과 이면의 진실의 반전된 모습은 어찌된 까닭일까? 

 

   다시 여기서 '엠마'라는 작품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그 무엇보다 '시각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다', '드러나다' 등등의 시각적 동사들이 가장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과 그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할수는 없을까? 엠마는 늘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녀는 싫지만 내색을 할 수 없고 정작 중요한 자기만의 진실된 감정들은 내부의 비밀의 영역에다 감추어야 한다. 이는 엠마만이 아니다. 엘튼도 나이틀리도 마찬가지다. 프랭크와 제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코 엠마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미스터리였지만 궁극적으로 엠마의 세계 자체를 전복시킬수 있을만큼 핵심적인 것이었다. 가장 커다란 진실이자 가장 본질적 진실이었지만 엠마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프랭크와 제인의 표면은 그것의 기미조차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작품에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시각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늘 타인을 보는 시선과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상상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진정한 관계조차 이루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엠마가 정확히 이랬다. 즉 오스틴은 작품 속 엠마의 상황 그래도 독자를 이끌고 가기 위해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라는 방법을 취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더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 표면에 오스틴이 보여주는 상황 자체를 늘 의심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엠마가 그랬듯 그 표면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감춰진 진실을 영영 보지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표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나이틀리와 엠마의 결합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작품 속 진실을 찾고자 하면 본류 보다는 지류를 줄기 보다는 세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왜 작품 '엠마'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의 하나이기도 한 '별로 명확한 줄거리도 없이 지리하게 그 세부를 모조리 복원했다.' 처럼 오스틴이 써내려 갔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앞서 말했던 그대로 이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 하나 손짓 하나 그 모조리 복원된 현실의 가장 작은 단면 조차 과연 그 안에 깃든 진실이 무엇일지 세세하게 헤아려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소용없으며(그것은 오히려 말하고자 하던 진실을 오도하므로) 그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오스틴이 엠마를 통해 정작 하고자 했던 것 '여성이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와 연결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 것이다.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건 내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 되는 것 뿐이다. 엠마가 초기에 했던 그대로 내가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선을 통해 타인을 규정하려는 나이틀리의 권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거꾸로 나이틀리를 규정하는 시선적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오스틴 역시 초반에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작품 초반 나이틀리에게 엠마가 당당하게 대처할 때 나이틀리가 무기력해지고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이 '엠마'가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기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전부가 내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시선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엠마'가 가진 구성적 모호성은 오스틴의 명백한 의도이며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독립적 시선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엠마'는 오스틴의 새로운 전략적 글쓰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이면과 세부에 진정한 진실들을 새겨넣어 볼 수 있는 자에겐 지금의 현실이 그 편파적인 욕망이 아로새겨진 인위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드러내는... 

   새삼 엠마를 주목함은 이 작품으로 인해 오스틴을 나 스스로 전혀 새롭게 해석해 볼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늘 이야기의 매력으로 먼저 다가온 작가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이야기의 아래에서 오스틴이 진정 새겨넣으려 했었던 손길들이 보이는 듯 하다. 단적으로 말해 엠마는 오스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전이란 언제 어느 때 다시 보아도 늘 새로운 생각을 주기 때문에 고전이다 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엠마야 말로 거기에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엠마로 인해 이제 전혀 새롭게 만나볼 오스틴의 작품들이 벌써부터 마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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