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절판


예전에 TV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토로 마을은 인근의 군 공항 건설을 위해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1,300명이 온종일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하던 중에 자연스레 형성되어진 마을이었다.
하지만 패망 후 공항 건설은 중단되고 그 동안의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한 푼도 없는 처지인지라 전쟁이 끝나서도 그 곳을 떠날 수 없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선인의 마을로 자리잡게 도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 전체의 부지가 한 부동산 회사로 넘어가면서 회사가 거기 사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렸고 그로 발생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그 도움의 호소를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수 년에 걸친 가혹한 강제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그들을 거기다 그렇게 냉혹하게 몰아내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멀쩡히 우리나라 땅에 잘 살다가 어느 순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3~4백 미터 지하의 갱도에서 석탄을 캐거나 때로는 단바의 광산에서 처럼 겨우 30CM의 좁은 갱도에 몸을 집어 넣고 망간을 캐거나 우토로 처럼 공항을 건설하거나 일본 자국민에게는 시키지 않을 그런 고되고 위험한 막노동일을 하면서 강제징용 당한 우리 조선인들이 흘린 눈물과 피가 저 일본 땅에 참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그러다 그 후, 단바 망간 기념관에 대한 소식을 TV에서 또 보게 되었고, 그 때 나는 그 고통의 역사적 현장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본에 간다면 나 역시 저렇게 고통의 현장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역사가 새겨놓은 상흔들을 겪고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일단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거기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내 힘으로선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적절한 도움을 얻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사진작가 이재갑의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후쿠오카로 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 곳곳에 아로 새겨진 강제징용당한 우리 조선인들의 상처와 애환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 대부분 일본이나 우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저 무관심과 망각 속에 버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 속 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캐냈던 석탄 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역사적 존재로 남아있는 그 현장을 말이다.

그 대부분의 현장은 "우리의 언어는 아우슈비츠가 어떤 장소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조너선 웨버가 말했던 것 처럼 언어화가 불가능한 그저 망연히 전해져오는 그 곳에 깃든 상처와 고통에 오롯이 젖을 수 밖에 없는, 리오타르가 말했던 바와 같이, '트라우마'의 공간들이다. 지은이는 답사를 통해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의 공간에게 그동안 잃어버렸던, 그렇게 지워진 목소리들을 다시금 찾아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진을 하나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다름아닌 '우리 이웃들의 삶이 때로는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말이 내포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는데 있었는데 작업이 치열해질 수록 바로 그 지탱하는 이웃들의 삶이 무엇보다 역사적인 것이며 오히려 한국전쟁과 일본 강점기 처럼 무엇보다 거센 폭력에 노출되고 그로인한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역사속의 이웃들이 현재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웃인 그들의 눈물과 애환이 우리네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에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과도 같아서 그는 일본 전체에 걸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트라우마적 공간을 이렇게 하나의 책에다 담으려 하는 것이다.

책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처음에는 이렇게 답사한 곳의 위치가 나와있는 지도가 있다. 다소 대략적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 책이 답사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동안 망각 속에 버려졌던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삶을 다시 환기시키는 데 있음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환기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작업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당연하겠지만 그는 그 아픔이 어떻게 현재로 연결되고 있는지,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그 아픔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아울러 담는다. 그러한 측면이 무엇보다 개인의 기억함과 일본 사회의 망각함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즉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복원시키려 노력하는 개인들과 과거의 상흔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지움으로써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 일본 현재의 모습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그렇게 기억하려는 개인과 망각시키려는 사회의 대조를 통해 과거를 이어받는다는 것,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로새기려 한다. 무엇보다 이 사진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강제 징용 당한 한 조선인의 무덤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이 노역 끝에 죽어도 묘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의 무덤은 하나의 돌로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폐허를 지우고 과거의 범죄적 흔적을 지운 현재 일본의 변모해버린 모습에 비해서 이 희생자들의 무덤은 저렇게 제대로 된 표식하나 없이 그저 돌 하나가 된 채 그것도 풀 숲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일본이 그들의 범죄적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꾸만 망각 속으로 떠밀고 있는 듯한 형국과도 같다. 그 곳을 찾아오는 이는 저 할아버지 처럼 그것을 기억하는 개인들 뿐이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신세타령가를 부른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로 시작되는 그 타령은 마치 망자의 혼이 다시금 흘러나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 같다. 말이 아니라 노래,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은 자의 빙의된 목소리라는 점에서 저 돌 하나로 남은 무덤은 그야말로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서의 트라우마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빙의라는 점에서, 그 상처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에서 그 곳은 나와 연결된, 내가 속한 공간이 된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 공간과 연결된 나를 되새김은 비단 내 국적, 내 민족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비단 유태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인류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이 가져온 비극을 상기시키듯, 여기 하나의 돌 무덤에서 환기되는 것도 다른 나라 백성이라고 해서 마구 가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착취가 가져오는 커다란 비극인 것이다. 지금 일본이 지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폭력과 착취의 증거들인 것이다. 지워진 것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아픔, 새겨진 비극을 기억함은 바로 그 반복의 연쇄를 끊는 일이 된다. 초래될 비극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일이 된다.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벽에 쓰여진 글 처럼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돕기 위해 사이타마에서 왔다는 이 누군가의 글은 이러한 기억함의 궁극이 종래에는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지은이가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오키나와에 있는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이 무덤인 '한의 비'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이다. 문득 거기 묻혀진 조선인들 중 하나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고향이었음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감정에 빠진다. 그는 이렇게 그 감정을 고백하며 답사를 맺는다.

"지난 1996년부터 일본 관련 작업을 시작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만들며 나를 합리화하고 이겨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들과 달랐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치솟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마치 이 작업의 당위성이 나의 운명인 듯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p.338)"

이 치솟는 울분, 아픔, 눈물이 바로 트라우마적 공간과의 만났을 때의 반응이며 그것은 모두 저 아픔을 당한 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렇게 나와 연결되고 내가 속해 있는 바로 그 곳의 존재라는 깨달음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도우러 온 사이타마에서 온 사람이나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결국 울어버린 지은이나 트라우마적 공간 앞에서 느끼는 것은 똑같다. 이들이 모두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며 그들의 버려짐이 바로 나의 버려짐이라는 자각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가 정말 이 아픔의 현장들을 둘러볼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도 유년 시절 약주에 취하시면 내내 들려주시던 그 고통과 아픔이 절절했던 징용 시절의 기억이 어디선가 남아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분명 그 곳에 이르면 지은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트라우마의 공간들을 내 몸 여기저기에 새겨놓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잊지 않는 것. 그 어디든 폭력에 노출되고 사회의 강압에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자들은 모두다 내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아마도 그 새겨진 상처들은 그렇게 호소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언제든 빨리 그 곳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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