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애초의 호기심은 이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왜 말을 더듬는 것인가? 

 

  그는 흥분하면 자주 말을 더듬는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하도 자주 말을 더듬는 바람에 형사마저 어느새 거기에 전염되게 만들어 버린다. 말을 더듬는 버릇은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과 함께 긴다이치 코스케를 형성하는 두 가지 커다란 특징중 하나이다.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고 말을 더듬는 것은 사람들로 부터 업신여김을 야기하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다. 모두 천재적 명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적 행위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엘리트다. 마치 그러한 행위들은 그 자신의 현재 신분과 과거의 경력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몸짓으로도 보인다.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러한 버릇들을 코스케에게 부여한 것인가? 어쩌면 그 까닭이 간단할 수도 있다. 그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허무는 작용을 하니까. 명탐정이라는 아우라 때문에 혹시나 거리감을 가지게 될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까지 포함하여 그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러한 버릇들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단순해 보인다. 어쩐지 그 행위들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푼크툼'으로 보인다. 그저 심상하지만은 않은 뭔가 내밀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비밀스런 움직임으로 보인다. 분명 거기에 뭔가 있다. 내 머리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자,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을 더듬게 만들었는가? 

  (그런데 나는 김전일 처럼 명예를 걸만 할 명탐정 할아버지가 없어서 곤란하구나...) 

 

   프로이드에 따르면 말더듬은 무의식이 바라는 것과 이성의 통제 사이에 일어난 긴장의 외상적 증후이다. 즉 그것은 내부의 불일치가 빚어내는 밖으로의 드러남이다. 프로이드의 말대로라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그러한 말더듬을 낳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무의식으로 바라는 것과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과의 차이가 그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범죄의 해결이 될 것이다. 그의 명석한 추리는 분명 이성의 영역에서 행해질 것이 틀림 없으니. 그렇다면 그것과 정반대의 것을 무의식이 원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은 그러한 범죄의 해결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여기서 또 하나 환기되는 것은 이제는 유명해진, 범죄를 막는데 있어 그가 보여주었던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는 명탐정 역사상 범죄 예방에 있어서는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기도 하다. 어떤 땐 일부러 범죄를 방치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될 정도의 이 무기력은 또 어찌 된 연유란 말인가? 아, 우리는 물어야 할 질문이 많다. 그러나 그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모이게 된다. 그의 말더듬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저함이다. 이성은 곧바로 해결을 원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무의식은 계속 해결을 지연시키려 한다. 때문에 범죄를 막는데 있어서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이 범죄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근본적 원인 때문이라는 것으로... 

 

 

 

  다시금 '혼진 살인사건'이 돌아왔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일본 최고의 명탐정으로 손꼽히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전설적 데뷔작으로 웬만큼 유명해졌다. 70년대적 번역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동서판과는 달리 지금 현재의 어법으로 쓰여진 번역이라 이제 좀 더 소설속의 내용이 확실히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혼진'이라는, 에도 시대의 지방 영주들이 반란 예방 차원으로해 인질이 되기 위해 막부로 가는 도중 들르는 여관이 사건의 주무대이기에 그 일본 전통 가옥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묘사가 없으면 독자 스스로 사건을 인식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해서 더욱 정확한 번역이 요구되던 차에 이렇게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돌아와 주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엔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두 개의 단편 또한 부가되어 있다. 하나는 '옥문도'와 '팔묘촌'등 그의 초기 걸작들과 비슷한 시기 발표된 '흑묘장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발표는 그와 비슷한 시기였으나 개작은 55년에 이루어진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이다. 누가 선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세 작품이 이렇게 묶이게 된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 편이야 말로 왜 요코미조 세이시가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더듬는 버릇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할 만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말더듬을 주었는가? 이제 이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명탐정 코난 식으로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만한 자신감이 내게는 없다.) 

  거기서 우선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시기다. 긴다이치 시리즈가 무엇보다 2차대전 종전 후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패배는 많은 변화를 몰고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제 그들을 지배할 미국에 의해 그들은 급속도로 서양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될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또한 그 누구보다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나라다. 특히 그렇게 급속도로 재편되는 와중에도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관습들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요 도시들을 제외한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서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과 늘 고수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들이 서로 칼날이 부딪히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바로 그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생각이 정말 어떠했는지는 내가 가진 정보 인지의 한계상 알 수 없으나 요코미조 세이시가 서양의 모던적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껴안았던 동시대의 작가 에도가와 란포와는 달리 일본 전통 사회를 작품의 주요한 배경으로 삼은 것을 보면 아마도 바로 그 변화의 현장을 작품에다 담는 것이 그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가 주로 일본 지방의 촌락인지도 잘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서의 범죄란 바로 그 변화와 전통의 고수라는 두 개의 거대한 바람이 맞부딪혀서 태어난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죄의 성격은 특히나 '옥문도'에서 잘 드러난다. 에도 시대 범죄자들의 유형지였던 '옥문도'는 그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전통적인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린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전쟁이 초래한 변화의 바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결국 그 지배 가문의 대를 이를 장자가 전쟁에서 죽고 만다.  때문에 옥문도의 전통 체제 질서는 큰위기에 봉착한다.  바로 이렇게 '옥문도'는 전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는 일본 전통 사회의 모습이라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천착하는 전형적 공간이었다. 결국 범죄는 그 위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데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옥문도로 갔던 까닭도 무엇보다 전우이기도 했던 그 장자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여동생이 살해당할 것이라며 그녀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옥문도의 내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옥문도가 그러한 상황의 관찰자 역할로 내보내진 긴다이치 코스케가 어째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해 가장 확실한 대답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긴다이치 코스케를 그리로 보내는 것은 사실 범죄를 미연에 막고자 해서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코스케가 원래 이루고자 했었던 목적이 모조리 다 실패하고 마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면 세이시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혼진 살인사건'에 프롤로그 처럼 붙여진 부분에서도 보여지듯이 - 거기 '혼진'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쓰고 있는 작가가 예전 그 사건이 일어난 혼진으로 걸어가 다시금 돌이켜 보는 것 처럼 - 그 변화가 진행중인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세이시가 이렇게 관찰에 더 중점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 모던의 여파에 너무 크게 반응했던 사가구치 안고 같은 작가는 스스로 '무뢰파'가 되어 모든 일본 전통의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기도 했고 란포 역시 적극적으로 서양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지만 세이시는 아무래도 안고 처럼 극한으로 치닫거나 란포 처럼 서양의 가치관을 주저없이 껴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러니까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섣불리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일까? 

 

  바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가 이 '혼진 살인사건'에 모여진 작품집에 들어있다. 여기에 수록된 세 단편이 기술하고 있는 사건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간통'이다. 초기 작품들에서 요코미조 세이시가 이렇게 '간통'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들어있다고 나는 보여진다. 일본에서 간통죄는 1947년 폐지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간통죄로 처벌되고 있었다. 한 편,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모두 군대에 간 터라 그 공백으로 인해 전후 많은 여성들이 간통으로 인한 처벌의 위험을 안게 되었다. 그렇게 간통죄의 문제가 전후 일본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47년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그러한 상황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세이시가 무엇을 우려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간통의 범람과도 같은 성적 문란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가 본 것은 일본 사회가 전통적으로 고수하고 있던 가치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정확히 그 상황의 목격이 세이시에게 주저를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라는 오명의 뒤집어쓰면서까지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범죄의 해결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어설픈 상황에서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미 바라보았던 탓에 가지게 된 당연한 숙고의 자세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숙고의 자세' 때문에 그는 변화 - 어쩌면 그 궁극에 가서는 비극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협의 존재로서 - '여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혼진 살인사건'의 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왜 작품이 발표된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지의 의미이며(이 역할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안타깝지만 생략하기로 하겠다.) 왜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소녀들을 구하러 옥문도로 갔으면서도 정작 그녀들을 모두 죽음으로 방치해 두는 것인지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서 간략하게나마 긴다이키 코스케가 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고 믿는다. 뭐, 나만의 억측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시 결론지어 말한다면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러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된 것은 요코미조 세이시가 당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 되도록 신중한 숙고의 자세를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이시가 긴다이치가 정말 해주길 원했던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가급적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까지 보다 확실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관찰이었다. 바로 그러한 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세이시의 바람이 '말더듬'이라는 신체적 행위로 표현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더듬 자체가 바로 코스케가 해결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닮아 있지 아니한가? 말더듬이야 말로 보다 확실한 언어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거기까지 이르기의 과정인 것을.  

  

 

  지금까지 발간된 긴다이치 코스케를 한데 모아 찍어본 사진. 발간된 권수는 정확하나 그러나 잘 보면 중복된 것이 있다. 당시 세글자의 제목을 가진 긴다이치 코스케의 시리즈가 연달아 나왔었는데 실수로 착각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사 버렸기 때문이다. 

 (혹시 삼수탑을 저처럼 실수로 구입해서 두 권 가지신 분은 없을까요?  그러면 서로 교환해서 윈-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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