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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하나의 리뷰를 빚어내는 동기는 다들 다르겠지요.
제게 있어서는 책을 읽다가 문득 들게 된 의문이 종종 리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있어 리뷰란 그런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가는 과정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그런 의문은 사실 작품 자체 내에 있다기 보다는 작가가 왜 하필이면 그렇게 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궁금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금 소개하려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물의 잠 재의 꿈'이 특히나 더 그랬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 은 알려진대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입니다.
시리즈에서 잠깐식 등장하곤 했던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의 이야기죠. 물론 나쓰오가 아버지 얘기를 썼다는 것이 저의 의문은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다른 곳에, 그러니까 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2부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쓰고 난 뒤 바로 1년 뒤에 그녀의 아버지 얘기인 '물의 잠 재의 꿈'을 내어놓았나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천사는 94년, 물의 꿈은 95년에 나왔습니다 .) 작가에게 있어 1년이란 참으로 짧은 시간 아닐까요? 그것도 연속된 시리즈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로 부터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를 해온 나쓰오로선 그렇게 오래된 시대의 분위기를 상세하고도 세부적으로 살리기 위한 자료 조사만으로도 1년으론 벅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로 하여금 이런 의문을 들게 합니다. 혹 '물의 잠 재의 꿈'은 애시당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쓸 때 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보면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은 참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한 소녀라는 점. 그리고 그 소녀가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같은 점은 그렇게 객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들에게도 똑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점도 같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어 여기까지만 말하려 합니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행운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두 권을 나란히 읽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모습들이 더 잘 보이게 될 테니까요.
이 둘이 가진 비슷한 측면이 그렇게 많다면 이것은 애초 부터 두 작품이 모두 나쓰오의 머리 속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무리가 없진 않겠지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을 더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나쓰오가 미리 같이 기획을 했다면 그건 분명 독자들에게 나란히 보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1년이라는 짧은 시차를 두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그리고 그렇게 유독 나란히 보이고 싶었다면 나쓰오는 이 두 작품 모두를 가지고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오래동안 이 두 작품을 함께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확신 같은 것도 들고 해서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확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쓰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듣기 위해선 이 두 작품 모두를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러니까 두 작품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당신은 정말 행운인 것입니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94년에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64년에 일본은 동경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그건 2차 대전의 패배로 잿더미에서 시작했던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어 서서히 재건해가던 일본이 드디어 고도 성장의 시대로 돌입했던 60년대의 장밋빛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은 정확히 바로 그 1년전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동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고 일본의 미래에 대해 온갖 장밋빛 전망이 넘쳐나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30년 뒤의 일본의 모습을 나쓰오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30년의 공백이 저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30년은 바로 일본이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던 그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 선진국 진입, 미국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엄청났던 경제 대국. 미국 국민에게 있어 루즈벨트 시절이 일종의 유토피아로 남아있다고 한다면 일본인들에게는 아마 저 30년이 그러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부터 일본의 거품경제는 급속하게 몰락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물의 잠 재의 꿈'은 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그 출구에 서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 나왔던 94년은 급속한 거품의 붕괴로 전후 최초로 대대적인 뱅크런이 일어나 은행이 도산하기도 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물의 잠'이 나왔던 95년 1월엔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었죠.
여기서 이 의문은 이제 보다 본질적이 됩니다.
나쓰오는 왜 하필 아버지의 얘기를 그 입구에 그리고 딸의 얘기를 그 출구에 세웠던 것일까 하고 말이죠. 일본 최대의 풍요로운 시기였던 그 30년을 마치 괄호치듯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거기엔 당연히 작가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의문이 좀 더 근원적으로 명확해지면서 저는 드디어 두 작품이 펼쳐보이는 내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에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하나는 '소카 지로'라고 하는 폭탄 테러범이 일으키는 사건과 다른 하나는 무라노 젠조의 죄책감으로 작용하는 '다키'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혀 다릅니다. '소카 지로'는 일본 사회 초유의 관심사이지만 '다키' 살인 사건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무라노 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오로지 '소카 지로'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키가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거절해 버린 것이고 결국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뒤엎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죠.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서도 똑같습니다. 무라노 미로도 여기의 무라노 젠조 처럼 하나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와타나베의 죽음입니다.(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와타나베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동일하게 언론쪽 일을 합니다.) 그녀가 살해당할 때 미로는 자신이 끌렸던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렇게 젠조와 미로가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충실할 때 그들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결국 초래해버린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30년의 시차를 두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의 하나의 방증이자 사실 그 불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자 함입니다.
즉 거기에는 하나의 무관심이 있습니다. 저마다 보다 더 큰 것을 쫓느라 한 개인의 삶엔 무관심한 것이죠. 나쓰오는 무리노 미로와 젠조의 반복된 죄책감을 통해서 30년 동안이나 일본이 고도성장을 거쳤지만 결국엔 파국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결과가 아니었겠느냐고 은밀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시는 시리즈의 최종작 '다크'에서도 반복됩니다. 나쓰오는 버블의 확장으로 겉으로는 가장 풍요로웠던 80년대의 일본의 가장 가까웠던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 학살'을 가져옴으로써 그 바로 이웃한 나라에서 죽음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풍요로움에만 취했던 일본을 질타합니다. '다크'에서 미로는 '김'이 들려주는 광주에서 학살당한 무수한 시체들이 마구 매장당하던 그 거대한 검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살아돌아왔는지에 대한 생존담을 들으면서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절감합니다. 그 광주의 거대한 검은 구덩이는 '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젠조의 고향이자 다키가 살던 곳인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시궁창 악취가 풍기는 스미다 강을 건너자마자 갑작스레 번화가가 자취를 감추며 거리의 불빛도 쓸쓸해졌다. 어둑한 불빛이 오랜만에 옛 집에 있던 곳으로 가는 자신을 맞이하느 가족들의 영혼 같았다. (P.110)
이 문장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핵심이자 작품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번화가가 사라진, 거리의 불빛 마저 쓸쓸해진, 시궁창 악취로 가득한 스미다 강의 어둑한 저 편은 앞서 사카이데 파티가 열렸던 '하야마마치'와는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바다 냄새가 강렬해졌다. 차는 하야마마치에 들어섰다. 무라노는 길 왼편에 차를 세우고 사카이데가의 위치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물을 것도 없었다. 해변에 포드며 뷰익 등 외제차가 줄줄이 서 있는 집이 보였다. 아마 저 속이 사카이데이리라. 황실 옆의 값비싼 땅에 위치한 저택 주변에는 높다란 담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정원과 맞닿은 해변을 전용 해수욕장 처럼 이용하는 듯 했다. 저택 옆쪽 산에는 수 그루의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P.88)
이렇게 나쓰오는 문장의 배열 까지 섬세하게 똑같이 맞추어 가면서 그 둘의 묘사를 강렬하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것도 후각 시각을 총동원해서 말이죠. 어둔 밤과 환한 대낮, 악취가 나는 강과 푸른 바다, 불빛 조차 쓸쓸한 거리와 외제차로 빽빽한 거리. 거기다 물어 물어 찾아가야 하는 다키의 집과 한 눈에 척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카이데 집과의 대비는 그야말로 나쓰오가 이것을 통해 중심이 되는 공간과 그로 부터 밀려나 무관심속에 버려진 공간을 말하려하고 있음을 무엇보다 확신케 합니다. 그렇게 소카지로에 의해 사회적으로 밀려난 관심 밖의 존재들은 그렇게 공간적으로까지 밀려난 어둡고 냄새나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젠조는 그 스미다 강의 건너편으로 갈 때 오랜 옛 집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더구나 쓸쓸한 불빛들 마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들의 영혼처럼 보입니다. 이 묘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로도 그렇지만 젠조 역시 그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업이 있지만 '특종꾼'으로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정규직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고용하는 이른바 비정규직입니다. 거기다 자신을 거기로 끌고들어왔고 절친 고토와 함께 잘 뭉쳐서 일하던 '군단'는 지금 거의 와해직전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꾸만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늘 집 밖을 떠돌아 다니는 그에게 그 어디서도 안식을 가질수가 없는데 그 밤 다키를 데려다 줄 때 그는 비로소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것 같은 안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나쓰오가 현재의 일본이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디에 눈을 돌려야 하는가 혹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곳은 바로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그렇게 나쓰오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둠을 그들의 목을 잡고 억지로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쓰오는 그 어둠, 그 안에 억눌린 약자들의 삶 이야말로 진정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크'에서 미로가 결국 젠조를 죽이러가는 것은 그 30년을 지워버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나쓰오가 가장 일본의 고도성장기였던 그 30년에 대해 내리는 직접적인 평가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이 아무리 풍요로운 것이었다 해도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방치한 만큼 그냥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며 '물 속으로 익사당한 잠'이며 문자 그대로 '다크'한 지옥일 뿐이었다는 거죠.
제목 '물의 잠 재의 꿈'은 사실 소설 속에 나오는 두 개의 죽음을 그대로 상장화한 것과도 같습니다. 익사당한 다키는 그야말로 '물의 잠'(사실 여기엔 또 하나의 죽음인 '요시코'가 있으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적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그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이며, 재의 꿈 또한 죽은 자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죠. 소설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들'입니다. 물의 잠을 자게 된 인물도 재의 꿈을 꾸었던 인물도 정말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에 피해자들이고 누군가의 의해 그 꿈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나쓰오는 이 둘에게 죽음과 박탈을 가져다 주었던 주체들을(그 둘에게 있어 죽음을 준 자와 박탈을 준 자는 서로 다릅니다.) 비슷한 존재로 묘사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둘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나쓰오는 언급하지 않은 또 하나의 죽음까지 더해서 모두 셋에 대한 피해자의 계보학을 써내려 갑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계보학적 접근을 취하는 것은 그 궁극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그저 원인이 아니라 그것을 일으키게 한 하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장본인'인 것입니다. 나쓰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그렇게 해서 궁극적 장본인을 밝힙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30년 동안 고도 성장기간을 거쳤으면서도 변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본이 파국적으로 전락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수많은 약자들의 죽음을 또한 초래한 존재이기도 하니 당연히 범죄자입니다. 때문에 나쓰오는 그들을 당연히 소설 속의 범죄자들로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또 똑같습니다. 이렇게 자꾸만 드러나는 이러저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저는 어쩔 수 없이 원래 이 모두가 나쓰오의 계획 속에 있던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결국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에서 등장하는 범죄자는 똑같습니다. 물론 존재론적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나쓰오는 두 작품 모두에서 그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로 명확하게 하나의 계층만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부러 바로 하야마마치와 스미다 강 건너편을 병치시킨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계층 자체만을 단순히 공격하기 위해서 나쓰오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열린 과일을 가장 많이 따먹은 계층이기 때문에 상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으로 부터 오는 과일을 먹어치웠다는 것은 곧 계속화된 성장일로를 걷던 그 30년 동안의 일본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쓰오가 그 계층을 범죄자로 잡은 것은 바로 그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 자체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일본 자체가 그들의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었고 결국 그 죄업은 부메랑이 되어 일본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의 결말은 조금은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다크'에서 결국 그 해피 엔딩의 요소가 거꾸로 젠조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는 것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의 잠 재의 꿈'이 나왔던 95년엔 앞에서 얘기했듯이 전후 최대의 지진이라 불리었던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그것은 안그래도 거품이 붕괴됨과 동시에 나날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일본에 내리는 모든 게 끝장났다는 파국적 종지부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대지진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여기에 어떤 운명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도 만듭니다. 아마도 나쓰오는 그것을 일종의 '신벌'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소설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 처럼 말이죠.
놀라운 소설입니다. 더구나 어떻게 이렇게 두 개의 작품으로 그렇게 하나는 30년 동안의 일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다 다른 하나는 출구에다 세워 둠으로써 30년 동안 '그렇게 풍요를 구가했던 일본이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오욕 뿐인가'를 되돌아볼 생각을 했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나쓰오가 이렇게 두 개의 작품을 나란히 세상에 내어놓았던 것엔 보다 깊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 그것을 밝히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척 수다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인 깊이인지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정말 마음에 드는 시리즈인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니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가장 먼 이웃이기도 한 일본을 보다 깊이 음미할 수 있을만한 작품으로도 감히 추천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