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개 매그레 시리즈 5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누런 개'는 일종의 단절이고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이라 할 만합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이 페이퍼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4879544)

   뭣보다 여기에서는 심농이 천착해 왔던 '타인의 삶'이 한 개인에서 한 사회 전체로 보다 넓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확장 속에서 심농은 이제 그 사회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몰고가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포착해내려 합니다. 이전의 네 작품에서는 과거의 상처에서 환기되어 막연한 불안감으로만 남아있던 것이 '누런 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공포로 나타나고 결국엔 그것이 쓰고 있었던 가면 마저 벗겨집니다. 

  여러면에서 심농의 '누런 개'는 조지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를 연상시킵니다. 쓰여진 시기는 비록 누런 개는 32년 숨쉬러 나가다는 39년으로 7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둘 다 뭔가 변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하나의 범죄로 상징화 시켜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심농의 '누런 개'에서는 '누런 개'로 오웰의 소설에서는 그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사체로 나타난 한 여성의 잘려진 다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범죄로 상징되어 나타났기 때문인지 '누런 개'는 매그레 시리즈중(물론 제가 다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읽어본 것만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만)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추리소설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Who done it? 을 파헤치는 '퍼즐러'식 추리소설 말이죠. 그렇게 '누런 개'는 범인 찾아내기를 거대한 줄기로 해서 교묘한 알리바이 공작이라든지 반전과 반전 끝에 밝혀지는 범죄자의 의외성이라든지 아무튼 우리가 전형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농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전까지 해오던 작업을 포기하고 갑자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그가 이제 천착하는 주제가 달라짐으로써 거기에 맞도록 서술의 방법이 달라진 것 뿐입니다. 그렇게 심농이 '누런 개'에서 집요하게 미스터리적 기법을 취하는 것은 그가 '누런 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암암리에 불안으로 물들여 점점 가위눌리게 만들었던, '그 것'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체를 밝히는 데 있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게 하려면 미스터리적 기법 만큼 적합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농은 '누런 개'에서 매그레의 추적 끝에 드러난 한 사람의 얼굴을 통해 그것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웰 자신도 맡았던 그 변화된 공기가 궁극엔 가져올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숨쉬러 나가다'에서 오웰은 이제 세상이 점점 예측불가능해질 것임을 예감합니다.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세상이 곧 펼쳐지리라는 두려움이 그로하여금 모든 내일이 명약관화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도록 만들었고 결국엔 그것을 다시 찾고자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일상으로 부터의 일탈 마저 감행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웰을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그 '예측불가능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전쟁으로서 강요하게 될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전체주의'의 핵심을 '예측불가능성'으로 파악한 것이죠. 왜 오웰이 그렇게 생각했느냐면 그는 전체주의가 무엇보다도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전체주의란 무엇보다도 사유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이죠. 때문에 그것엔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대로 어떤 이해의 시선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불가해한 존재이기에 그는 예측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이렇게 서로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오웰 역시 아렌트 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파시즘이 가지고 있던 핵심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농 역시 그 오웰 보다 7년 전에 이미 그러한 핵심을 눈치채고는 작품에 새겨놓았습니다. 바로 그 산물이 '누런 개'인 것입니다. 

   '누런 개'가 이전 작과 무엇보다도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심농이 파악한 전체주의의 핵심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인물 묘사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확인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 이해관계에만 집착하고 타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머리는 있으나 가슴은 없는 무심한 얼굴인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얼굴이 전적으로 심농에게 혐오스러운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는데 어쨌든 파시즘은 심농에게 야누스적인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이렌의 노래소리를 돗대에 밧줄로 묶인 가운데 듣고 있는 오디세우스 처럼 말이죠. 그렇게 파시즘은 심농에게도 역시 공포이자 매혹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공포로써의 징후를 '누런 개'에서 확인할 수 있고 매혹으로써의 징후를 '타인의 목'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후일 심농이 나치 동조자의 혐의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야누스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어쩌면 심농이 그렇게 된 것은 파시즘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정확히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오웰 이 그랬듯이 당시는 온갖 예측불가능성의 대기로 넘쳐있었으니까요. 심농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일련의 공간 묘사를 통해 시대가 완전히 예전과 다르게 흐르고 있고 그 흐름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농에게도 동시대는 전혀 예측불가능성으로 다가왔기에 파시즘에 대한 태도 역시 이중적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누런 개'는 정말로 뛰어난 심농의 시대적 감식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치밀하게 적용된 미스터리적 기법은 그야말로 범죄 소설이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는 데 있어 얼마나 성공적인 그릇이 될 수 있는지 또한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니 저러니 따지지 않고도 미스터리적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얘기를 '스누피'로 유명한 찰즈 슐츠가 '피너츠'에서 언젠가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으려 합니다. 

   '그저 이것만 기억해. 네가 일단 언덕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 뒤 부터는 속도가 저절로 붙을테니까...' 

   '누런 개'는 바로 그 언덕의 정상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그 다음 작품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 일만 남아있는 셈이죠. 그것도 가속도가 점점 붙은 채로 말이죠.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6-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일로이 2011-06-28 00:27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이렇게 칭찬의 말씀을 해 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저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심농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시대의 예민한 공기를 담아내고 있으리라고는 몰랐습니다 그것도 아렌트 보다 수십년 전에 파시즘의 실체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로 말이죠.하지만 역자님의 좋은 번역이 아니었다면 그런 면을 쉽사리 간파해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누런개'는 다른 번역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이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았으니까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좋은 번역으로 심농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해 주신것에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

에일로이 2011-06-2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 '누런개'에서 레옹과 엠마의 관계는 저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왠지 뤽 베쏭의 영화 '레옹' 이 정말 많이 떠오르더군요. 이름이 같기도 하지만 세 남자에게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는 엠마의 처지가 왠지 레옹에서의 '나탈리'를 연상시켰어요. 그리고 소설의 레옹이 오로지 개 하나만을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처지가 식물 하나만 벗하고 살아가는 영화속 레옹과 또 겹치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뤽 베송이 '누런개'에서 레옹의 영감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조사도 해봤지만 인터뷰 기록은 찾을 수 없더군요. 그래도 왠지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이것도 이전에 읽었을 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연상이었는데 역자님의 좋은 번역 덕분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의 독서는 그래서 정말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많이 느끼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번역이니 이번에야말로 심농의 작가로서의 진정한 면모가 재평가를 이루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