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레의 다섯번째 작품과 여섯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만일 매그레 시리즈를 시즌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는 바야흐로 시즌 2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 할 만한 것 같습니다. 그 만큼 '누런 개'는 그 이전의 작품과 구별된다는 것인데요. 거기다 그렇게 구별되는 점들이 또한 뒤이어 이어질 작품들이 보이는 일련의 경향들 까지 보여주고 있기에 '그 시작'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런 개'가 도대체 어떤 것을 보여주길래 감히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앞서 네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였나를 밝혀 거꾸로 '누런 개'가 가지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겨지는군요. 그렇게 이 페이퍼를 뭣보다 하나의 또 다른 시작이라 할 만한 '누런 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팁 같은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일단,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 부터 네번째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까지 일련의 시즌으로 묶을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도대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당연히 물으실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는 일종의 팁이고 가급적 읽는 이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으면서 핵심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렇게 앞 서 나온 네 작품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공간들에 집중하여 이 네 작품이 어떤 일련의 주제들을 이어오고 있었는가를 드러냄으로서 그것이 '누런 개'와 어떻게 단절되는지 간단히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편의상 시즌 1로 몪은 매그레의 네 작품에서 첫 공간의 모습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점이고 둘째는 네 작품이 커다란 하나의 주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이어지는 단계적인 흐름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부터 시작해보죠. 

  


 이 작품에서 첫 공간은 바로 파리의 북역(GARE DU NOD)입니다. 

 
 “거대한 유리 지붕으로 덮여 있음에도 플랫폼에는 난데없는 돌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붕에서 떨어진 유리 몇 장이 선로 사이에서 박살이 나 있었다. 전기는 끊겼다 통했다 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옷깃을 추어올린 채 움츠린 자세였다.(p.13)” 파리 북역의 묘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파리 전성기의 역사적 상징이자 파리 최대의 역으로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갑니다. 심농은 특히 이별하는 모자와 초조하게 기다리는 여인을 묘사한 뒤 다시 한 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대한 역 모습을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이윽고 기차의 노란 불빛이 멀리서 반짝였다. 잠시 후 짐꾼들의 외침과 개표구로 치닫는 여행객들의 어지러운 발소리로 일대가 혼란에 휩싸였다.(p.14)" 이렇게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북역의 모습은 그야말로 흘러들어오는 혼종된 이데올로기와 수많은 이민자의 물결로 인해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프랑스의 축소판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 한가운데 눈을 부릎뜨고 매그레가 홀로 서 있는 것입니다. 심농은 그 많은 사람들의 오고가는 무리가운데서도 전혀 존재감을 잃지않는 매그레를 특히 강조합니다. 그러한 거대한 존재로서 매그레는 스쳐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작별과 기다림의 순간은 보내는 어머니와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병치되어 그렇게 또 '수상한 라트비아인'의 주요 테마이기도 한 '정체성 바꾸기'를 은밀히 드러냅니다. 사실 오고가는 거대한 사람들의 물결 자체가 자신이 선택할 겨를도 없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가던 프랑스인 나아가서는 유럽인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매그레만이 홀로 그들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치 심농이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걸 상징이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이렇게 처음 등장하는 파리 북역의 모습은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심농이 하고자하는 말들을 그대로 집약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건 다음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처음 등장하는 생파르조 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그레가 사건의 전보를 받고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작은 생파르조역으로 갔을 때는 파리로 스페인 국왕이 방문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 국왕을 경호하느라 모든 형사들이 파리 북역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매그레는 홀로 그 역으로 와야 했습니다.  심농은 이렇게 처음 작품에 나왔던 파리 북역을 다시 등장시켜 이 생파르조 역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왜소함을  강조합니다. 매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파리 북역과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생파르조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더구나 심농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스페인 국왕과 누구하나 관심가지지 않는 갈레씨의 죽음을 또 그렇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렇게 '갈레씨'의 '생파르조역'은 그야말로 갈레씨를 의인화시켜 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그레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 역으로 있는지 조차 몰랐던 한 사람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그것도 홀로 온다는 것은 파리 북역에서 거길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매그레만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작품을 통해 아니 매그레 시리즈 전체를 통해 심농이 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히 드러납니다. 당시 유럽의 혼란한 상황과 경제적 궁핍으로 점점 잃어만가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그만이라도 꿋꿋하게 지켜나가겠다는 일종의 결의에 찬 표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것은 점점 왜소해져만 가던 한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되살려 그 자체로 온전한 개인의 삶의 가치를 다시 회복시키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생폴리앵에 지다'의 노이샨츠역은 어떤가요? 

   그곳은 그냥 지나치는 역입니다.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는 그 역은 매일 노동자들을 태운 통근 열차가 바쁘게 지나가지만 국경을 넘는 통관 절차 때문에 잠시 머무를 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그런 역입니다. 그렇게 잠시 머무는, 이내 버려지는 역이죠. 그래서 흔히 움직이는 열차를 세월에 비유하듯이 그렇게 세월 속에 잠시 머무르다 잊혀진 혹은 그대로 묻혀진 역의 느낌이 강한 곳입니다. 매그레는 바로 여기서 문제의 남자를 만나죠. 그리고 그 남자를 통해 바로 이 노이샨츠역 처럼 어느 세월엔가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묻혀졌던 한 사건의 전모를 결국 알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범죄는 과거에 일어납니다. 그렇게 한 개인의 죽음을 통해 무관심속에 버려졌던 타인의 삶을 온전히 복원해낸다는 것은 갈레씨와 똑같습니다만 갈레씨는 현재의 죽음이고 생폴리앵은 과거의 죽음이라는 점만이 다릅니다. 아무래도 현재에는 부재하는 죽음이라서 그런지 첫 장면에 등장하는 노이샨츠의 존재감도 생파르조 역보다 더욱 옅어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구나 다 서둘러 떠나려고만 드는 그 역은 그렇게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그 과거의 죽음으로 달아나려고만 하는 등장인물들이 의인화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폴리앵에 지다'에서의 노이샨츠 역도 그 소설에서 심농이 하고자 했던 얘기를 집약시켜 놓은 공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심농은 모두 기차역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이 작품에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기차와 자동차에 의해 상대적으로 교통 수단으로써의 중요성은 덜해진,그렇게 시대에 뒤쳐진 '운하'가 그 첫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마부'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그 운하를 바지선이 타고 흐르기 위해서는 두 필의 말이 둑방에서 그것을 끌고가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기엔 또 하나 시대에 뒤쳐진 존재, 자동차에 의해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난 '마부'가 등장합니다. 처음 등장한 공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면 '라 프로비당스 호의 마부'는 그야말로 기묘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오로지 시대에 밀려난 그렇게 '부재한' 것들로만 채워져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주 무대가 되는 화려한 요트 조차 이름이 '서던크로스'입니다. 아시다시피 남십자성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별자리죠. 그렇게 또 '부재'를 표상하는 존재입니다. 심농은 왜 그랬을까요? 왜 유독 이 작품에 그렇게 부재한 이미지들로만 채우고 있을까요? 그가 단순히 오래동안 배를 통해 여행을 했으며 그렇게 친숙한 세계였기 때문에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라는 설명은 제게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찾아야했고 그것이 바로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나온 '과거의 죽음'과 그로 부터 유일하게 자유롭지 못했던 하나의 존재였습니다. 저는 앞서 '생폴리앵에 지다'를 심농 자신의 참회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폴리앵에 지다'에 나오는 과거의 죽음을 그 자신도 겪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기서 달아나려고 했던 사람의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매그레는 바로 심농 자신을 고발하기 위한 존재였죠. 그 자신의 참회를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그에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농은 여기에 아예 그 존재로 하여금 자신에게 보복을 가하도록 합니다. 그가 당했던 아픔을 그 자신도 겪도록 합니다. 그래서 '라 프로비당스'는 그야마로 자학의 산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으로 과거로 부터 자유롭게 위해 스스로 복부에다 깊이 칼을 찌르는 '할복'의 감행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는 존재를 지우려 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욕망이 반영된 결과가 그렇게 부재하는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첫 공간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아닐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때문에 그에게 보복을 가하는 그렇게 작품 끝까지 끈질기게 얽히고 섥히는 배의 이름에다 '라 프로비당스' 즉 '신의 섭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네 작품에 드러난 첫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기엔 부족합니다. 저는 여기에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고 앞서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첫 공간의 묘사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따른 일련의 단계 같은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첫 번째 작품 파리 북역에서 네 번째 라 프로비당스까지 우리는 공간이 점차로 줄어들다가 결국엔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하고 사람의 무리로 가득했던 북역의 공간이 점점 사람이 사라지고 공간이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아예 머무르지 않는 곳이 되고 결국엔 역 조차 사라지는 오로지 부재가 충만한 공간으로 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연쇄로 보이니 여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는 왜 그렇게 공간을 지워나갈까요? '라 프로비당스 호의 마부'에서 공간의 의미는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심농은 거기서 공간을 한 '인간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정의해 보여줍니다. '서던 크로스'는 심농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램스 경의 유일한 안식처였죠.  바지선 '라 프로비당스호'의 조그만 마굿간도 그 누군가의 그러한 유일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런데 결말에 가면 그 모든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처음 공간이 점점 사라졌듯이 램스 경의 서던 크로스도 바지선 '라 프로비당스 호'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램스 경은 계몽시대 이래로 퇴락해 버린 귀족 계급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그의 사라짐은 이제 전통적 의미에서의 유럽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의 섭리라는 뜻을 가진 라 프로비당스호가 비워짐은 그렇게 신의 섭리가 더 이상은 작동하지 않는 유럽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심농은 죄의 원인이 되었던 자도 그 죄를 심판한 신도 모두 사라지게 만듭니다. 전통적 의미의 모든 가치가 사라진 공간. 이제는 전혀 낯설게 되어버린 공간. 그것이 바로 심농이 바라보던 당시의 유럽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수상한 라트비아인' '갈레씨' '생폴리앵에 지다'도 모두 '라 프로비당스호' 처럼 '바뀌어버리는 시대, 바뀌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꾸준히 하나의 얘기를 다르게 변주해가며 해왔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라 프로비당스호'에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모든 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안식을 얻을 곳은 그 어디도 없습니다. 이것이 심농이 내린 최종적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입니까? 안식이란 그리고 무슨 의미입니까? 편안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서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을 일상에 안도감을 느끼고 편안해 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그렇게 자기가 속한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변해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면 아마도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하리라 봅니다. 심농이 최종적 결론을 그렇게 내린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시대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가져다준 명확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점점 세력을 더해가는 파시즘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뭔가가 꿈틀대고 서서히 촉수를 뻗쳐오고 있음을 느낀 것 입니다. 비슷한 것을 동시대를 살았던 조지 오웰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질 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불안은 그렇게 유럽 전체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현재를 심농의 매그레 초기의 네 작품은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를 담아내는 것을 '라 프로비당스호'로 종결한 심농은 이제 새로운 작품 '누런 개'에서 부터는 그가 추적하는 그 불안의 정체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려 합니다. 심농을 의사에 비유하면 이전의 네 작품은 일종의 환부의 관찰이 될 것이고 '누런 개' 부터는 일종의 진단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누런 개'가 그 진단으로써의 '시즌 2'의 시작이라고 감히 판단해 봅니다. 그리고 그 추적의 과정을 더 없이 흥미로운 마음으로 음미해 볼 생각입니다. 

 

   심농은 30년대가 가진 시대의 '대기'를 여실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때와 지금의 우리와는 그리 별로 멀어보이지 않습니다.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과 똑같이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대는 점점 예측불가능하고 이전에는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온갖 부조리한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고귀한 전통적 가치들은 자본에 의해 사라진지 오래이고 사람들은 당시의 유럽 산업자본가들이 그랬듯이 타인들을 그저 이용가능한 도구로만 여깁니다. 한진중공업 사태을 비롯 기득권들로 부터의 온갖 억압과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에서 30년대의 유럽을 연상하는 게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매그레를 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읽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시즌2로 이어지는 매그레의 추적을 같이 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감히 끝맺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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