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새 날다
구경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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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미의 신작 '키위새 날다'는 한 아버지의 느닷없는 복수 선언으로 시작된다. 팔 년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그냥 위암에 걸린 것이 아니란다. 그렇게 위암에 걸릴 정도로 누군가가 심하게 정신적 학대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 사람이 엄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하품하다 낚시줄에 걸린 메기 처럼 커다랗게 눈을 꿈뻑이는 자녀들은 아랑곳않고 아버지는 내처 그 복수의 대상까지 밝혀버린다. 바로 엄마가 시장에서 양말 자판을 할 때 그 맞은 편 옷가게 '국제상사'의 여사장이란다. 낚시줄에 걸린 메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끌려 올라가는 것 밖에는 없듯이, 자녀들 역시 얼른 이해되지도 않는 이유들을 들먹이는 아버지의 복수 계획에 뭔지도 모른 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끌려 들어간다. 

  이렇게 복수 선언과 그에 따른 복수 계획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그러나 속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복수'는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당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다른 손으로 'UFO가 떴다'고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수를 상정하고 읽을 경우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 즉 작품의 분위기가 가볍다던지, 복수의 동기가 뚜렷하지 못하다던지, 계획 마저 어설프기 그지없다던지, 복수를 테마로 하는 작품답지 못하게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며 전개가 산만하다든지 하는 것들은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 소설에서 '복수'란 게 그리 중요한 테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하나의 동력에 불과했을 뿐! 더우기 작가가 정말 복수를 소설에 끌고 들어온 것도 '대상의 제거'에 있지 않다. 그러니까 흔히 '복수'란 소재가 '독자'에게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상황장악력(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힘) 때문이 아니라 복수가 가지는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상황장악력'(그러니까 복수가 그들의 일상을 복수를 중심으로 블랙홀 처럼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이전까지 영유하고 있던 일상생활을 여지없이 찢어버리고 '복수'라는 압도적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끌여들여온 것이다. 마치 '태초에 빛이 있으라'라는 말 때문에 세상이 태어났다고 말하는 성경의 창세기 처럼, 소설을 펼치자마자 아버지의 복수 선언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복수 선언은 그들의 일상을 확 바꾸어 버린다. 이전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던 일상의 굴레에서 그들을 폭력적으로 빠져나오게 만든다. 이 일상의 '변화'. 이것이 사실은 이 소설이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제목인 '키위새 날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키위새란 뉴질랜드에서 서식한다는 날지 못하는 새를 말한다. 태어날 때 부터 날개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란 고립된 섬에서 아무런 천적의 위협 없이 안온하게 오래도록 살다보니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고여있는 웅덩이는 그저 썩어만 가듯이, 그처럼 아무런 변화없이 사는 존재들에 대한, 어찌보면 섬뜩하기도 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또한 '키위새'들이다. 아버지와 그의 딸 하은수 그의 아들 하경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복수 대상이 되는 국제상사의 여사장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가족들이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잎사귀가 말라버린 대추나무 처럼 한 집에 붙박혀 살아왔듯이, 그 여사장 또한 커다란 국제상사 안에서 어마어마한 옷더미에 짓눌린 채 박힌 못마냥 살아온 것이다. 그건 복수로 한을 풀어주려 하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국제상사 앞 자판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고정된 장소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날 줄 몰랐던 그네들은 그렇게 날개가 퇴화되어버린 키위새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그 키위새들이 날아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초입, 아버지의 복수 선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이 천착하는 복수의 과정들은 그렇게 변화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어떡해든 해보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시도는 '타인의 자리에 서기'로 나타난다.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가족과 국제상사 여사장의 가족이 상당히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국제상사의 여사장 또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것이다. 하경수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염탐을 위해 국제상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싹싹하고 일을 잘하는 경수는 곧 여사장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건 소설에서 여사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냈던 아들에 대한 신뢰와 겹친다. 그렇게 하경수는 여사장의 실종된 아들의 자리에 선다. 하경수의 누나 하은수는 그와 똑같이 여사장의 딸의 자리에 선다. 여사장의 딸이 오빠를 이해하고 뭔가를 해주려 하였듯이 은수 역시도 그와 똑같이 여사장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하고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 한다. 그렇게 작가는 변화의 시도를 타인의 자리에 서 보는 것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물론 날아보려 발돋움을 하는 것은 자녀들 뿐이다. 정작 복수 선언을 했던 아버지와 그 복수의 대상이던 여사장은 조금도 아무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사실은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건 소설 속 여러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각각 그 세계에 있어서 중심이라는 것. 그들이 똑같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실을 상상적으로 메우려 한다는 것(아버지는 집을 잃지 않기위해 수술을 포기함으로서 엄마를 잃게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사장을 그 원망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게 그는 상상의 이야기를 꾸며댐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 여사장은 상실된 아들이 현재도 어딘가 살아있다는 자신의 상상에 근거를 만들기 위해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행자들에게서 그들의 여행 경험을 구매하여 마치 자신이 다녀온 것 처럼 이야기한다.) 더하여 결국 날아오르는 것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만다는 것도 똑같다. 

  남들에게 걸을 수 있는 구두를, 그렇게 언제나 고정된 지점을 훌쩍 떠날 수 있는, 말 그대로 변화를 받아들임을 뜻하는 구두를 만드는 아버지가(아버지는 자주 하은수에게 구두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정작 그 어떤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아버지의 복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의 일상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더욱 더 견고히 시키려는 의도에서 발현된 것이라 봐야한다. 때문에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일상을 변화당하는 은수와 경수의 '복수'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과 시장이라는 누구에게나 왕래가 자유로운 곳에 있으면서도(거기다 '국제상사'라는 간판 이름 자체에서 오는 광활한 활동영역이라는 느낌마저 가미한다면) 늘 가게, 골방, 가게 앞 포장마차와 같이 끊임없이 좁은 곳에서만 서식하는 것 같은 여사장의 모습은 어찌보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늘 아버지와 여사장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던 소설이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자신의 장소에서 빠져나와 옥상에 올라간 순간,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빠져나온 순간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시장 거리를 걸어내려오는 여사장을 만나게 하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그 길은 어제 내린 큰 눈으로 얼어버린 자꾸만 미끄러지는 길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공간이다. 

  결국 아버지와 여사장이 그 한정된 공간이 표상하는 '붙박힌 삶'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망집'때문이다. 아버진 아내 '엄마'가 여사장에겐 실종된 '아들'이 각각 망집으로 남아있다. 그건 영원한 상실이므로 도저히 메울 수가 없는 것인데도 아버지와 여사장은 어떻게든 그것을 메우려 애쓴다. 아버진 복수에의 집착으로 여사장은 이야기 지어내기로. 그렇게 그 망집은 욕망의 또다른 이름이 된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사마귀 내기' 장면은 여기에 있어 중요한 암시가 된다. 거기서 사장을 염탐하러 갔던 하은수는 여사장이 사람들과 사마귀 목에 줄을 감고 그 줄을 손으로 잡고 사마귀를 놓아준 다음, 그 사마귀가 무사히 반대편 쪽으로 길을 건너가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장면을 보게 된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이것이 하나의 비유임을 알게 되는데, 물론 사마귀는 아버지와 그 여사장을 가리키며 망집이 바로 그렇게 사마귀 목에 감긴 줄을 잡고 있는 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그 줄로 인해 사마귀가 달아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도 영원히 망집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암시받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결국 사마귀는 길을 다 건너지 못하고 자전거 바퀴에 깔려 죽는다.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들, 그렇게 영원히 키위새로 남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망집이란 그렇게도 무거운 것일까? 달아나기 힘든 굴레일까? 작가는 그것에 대해 '비밀상자' 에피소드를 통하여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밀상자'는 여사장에게 있어 망집 그 자체와도 같다. 아들이 해외여행 도중 보내준 그 상자는 비밀장치가 여간 아니어서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여사장은 그 상자 안에 아들이 실종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은수에게 열어달라고 맡긴다. 하은수는 결국 열지못하고 그래도 집에서 가장 손재주가 있는 아버지에게 맡긴다. 아버지가 결국 열긴 연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런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밀상자'의 에피소드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애초부터 부재했다는 것은 아버지와 여사장의 망집이 원래 뚜렷하게 근거가 없는 그저 스스로 만들어낸 작위적 집착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어이없이 해결되어 버리는 그 장치는 망집이라는 것이 그렇게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르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마음에 아주 작은 바람이 불어도 그렇게 사소한 마음의 변화만으로도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 처럼 쉬이 허물어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비밀상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그대로 주인공 가족이 가지는 '여사장에 대한 복수'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즉 '비밀상자'와 '복수'는 바로 동일한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복수의 결말에서 받는 느낌이 비밀상자의 결말에서 받는 느낌과 그리 다르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소설 '키위새 날다'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날개짓이다. 혹은 그것을 향한 발돋음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공하는자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모두 외부로 부터 주어지지 않은 오로지 그 스스로 내부적 동기만으로 도약을 위한 시도를 해보려했던 자들이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삶의 변화를 받아들였던 자들, 하은수와 하경수 그리고 여사장의 딸이다.  문제는 비밀상자와 복수의 결말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에서도 집약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그건 아주 사소한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문에 하은수와 하경수의 심경의 변화가 그리 극적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 문득 변해버리기 때문에 읽다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나쁘게 말하면 무리한 캐릭터의 변화이지만 '비밀상자'나 '복수의 결말'이 주는 암시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 변화의 계기란 게 얼른 눈치도 차리지 못할 만큼 사소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더하여, 이들에게서 보이는 또 하나의 공통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타인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타인의 자리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와 여사장에겐 그러한 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건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 같은 것을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때문인지 결말로 갈수록 처음엔 그저 아버지 앞에서 약한 존재에 불과했던 그들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도 받게된다. 마지막의 '원장이 없을 때는 내가 대장이다"라는 하은수의 말은 그렇게 강해진 그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작은 소설이다. 맘만 먹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만에 읽을 수도 있는 소설이다. 거기다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조금은 헐겁게 스케치하듯 이어지는 소설이라 꽉 짜여진 전개가 아니어서 더 부담없이 대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빈틈없이 전개되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라면 이 소설의 헐거운 구성은 좀 불만을 사게될 듯도 하다. 하지만 문득 고개들어 지하철 차창 밖으로 보게된 저녁 노을에 덩그러니 떠 있는 빨간 애드벌룬에 왠지 꽉 죄인 넥타이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 일상의 사소한 변화에도 내가 가진 삶의 자그마한 편린들을 자주 곱씹곤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냥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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