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있는 이야기들은 1933년 부터 1934년에 씌여진 것들이다.  나는 그것들이 스티븐슨과 체스터튼, 폰 스턴버그의 초기 필름들로 부터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렇게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제1판 서문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말년에 그러니까 69세 때 했던 어떤 인터뷰에서도 그는 그 때까지 늘 자주 읽게되고 은혜를 느낀다는 작가로 체스터튼을 꼽기도 했다. 이렇듯 보르헤스에게 있어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창작 활동에 있어서의 일종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라 일컬어지는 '탐정소설 기법'은 바로 이 체스터튼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체스터튼으로 부터 플롯을 기하학적 도표로 축약시키는 방법과 범죄자는 창조적인 예술가지만 탐정은 단지 비평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배웠다"라고.  

 보르헤스는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탐정소설들이 특히 사건들에 초자연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체스터튼의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얼른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들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체스터튼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와 기지로 결국은 그것들 모두가 이성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르헤스에게 체스터턴이 펼쳐보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것은 이성의 가느다란 빛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미로를 연상시켰고 그 내밀한 혼돈의 미로를 오로지 이성의 빛만 의지하고 탐색할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것에 보르헤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미로이고, 그 미로 속을 어딘가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 떠도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렇게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자연적인 성격'과 그 안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탐정' 기법은 보르헤스에게 있어 소설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체스터튼이 결국 이성으로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원형의 폐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성은 겹겹으로 이루어진 초현실 속에서 그저 헤메이는게 고작이며 어쩌다 찾은 출구도 또 하나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고 그렇게 인간은 마치 그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책을 찾아 헤메이듯이 영원히 하나의 진실을 찾아 헤메일 운명이라고 봄으로서 체스터튼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오마쥬라 할 수있는 닥터 후 시리즈의 '도서관' 에피소드  中

  이렇듯, 그의 영감과 소설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체스터튼의 작품들을 그것도 보르헤스가 특별히 고르고 고른 작품들을 통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보르헤스의 영감의 원천을 탐색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아폴로의 눈'을 읽는다는 것엔 이중의 이득이 있다. 하나는 보르헤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체스터튼 소설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가 어떤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특별히 꼽은 체스터튼의 단편들은 이것이다. 

계시록의 세 기병
이상한 발소리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
아폴로의 눈
이르수 박사의 결투 

 앞서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의 사건들이 모두 초현실적인 것에 주목했다고 했는데 이 단편들은 그야말로 그런 것에 충실하다. 첫째 단편, '계시록의 세 기병'은 왕국에게 위협이 되는 한 저항시인을 사형시키려는 장군이 그의 시를 사랑한 왕자가 시인을 사면하려고 전령을 파견하자 그 전령을 죽여서 사면을 막고자 한 병사를 급파한다. 그런데, 결국 그 전령을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시인은 사면되어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둘째 단편 '이상한 발소리'는 이른바 VVIP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된 한 호텔에서 은식기가 모두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종업원 중 한 명이 우연히 그날 쓰러져 일을 못했으니 분명 한 명 부족했어야 할텐데, 종업원들이 그 날 다 있었다는게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된다. 셋째 단편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체스터튼의 이러한 초현실적 성격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미스터리하게 사라진 영주를 찾기 위해 글렌가일 성으로 들어간 브라운 신부의 일행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세팅되지 않은 보석들과 촛대없는 한 무더기의 양초들 그리고 가루째 쌓여있는 코담배 가루들, 찢겨져나간 성화들 등등의 성안의 기이한 현장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넷째 단편 '아폴로의 눈'에서는 이단 종교에 빠져버린 한 여자의 미스터리한 추락사를 다룬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엘리베이터 통로로 추락했는데 그 시간 모두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그녀는 거기 혼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하지만 자살은 아니다. 그럼 누가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다섯째 단편은 '이르수 박사의 결투'는 공개적으로 이르수 박사에게 결투를 요청한 단단한 체구의 사나이가 결투 하루 전 날 미스터리하게 사라져버린 사건을 다룬다. 여기서 두 개의 단편은 사실 그 사건의 신비로움 보다 오히려 해결 방법 때문에 보르헤스의 주목을 끈 것이다. 그건 바로 '이상한 발소리'와 '이르수 박사의 결투'다. 이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분명 이 단편집을 통해 우리는 보르헤스가 주목했던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현실적인 특성'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앞서 체스터튼과 보르헤스의 비교를 들면서 체스터튼의 특징은 그러한 이성적으로는 얼른 파악하기 힘든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브라운 신부의 기지로 이성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그대로 이 모든 사건들은 브라운 신부의 탁월한 추리로 다 파헤쳐지는데 그 단서가 되는 것들이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 특히 주목을 끈다. 이러한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 단편이 바로 '이상한 발소리'이다. 이 단편은 호텔에 우연히 쓰러져 사경을 헤메는 종업원을 위해 불려온 브라운 신부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쓰다가 우연히 바깥에서 듣게된 발소리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발소리 하나 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고 하니 얼른 해리 캐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단편이 떠오른다. 해리 캐멀먼의 그 단편 역시 우연히 듣게 된, 제목이기도 한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한 문장만으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 이처럼 하나의 작은 단서가 큰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 속에 움직인다는 뉴튼식의 물리학적 세계관이 짙게 투영된 결과이겠지만 체스터튼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그에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보르헤스가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체스터튼이 무엇보다 '사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비밀스러운 사람(P. 7)'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래도 조그만 사물의 변화에도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예민한 감각은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주위의 사물들을 파악할 것이다. 브라운 신부의 해결 방식이 아주 사소한 단서로 시작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체스터튼의 개인적 자질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그야말로 '혼돈 속을 정처없이 유랑하면서도 오로지 진실 추구의 열정으로 끝까지 걸음을 계속하는 탐색 과정속의 인간'을 자신의 소설 속 원형으로 삼았던 보르헤스의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출구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가 지금 있는 그 곳의 주위 사물들이 어떠한 상태인지 예민하게 파악할 수 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예전에 한 번 온 곳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관찰하고 대조할 것이다. 그처럼 주위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탐색 과정으로서의 문학'에 찬착하는 보르헤스에게 있어 하나의 주요한 방법이 된다. 결국 이것은 무수한 텍스트...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텍스트들일지라도 세심하게 파헤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소설들은 글들에 관한 글들이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의 세계관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오로지 '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늘 가까이 하고 애착을 가졌던 체스터튼의 단편들 중에서 그가 특별히 고른 단편집 '아폴로의 눈'은 이렇게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독자적으로 살려내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유익한 시간을 갖게 한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단편들도 매력적이지만 보르헤스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사랑스러운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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