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슬란드... 

  이 책을 읽기전 '그래, 그런 나라도 있었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인들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나라중의 하나로 면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인구는 30만명 정도 밖에 안된다. 

                       혹시 위치를 모르실 분들을 위해 지도를 펼쳐보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겨우 30만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사는 나라의 범죄 소설이라...별다른 사건이 있을가 싶었다. 그런데 아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인드리다손 소개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지만 다시 인용해 본다.)

 처음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쓸 소재가 없을 거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 곳 사람들은 누구를 쏴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LA가 아니니까. 하지만 글을 쓸 소재는 풍부하다는 게 밝혀졌다. 사람들은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마지막 말이 가슴에 울렸다.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말에... 그래서 '저주받은 피'를 읽었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저주받은 피'의 첫장을 넘긴 그 날,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까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한걸음에 모두 읽고 말았다. 아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마치 나를 범죄 소설의 새로운 대륙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인드리다손의 말 그대로였다. 범죄소설의 소재는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설을 읽는 우리들 역시 범죄의 해결에서 오는 쾌감만을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문학을 통해 얻는 정신적 고양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건 단순한 쾌락과는 다르고 고양되는 이유 또한 참 많이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문학이 우리에게 그것을 준다는 것이다. 문학은 읽는 자를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준다. 우리는 거기서 존재의 이유나 삶의 의미들을 스스로 체득하거나 아니면 정말 절실했던 위안들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문학에 고귀한 위치를 허락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장르 문학은 오로지 쾌감만 전해준다고 순수 문학은 늘 비웃곤 했다. '단순한 트릭 풀기. 범인 찾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순수문학은 장르문학들을 질타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장르문학에 빠진 아이들을 걱정했고 늘 사회문제적 범죄가 있을 때마다 그런 문학이 영혼들을 병들게 한다고 떠들었다.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으로 나눠 우월과 저열로 평가하는 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가 자주 하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뒤이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그런 차별이 부당하다며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더구나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적 기법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소설 기법으로까지 삼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나도 그런 것에 길들여져 버렸는지 그만 장르문학을 읽을 때는 그런 것을 찾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만났다. 그저 흔한 범죄소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한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묵직한 정서적 충격을 받을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범죄소설도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가능했어!'라고 몇 번을 감탄했는지...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앞서 순수문학이 장르문학에 행했던 비난에 대한 제대로 된 공박이 될 것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설과 그 격을 같이 한다. 만일 당신이 '멀베이니 가족'이나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이게 문학이야!'라고 했다면 그와 똑같이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을 읽고 외쳐될 게 틀림없다. 그만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장르성을 초월하여 순수 문학적 가치로도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소설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발간 순서대로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의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소설은 주인공인 수사관 에를렌두르의 자아의 성장 과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만든 바 있었던 '앙트완 두아넬' 연작과도 같기 때문이다. '앙트완 두아넬' 연작은 트뤼포가 앙트완 두아넬이 실제 성장하는 과정에 맞추어 연속적으로 만든 영화들을 뜻한다. 데뷔작이기도 한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트완 두아넬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마다 트뤼포는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각 나이대마다 가장 중요했을 삶의 모습들을 거기에 담았다. 이처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도 모두 에를렌두르 연작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들은 한 마디로 정확히 어떤 한 시기 마다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실했던 물음들의 대답이라 할 만하다. 

 소설마다 우리의 주인공 에를렌두르는 언제나 고뇌에 빠진다. 그건 사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딸 에바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늘 한 겨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내면엔 오로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럼 가득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컸던 나머지 타인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그래서 결혼은 불행했고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불행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둘 있었다. 애초부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를렌두르는 아내 뿐만이 아니라 자식들과도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고 끝내는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리는데까지 이르렀다. 에를렌두르는 에바가 그렇게 마약중독자에다 구제할 길 없는 실패한 인생을 사는 건 다 자기 책임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얼어붙은 영혼으로 인해 도대체 자기가 에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에바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를렌두르에겐 그것이 늘 고민이다. 에바가 그저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엉망인 삶을 살고있으니 에를렌두르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소설은 각 시기마다의 에를렌두르의 그 고민과 함께 한다. 

 그렇게 처음 작품 '저주받은 피'는 에바가 자기랑 같이 지내게 되고 거기다 아기까지 임신함으로서 새삼 깨닫게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와 아버지로서의 자각에 대응하는 작품이다. 두번째 이 소설 '무덤의 침묵'은 그 자각에서 이어지는 그러니까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한 대응이다. 마지막으로 '목소리' 역시 '무덤의 침묵'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끝까지 가족을 지켜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는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 '저주받은 피'가 아버지로서의 인식, 다시 말해 칸트식으로 해서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한다면, '무덤의 침묵'과 '목소리'는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 그러니까 칸트식으로는 '실천이성비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마지막 비판서, '판단력 비판'에 해당하는 작품 역시 나왔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에선 더이상 인드리다손의 작품이 발간되지 않는다고 하니 확인해 볼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무덤의 침묵' 영어판 표지

'무덤의 침묵' 시작은 이렇다. 우연히 발견된 뼈 하나로 인해 공사장에서 아주 오래된 유골이 드러나게 되고 에를렌두르 수사반장은 이 유골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는다. 유골의 주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묻혀있는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유골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는 딸 에바로 부터 제발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유골의 드러남과 도움을 요청하는 에바의 호소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두 사건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두 사건이 지금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박한 고민 즉, 에를렌두르가 앞으로 에바에게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나름의 성찰적 과정이 되리라는 것의 암시이다. 그는 아직도 에바를 대하는 게 서투르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인식은 가졌지만 과연 그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갈피도 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골의 부름은 바로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인드리다손의 소설 답게 이 유골 또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 처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묻혀져 있던 기억이 갑작스레 현실에 출현하는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것이 오래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소설 '무덤의 침묵'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만드려는 일종의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인드리다손은 전작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나마 느슨하게라도 유지되고 있던 미스터리로서의 성격을 과감히 포기하고 처음부터 그 유골의 얘기를 병행해 나간다.

 때문에, 이 소설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유골에 의해 시작된 수사과정으로서의 현재와 그 유골이 간직한 기억이라는 과거이다. 

  유골이 간직한 기억은 고통스럽다. 여기엔 아주 오래도록 남편에게 구타를 비롯한 온갖 학대를 받아왔던 한 여자의 고통이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남편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남편은 이제 그녀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자식들을 죽여버릴 것이라 협박한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어떠한 남편의 학대도 묵묵히 참아낸다. 오로지 자기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한편, 병행되는 현재의 시간은 에를렌두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는 유골이 누구이며 어떻게 거기에 묻혀있는가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에바도 보살펴야한다. 유골이 나타남과 동시에 에바가 에를렌두르에게 도움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다. 에바를 겨우 찾아내었으나 임신중이었던 에바는 다시 마약을 복용하는 바람에 유산을 하고 그만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버린다. 깨어나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의 에바 앞에서 에를렌두르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비통하게 자각한다. 

 그런데 그 자각은 에를렌두르가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 속의 그녀가 아니라 바로 그녀를 학대한 남편과 별 반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인드리다손은 그렇게 그녀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학대했던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가 사실은 같은 존재임을 바로 그리무르의 과거를 통해 드러낸다. 에를렌두르가 가족들에게 소원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눈보라 속에서 동생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죄책감은 타인을 자신의 내부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그것으로 동생을 포기한 죗값을 받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을 벌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오히려 더 큰 비극만을 낳고 말았다.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엉망인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토록 원하던 아이마저 잃고 의식불명에 빠져버린 에바의 존재는 그에게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다. 그가 에바를 바라볼 때 마다 비쳐지는 건 자신이 결국은 그리무르였구나 하는 뼈아픈 자각 뿐이다. 

 그리무르도 그랬다. 그가 그의 아내와 가족을 그토록 학대했던 이유는 그 역시 어린시절 그런 학대를 받고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입양되었는데 그를 거둬들였던 부부는 그리 좋은 부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가족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그들의 학대를 통해 배웠다. 그 외 다른 것으로는 가족이란 걸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가 가족을 그렇게 학대한 것은 어쩌면 그가 아는 전부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과거의 상처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에를렌두르가  과거의 상처로 가정을 져버렸듯이... 

 과거의 상처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로서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는 함께 서 있다. 하지만 에를렌두르는 과거속의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무서운 학대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자,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녀 역시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자였고, 현재 역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래 역시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식들을 지키는 것에 온 삶을 걸었다. 그녀 인생에 그녀는 아예 없었다. 오로지 자식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 그리무르의 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유골이 보여주는 과거의 존재는 이제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하나의 해답이 된다. 에를렌두르도 그녀처럼 에바를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해답이다. 그의 과거의 상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지금 현재 그의 눈 앞에 도움을 전적으로 의지해 오고 있는 에바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이 바로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의 명령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에를렌두르는 첫째 딸 미켈리나에게 그녀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다.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에를렌두르가 바로 그 명령을 따르겠다는 결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것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 이름을 듣게되는 순간 의식을 잃었던 에바가 깨어난다.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 이름은 소설을 내내 읽어가던 독자들에게 까지 큰 감동을 준다. 그렇게 이름 하나 없이 내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살았던, 제목 그대로 '무덤의 침묵' 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 무엇하나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로 작정한 그 영혼이 마치 처음으로 그 이름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에...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던 것 처럼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도 그만큼 영혼의 고결하고도 위대한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에를렌두르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시금 내가 속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가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유골의 신원을 몰랐을 때 수사반이 거기에 붙인 별명이 흥미롭다. 처음 발견된 장소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그것은 바로 '밀레니엄 맨'이었다. 밀레니엄은 지나간 천년의 끝이자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과거의 고통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시작하는 에를렌두르와 혹 어쩌면 우리들 모두에게도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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