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밀리언셀러 클럽 73
P.D. 제임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P.D 제임스는 작가적 지명도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너무 무시되는 감이 있다. 알라딘을 검색해 봐도 그녀의 작품은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게 이 소설과 동서미스터리로 나온 '검은 탑'뿐이다. 2006년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작은 커녕 그녀의 다른 작품마저 나오지 않고 있다. 

  

 위 그림에서 보듯 PD JAMES의 해외에서의 평가는 이러한데, 왜 이렇게 그녀는 국내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일까? 팬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에 애착이 많다. 그나마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 역시도 그저 흔한 미스터리로 치부되고 그나마 평가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모처럼 만나볼 수 있는 P.D 제임스의 작품이 이런 평가를 받고있다 보니 이 작품을 위해 정말 두 팔 걷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된다. 

 버니 프라이드가 죽은 아침 코딜리아는 베이커루 지하철 노선이 고장을 일으킨 탓에 람베스 노스 역에 발이 묶여 사무실에 삼십 분 늦게 도착했다.(p.11)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승패는 모두 첫 문장에 달려 있다.'라고 흔히 말하곤 했는데, 내겐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성공적으로 보인다.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당길 뿐만 아니라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면 버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암시가 은밀히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삼십분 때문에 코딜리아의 인생은 확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어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세상의 작은 우연이라는, 삶이 가진 어떤 아이러니한 속성마저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코딜리아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립탐정 사무실을 공동경영하고 있는 버니 프라이드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장은 그가 그 30분내에 결정했음을 암시하는듯 하다.) 그는 유서를 남겼는데, 그것은 그가 암에 걸렸기 때문에 병으로 죽기 전에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코딜리아에게 등록되지 않는 권총 한 자루도 남긴다. 버니의 죽음에 미스터리한 점은 없다. 하지만 버니의 죽음으로 코딜리아는 그동안 자기가 속해있던 버니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속에서 완전히 추방되어 버린다. 살고 있는 집도, 단골 가게도 그리고 늘 해오던 사립탐정 일 조차도 이제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집에선 쫓겨나고 단골 가게는 환영하지 않으며 사립탐정 일에 대해선 만나는 사람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그만두기를 권하는 것이다.

 버니가 죽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여자라는 걸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실히 자각하게 된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란 말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지만 코딜리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이다. 문제는 버니가 죽고 나서 그녀가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니의 죽음으로 그녀는 완전히 버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이탈해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어 이제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꾸만 자각시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중반 부분, 그녀가 의뢰로 인해 케임브릿지에 갔을 때 그녀는 새삼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강압적이고 무책임했던 아버지는 그녀를 내내 자기 곁에다 가두어 두었다. 코델리아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자기도 이 자유로운 도시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곳으로 가는 것을 차단시켰고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도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바로 버니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코델리아는 태어나서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인생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한 시간 안에 죽었다. 그녀는 모성이란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건 그녀가 남자가 중심인 세상에서 남자가 부여한 인격체로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버니에게 배운 탐정의 기술이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와 버니라는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에 이어 버니까지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왔고 이제 스스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할 과제를 떠안은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버니가 그녀에게 남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권총을 남겼다는 것이다. 코델리아는 그것이 자신을 남성의 세계에 묶어두려는 구속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사립탐정이란 직업은 계속 유지하려 든다. 그건 버니가 물려준 것이지만 권총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건 사립탐정이 가진 본질이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사립탐정의 본질은 바로 '변화의 목도'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잘 정의했듯 사립탐정이 하는 일이란 끝내 자기가 알았던 것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음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성의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이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코델리아에게 있어 사립탐정은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 된다. 작가 제임스는 흥미롭게도 겨우 그녀와 한 시간 밖에는 세상에서 함께 하지못한 어머니가 그것이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재한 모성이지만, 부성과는 다른 모성으로 부터 받는 상상으로서의 위안은 그녀에게 남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로 사립탐정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바뀌었다는 걸 드러내 준다. 

 이제 새로이 의미를 찾은 사립탐정은 코델리아에게 남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탐색의 과정이 된다. 그레이엄 터너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이분법적이라서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 자체로서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그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밖에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둠을 통해 그 반대되는 빛을 정의하고 천국을 통해 그 반대되는 지옥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건 코델리아에게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녀가 새롭게 자각하는, 아니면 세상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자각시키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녀가 우선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일은 바로 남성 세계의 진실이다. 때문에 작가는 사려깊게도 그녀의 첫 임무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의 자살 원인을 파악하는 의뢰로 시작하게 만든다. 

 굳이, 프로이드의 오디이푸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남성적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살'이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버니의 자살이 의뢰인의 아들 마크의 자살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버니와 마크의 상징에 있어서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 공통점은 바로 진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버니의 의미와 의뢰인 아버지 로널드 칼렌더와의 관계에서 마크의 의미이다. 버니는 아버지의 연쇄이지만 사실 그 연속이라 볼 때 아들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버니와 마크를 다 아들의 위치에 놓아두면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케임브릿지 일화에서 보듯이 코델리아의 아버지는 완전히 그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독재자였지만 버니는 코델리아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준다. 따라서 그만큼 아버지에 비해 덜 남성적이다. 마크도 그렇다. 아주 냉혹하고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는 인간성 따위도 내던져 버릴 수 있는 아버지에 비해 마크는 아주 도덕적인 아들이다. 즉, 그만큼 덜 남성적이다. 말하자면 버니와 마크는 완화된 혹은 약화된 남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하나는 자살이고 하나는 타살, 즉 살해된 것이다. 작가는 일부러 이들의 죽음 원인을 다르게 했다. 그 이유는 버니와 마크가 공히 약화된 남성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버니에 비해 마크는 훨씬 더 여성적인 것(마크가 여장을 한 채 발견된 것이 이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에 가깝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것이 마크가 살해를 당한 주된 이유인 것이다.

 아들의 죽음의 반복을 원형적으로 바라보면 여기에 종교적 은유가 깔려있음을 보게 된다. 즉, 작가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서양문화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관찰하는 그 남성성의 근본에는 바로 기독교의 남성적 하나님이 놓여있다. 그 하나님과 예수의 은유적 관계가 바로 소설속에서는 칼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난다. 냉혹한 야훼와 자애로운 예수의 이미지로 말이다. 그런데 자연을 사랑하며 아주 도덕적인 예수 마크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가 보다 더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결국 칼렌더에게 야훼의 이미지가 겹쳐진다는 것은 코델리아에게 있어 남성적인 것은 결코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 것, 그렇게 근본 부터 뒤엎고 다시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대안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신'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또한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코델리아가 상상적으로 의지하는 어머니와 마크의 진짜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코델리아가 애초부터 여성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남성적인 세계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을 때, 그 어머니는 부재했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녀가 남성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되찾아가자 부재했던 어머니의 존재가 점점 현실적인 존재가 되고 결국에는 그녀 앞에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신'에 완전히 대칭되는 '어머니로서의 신'이 코델리아의 자각과 더불어 현실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코델리아가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이 커짐에 따라 남성성으로서의 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윤리적인 존재인가가 드러나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이 모든 것에 작가 제임스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남성성으로서의 신의 자리에 새로이 여성성으로서의 신을 정립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소설 속에서 코델리아의 아버지와 그녀의 관계, 컬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났듯이 더이상 서열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코델리아와 마크의 진짜 엄마의 관계로 극적으로 드러나듯이 '연대감이 기반이 된 동등한 관계'이다. 

 그렇게 작가 제임스는 새로이 정립해야 할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무엇보다 어떤 권력도 서열도 없는 오로지 동등한 인격끼리의 관계여야 하며 연대감만이 이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기반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이 소설을 통해 제임스가 말하려는 진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사실 이 제목은 제임스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주제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원제인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 보다 더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그냥 평범한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 그냥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제임스가 소설 속에 면밀하게 깔아놓은 장치들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남성적 세계를 대체할 '여성적 신'이라는 대안 그리고 그 관계의 모습과 기반까지 아울러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이후로 우리는 미스터리가 그저 훌훌 읽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피에르 바야르에 따르면 미스터리 소설이야 말로 독자가 신경을 집중하고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독자적으로 의미까지 세울 수 있는 멋진 장르라고 한다. 이 소설 역시 피에르 바야르가 말했던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풍부한 페미니즘의 의미가 이대로 묻히는 건 너무나 아깝다. 제대로 음미할 것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제임스의 다른 소설도 많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서 보듯이 이대로 무시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가다.

 PS. 일단 가급적 스포일러를 줄이려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건너 뛴 곳도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저도 모르게 노출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스포일러를 보았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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