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입소문이 굉장하길래 읽어 본 이 소설은, 

놀랍게도 제목 그대로 1인칭 고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소설이었다.  전체적으로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각 종교적인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장이 화자를 달리하면서 1인칭 고백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이라 여겨졌다. 얼른 짐 톤슨의 '내 안의 살인마(킬러 인사이드 미)'가 떠올랐다. 그 소설 처럼 이 소설 역시 한 살인마의 내면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니 그건 아니지 싶었다. 읽어보니 이 소설은 그것과 아예 달랐다.                                                                                    

 '내 안의 살인마' 역시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처럼 분명히 한 개인의 내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 내면은 결국은 괴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내면이다. 따라서 여기엔 별다른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왜,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하는 그 괴물의 형성과정을 관찰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이고 우리는 미스터리에서 읽을 때 기대하는 어떤 쾌감을 맛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그 점에서 완전히 반대다. 여기선 내면의 탐색 같은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각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고백의 주된 역할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 각각이 범죄이자 단서이며 추적이자 해결이 되는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미스터리 소설에서 지문을 모조리 생략하고 오로지 대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다. 그렇게 모든 고백은 최종적으로 '복수'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 안으로 편입된다. 그것도 유기적으로. 그래서 '내 안의 살인마'와는 달리 여기서 독자는 '복수의 완성'에서 비롯되는 짜릿한 미스터리적 쾌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1인칭의 고백은 읽는 독자에게 상당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귓가에 전하는 것 처럼 들리므로 3인칭의 객관적 시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상상의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버린다. 귓속말은 우리도 모르게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렇게 좁혀진 거리감은 우리를 더욱 소설의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다. 더우기 마치 일기를 읽는 것 처럼 내밀한 내면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은 남의 것을 엿보고 싶은 은밀한 관음증적 욕망까지 충족시켜주므로 우리는 더욱 더 소설 속 화자가 하는 말에 빨려들어갈 수 밖에는 없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은 일단 1장의 시작에서 모리구치의 고백을 듣는 순간, 중간에서 그만두기가 무척 힘이든다. 등장인물들의 말들이 마치 지구가 달을 잡고 있듯이 대단한 인력으로 우리의 신경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처 끝까지 읽게 된다. 결말을 보고나서야 겨우 인력에서 헤어나고 우리는 그제야 작품을 음미할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의 몰입도는 상당하다. 앞서도 말했듯,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이미 우리에게 몰입을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도 정교한 기교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한 해를 마치고 종업식이 거행되는 한 교실을 배경으로 종업식날 으례히 따르게 마련인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와 당부로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그지없이 평범한 풍경. 이 속에서 담담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가는 모리구치 선생님의 말로 소설의 1장, '성직자'는 시작된다. 하지만 모리구치의 평범한 선생님의 말에서 서서히 자신의 딸 마나미를 지금 있는 학교에서 사고로 잃었던 일로 이어지면서 고백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딸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했으며 그 범인들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우리 반에 있다는 충격적 발언이 터져나온다. 

               영화 '고백'의 포스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그렇게 편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일기를 훔쳐보는 것 역시 고백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고백을 듣는 것은 일기를 몰래 보는 것보다 훨씬 불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기를 몰래 보는 것은 '나'라는 주체를 감출 수 있지만 고백을 들을 때는 내가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가 은폐되는 것과 노출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보거나 들은 고백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몰래 일기를 보았을 때 오로지 관음증적 쾌감만을 얻을 수 있는 건 그 고백을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척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고백을 들으면 더이상 그 고백을 모른척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고백은 듣는 이에게 어느정도 말하는 자의 책임을 나눠주게 마련이다. 나는 고백을 들은 이상 책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고백은 듣는 이에게 선택을 강요하니까. 그렇게 노출된 나는 결국 두 가지중의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공감하거나 무시하거나... '공감'은 물론 책임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무시'는 관계의 파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항목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물릴 수도 없다. 이미 내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백은 피할 수 없는 강요된 초대이다. 고백을 듣는 순간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난감한 그 자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던져진 공을 받는 것 처럼 일방적이다. 당신은 다시 고백한 자에게 그 공을 던질 수 없다. 그렇게 일단 초대된 이상 당신의 자의의 여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고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렇게 잔잔한 수면 위에 내던진 거대한 바윗돌 처럼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안온했던 아이들의 일상을 폭력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겨버린 모리구치 자신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고백의 폭력은 고백을 한 자에게 완전히 묶어두는 것인데, 정작 그 주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가진 독특하면서도 진기한 측면이다. 정작 응답해주어야 할 그 대상이 사라지다니! 지금까지 고백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묘한 구성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제2장 순교자에서 미즈호가 모리구치에게 이런 원망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 

  저는 그런 선생님이 약간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손으로 벌하는 일을 택했다면 제대로 책임을 지고 그 후에 두 소년이 어찌 되는지도 지켜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p. 59) 

   그런데 그 고백의 주체가 사라짐으로 인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보여주어야 할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이제 아이들 스스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거기에 응답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정답을 알려줄 사람이 사라지는 바람에 저마다 자기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꼴이랄까? 그렇게 2장 순교자에서 5장 신봉자까지, 미즈호 나오키 나오키의 엄마 그리고 와타나베는 자기 방식대로 거기에 응답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답하니 거기에 드러나는 건 온전히 자기의 모습 뿐이다. 마치 모리구치의 고백이 큐피트의 화살이 되어 나르시스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힌 것 같다. 그렇게 모리구치의 고백은 스스로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나르시스가 된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자기 속에 묶어두는 고백의 폭력이 완전히 거꾸로 작용해버린다. 모리구치의 고백으로 그들은 오히려 그들 내부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1장과 2장에서 5장은 그야말로 별개이다.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저 발단에 불과했을 뿐, 그들을 더욱 사로잡는 건 모리구치의 고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가진 문제일 뿐이다. 거기서 모리구치의 고백은 어떤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 더욱 더 매달리게 되는 계기 말이다. 마치 고백의 폭력적인 힘이 그들 스스로 문제를 감춰놓기 위해 씌워 놓았던 외피를 찢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고백의 폭력적인 힘으로 그들은 벌거벗듯이 노출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해부하고 그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끝내 찾게된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들이 끝내 찾게되는 본질을 살짝 종교의 외피를 씌워 각 장의 제목으로 붙여 놓았다. 각 장에서 그들 스스로 겪게 되는 결말은 어쩌면 그래서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까지 거침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완벽한 이 소설에서 '고백의 폭력성과 그 주체의 사라짐으로 인해 나타나는 역설적 고백의 힘'이나 말하고 있는 이 리뷰는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미스터리적 쾌감을 듬뿍 맛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 말하기엔 부족하다고 느껴졌으니까. 이 소설엔 '고백'이 개인에게 미치는 가능한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꽤 풍부한 여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나름 거기에 천착하며 이렇게 리뷰를 써 내려 왔지만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리뷰를 읽고 오히려 미나코 가나에의 '고백'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지나 말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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