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루레이] 킥 애스 - 아웃케이스 없음
매튜 본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마크 밀러의 원작도 매튜 본의 영화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슈퍼히어로물을 보는(혹은 읽는)걸까?”
여기서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의 대답을 말하기 전에 생각나는 ‘마팔다’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만화가 뀌노의 한 만화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뀌노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담은 4컷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는 한 우울한 사무원이 주인공인데
그는 일하다 가끔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마다 화장실로 향합니다.
거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그는 누군가의 사진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댑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체 게바라’이죠.
그렇게 그는 거울을 통해 ‘체 게바라’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 번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체 게바라’의 사진을 얼굴에 쓰는 것이
자신이 자기 삶에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이 뀌노의 ‘체 게바라’ 가면 쓰기 행위와
사람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물을 보는 이유가 결국은 같다는 것이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래도(이것은 비단 이 영화만은 아니라 모든 슈퍼히어로물에서
다 그렇습니다만) 영화속에서 자주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변신과 코스튬플레이는 바로 그와 같이 삶의 무의미성에 짓눌려버린
현대인들의 소박한 자기 위안 행위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결국 그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 뿐이고 사실,
이 소박한 자기 위안적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영화의 시작은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슈퍼히어로로 코스튬을 한 사람이
거기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인가!’ 선언하면서 뛰어내리죠.
그가 추락하는 도중 날개를 펴자 사람들은 진짜 히어로가 나타난 줄 알고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대로 추락사하고 말지요.
여기서 마크 밀러는 그것이 바로 신문에서 ‘킥 애스’에 대한 것을 읽고
따라하다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해서, 원작의 끝부분에 그는 다시 등장하는데,
시점은 영화 처음의 뛰어내리기 바로 전 빌딩의 옥상으로 오르는 모습입니다.
역시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곧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게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추락해서 죽어버렸죠.
하지만 매튜 본은 그자가 정신병력으로 인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매튜 본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고 시작합니다. 이것만 봐서는 매튜 본도 마크 밀러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어질수록 그가 추구하는 것은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충족
입니다.(그것이 아마도 힛걸의 비중을 원작보다 꽤 많이 다룬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빌딩 옥상에서의 추락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걸 보여줍니다.(원작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의 최종 완성판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은 시작은 동일하였으나 도착한 곳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나 안노 히데야키 처럼
만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다시 내동댕이치려 하지만, 매튜 본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꿈을 간접적이나마 실현시켜주려 합니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마크 밀러에게 ‘가면쓰기’는 데이브가 왕가슴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행위입니다. 자위의 끝이 결국 허무한 것처럼, 데이브 역시 그렇게 험란한 전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니, 더 처참합니다.
데이브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케이티에게 용기있게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차이고 심지어 그녀는 친구 흑인에게 그를 구타하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온 밤, 데이브에게 케이티의 친구가 보낸 사진 하나가
핸드폰으로 전송되는데, 그건 케이티가 그 흑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기며 원작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칸막이 안에 담겨 닫힌 문 뒤에서…
“나는 내 삶에서 이 이상 낙담한 적이 없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다.
그것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려 며칠 밤을 울며 지샜다는 것을…”
마크 밀러는 데이브에게 가차없는 ‘no happy ending‘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기까지 데이브에게 감정이입되어 함께 온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리만족을 느낄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남는 건 다만 허무함과 씁쓸함.
그것은 마치 가면을 벗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정해진 일을 해야만 하는
만화속 인물이 느꼈을 씁쓸한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위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빅 대디의 최후의 장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와 원작이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빅 대디의 설정일 것입니다.
영화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내의 복수를 위해 ‘빅 대디’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원작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드 미스트의 간계로 데이브와 함께 붙잡힌 ‘빅 대디’.
마피아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는가 알기 위해서이죠.
결국 빅 대디는 그의 최후에 이르러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은퇴한 전직 경찰 같은게 아니야 난 회계사였어
신용회사를 위해 숫자 세는게 고작이었지
거기다 나를 정말 증오하는 아내랑 결혼했었지. 당신 같으면 그런 삶에 만족하겠어?
나는 내 친구도 싫었고 삶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딸애를 데리고 도망쳤어.
그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려고…”
“난 만화광일 뿐이야. 데이브, 자네와 마찬가지지.
민디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지만, 난 그저 또 다른 한 명의 후레자식에 지나지 않아.”
“제길! 그럼 너 같은 만화광이 왜 우리를 뒤쫓았던 거냐?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왜 하필이면 내 부하들을 골랐던 거냐구? 이 자식아!”
“간단해. 우리에겐 악당이 필요했으니까?”
“뭐?”
“난 민디에게 정말 살아 숨쉬는 삶을 주고 싶었다.
민디가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보면서 자라는 걸 원치 않았어..
나는 민디가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원작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데이브와 빅 대디의 마지막 모습의 유사성은
(데이브는 케이티를 잃었고, 빅 대디는 민디를 잃었습니다.)
마크 밀러가 사실은 빅 대디와 데이브를 일종의 같은 연장선상에 놓은 인물로
설정하였음을 드러내 줍니다.(어쩌면 빅 대디는 데이브의 미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둘 다 그렇게 자기 위안적 행위에 불과한 것을 자기 본질로 체화시키려 하다가
처벌을 받는 것이죠.(아마도 그것이 데이브가 고문을 당할 때 거기에 전기 고문을
받는 이유이고 같은 의미에서 ‘설계’한 빅 대디는 머리에 처형을 당하는 것일 겁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슈퍼히어로물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싶어합니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고 환상과 현실을 혼동해 그것에게 위안 이상의 것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떻게 보면 슈퍼히어로물을 쓰는 작가로서 그는 꽤 자학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WANTED나 OLD MAN LOGAN 처럼, 슈퍼히어로 보다 슈퍼빌란에게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레드 미스트가 하는 대사 ‘WAIT UNTIL THEY GET A LOAD OF ME’는 바로
죠커의 유명한 대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매튜 본은 다릅니다.
영화엔 더 이상 원작에서 보여지던 처절함은 없습니다. 오히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적 쾌감으로 충만합니다. 그것도 아주 완성도 높게…
그렇게 매튜 본은 우리들에게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대리충족을 듬뿍 느끼게 해줍니다.
원작에서 데이브나 ‘빅 대디’의 가면은 무참히 찢겨 나갑니다. 고문을 당하는 순간
데이브의 가면은 반쯤 찢겨져 나갔고, 빅 대디는 가면이 벗겨져 얼굴이 엉망인 상태에서
처형됩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그들의 가면을 벗겨 가면을 벗은 그들이 현실에서 얼마
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보여주려 합니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존재는 처음부터 슈퍼
히어로로 자라온 민디 정도죠.
하지마 매튜 본은 그 누구의 가면도 벗기지 않습니다. 빅 대디 역시 최후의 순간에도
그 가면을 벗지 않죠. 매튜 본은 그렇게 슈퍼 히어로를 끝까지 슈퍼 히어로로 남겨두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느끼고 싶은 슈퍼 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을 보존시켜 주려
하려는 것이죠.
이상, 간략하게 마크 밀러의 원작과 매튜 본의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얘기했습니다만
섣불리 뭐가 더 옳다고 말 할 수는 없겠죠.
여기서 다시 뀌노의 1칸 짜리 만화 하나를 인용하려 합니다.
그 만화는 극장 내부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엔 지금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즈에서 유명한 장면중 하나인 구두끈을 스파게티 처럼 먹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뀌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층을 묘사해
보여줍니다. 맨 위층의 100달러 로얄석의 관객들은 너무 웃기다며 마구 웃습니다.
하지만 맨 아래 거의 바닥의 1달러의 관객들은 그것이 자기 얘기 같아서 씁쓸한 표정입
니다. 뀌노는 이렇게 같은 작품이더라도 자기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마크 밀러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매튜 본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 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