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양이를 버리다'는 고양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에대해 이야기 할 때'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듯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기억과 스스로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아버지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놓고 있는데, 그 시작은 하루키 자신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두 개의 기억으로 연다. 그 기억이란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을 집에 있는 불단 앞에서 불경을 외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 둘은 개인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삶을 간신히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읽어보면 어째서 그게 가능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배경은 VAN DER GRAAF GENERATOR의 'H TO HE WHO AM THE ONLY ONE' LP 안쪽 면]



  '버려진 고양이'와 '불경'은 알고보니 하루키 아버지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해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버려진 고양이'로 책의 시작을 여는 건, 자기 아버지의 삶이 그 고양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버려졌다. 이와 똑같이 하루키의 아버지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이쿠 짓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교토의 유명한 절의 주지라는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던 승려의 길을 걸어야했으며 그 길조차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벌인 전쟁(마침 그 때 그는 세이닌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징병을 4년 유예할 수 있었으나 실수로 정식 행정 절차를 밟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다.)때문에 접어야했다.


 거기다 그는 정말로 버려진 고양이기도 했다. 어릴 때, 동자승이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어느 절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하루키로 하여금 버려진 고양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 고양이가 특히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던 것은, 고양이를 버린 뒤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먼저 집에 도착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를 아버지가 보았을 때 안도의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그 때의 하루키 아버지도 고양이를 자신의 분신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가문과 시대라는 거대한 격량 속에 휘말려 어디로 쓸려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저 고양이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있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 같은 걸 발견하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이 원하고 설정한 모양대로 꾸려가길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위에 인용한 그림은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터 가오 옌이 그린 것인데 나는 이것이 가오 옌의 이 책에 대한 독후감 같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루키 아버지처럼 저토록 거대한 광야 같은 삶에서 오직 작은 상자 하나에만 의지한 채, 안도할 수 있는 곳을 평생 찾아다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가오 옌이 비둘기를 그려 놓은 것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에서 영감 받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노아가 불안 속에 찾았던 육지가 어딘가 확실히 있다는 걸 알려주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쓴 하루키의 진짜 목적 또한 그의 아버지가 아침마다 읊었던 불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렇게 매일 아침 불경을 읊었던 것은 자신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통당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루키의 이 책 또한 그렇다.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며 전쟁과 아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던 아버지가 그래도 자기 삶에 대하여 안도하는 마음으로 떠났기를 간구하는 기도의 마음 또한 뭉근하게 어려있으니까.





 그렇지만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해 이 글을 쓴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건 하루키 마음에 가책으로 자리잡고 있는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몇 십년 동안이나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던 소원한 관계였다고 털어놓고 있다. 원래 하루키 아버지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그는 공부를 좋아했고 잘했다. 그러나 잦은 전쟁의 출전으로 공부를 계속 하기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고 얼마 안 가 하루키도 태어나는 바람에 그 꿈을 포기해야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서 있어야 했으며 이젠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어야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신이 못 다 이룬 걸 하루키를 통해 대신 이루고자 했다. 세상이 많은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외동인 하루키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면학에 힘쓰지 않는가 하고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하루키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p. 62)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가책이 되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주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는 최근까지 오랫동안 자주 학교에서 시험 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시험 치는 동안 아버지가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할까봐 잔뜩 두려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렇게 퇴적된 죄책감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지 못하는 아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기에 거리를 벌리는 법이다. 여하튼 이처럼 하루키 또한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바라는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5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의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 하루키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동료 의식 같은 걸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나 아버지나 원하는 걸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삶이라는 광막한 바다 위를 그래도 가고자 하는 곳에 닿기 위해 늘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외로운 존재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동료애를.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루키는 특정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걸어온 길에서 인간의 삶 자체에 진하게 서려있는 보편적인 궤적을 보았던 것이며 그러한 보편성의 인식을 통하여 아버지나 자신이나 삶을 억누르고 있다고 여겼던 한계들이 진실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p.93)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이의 이야기를 하루키가 애써 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추모로도 족할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어야 했던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다음에 그는 빗방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란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고 교환 가능한 빗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과 역사 그리고 계승의 책무가 있음을.


 그러니까 하루키는 계승의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다. 마치 '보라, 여기 한 인간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고 우리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건 보편가능한 역사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역사다. 하루키 아버지의 삶은 다른 이로 대체 불가능하다. 전쟁 중에도 하이쿠를 짓고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참수당한 중국인 포로에 대해 다른 어떤 이보다 깊은 경의를 품고 있는 모습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또한 하루키는 책에서 몇 번이나 언급하지 않았던가? 우연히 벌어진 일일지 몰라도 만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삶이 되어갔다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깊이 음미하고 있는 건 우연이 정형한 평범한 이의 그렇고 그런 기성품이 아니다. 다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유한 단독자의 초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보편성 속에서 이러한 고유한 특수성이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그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건, 하루키 아버지가 당했던 여러 고난들이다. 접어야 했던 꿈의 상실이다. 삶에 존재했었던 그 스스로 결코 메울 수 없었던 깊은 우물들이다. 그런 우물을 하루키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제 알아차린다. 이러한 우물들이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고유한 한 사람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에 '사라진 새끼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는 연유가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고양이 이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고 많은 여운이 남았던 대목이기도 하다.  소나무 높은 곳으로 홀로 올라갔던 새끼 고양이는 혼자 힘으로 도저히 내려갈 수 없어서 밤새 무서워하며 울다가 아침에 깨어나보니 홀연히 사라짐으로 인해 하루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걸 가지고 별도의 단편을 쓸 정도로. 그러고 보면 말하기 어렵고 막연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삶을 비로소 문자라는 형태로 소환할 수 있도록 해 준 두 개의 기억 역시 부재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다 제각각이다'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우리가 그토록 기피하고자 애쓰는 부정적인 것들이야말로 진정 교환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단독성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처럼 우리에겐 저마다 사라진 새끼 고양이가 존재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쯤은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를 곱씹게 만들었던 계기들이. 더러 우리들은 그런 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른 망각의 휴지통으로 던져버리지만 하루키는 오히려 그런 기억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 책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그렇게 더듬어 찾아내었던 것처럼. 바로 그것이 노아에게 육지가 있다는 걸 알려준 비둘기가 되어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안도하며 기댈 수 있는 소나무를 찾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이런 이유로 '고양이를 버리다'는 내게 삶에서 겪는 부정적인 것들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헤아릴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곧 부재의 계절, 겨울이다. 그런데 겨울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봄만이 가지는 고유한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계절에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는 건 제법 어울리는 일인 듯하다. 삶의 겨울을 소중히 보듬게 만들어주는 책이니까. 그러면 마냥 아리기만 할 것이라 여겨서 선뜻 손댈 수 없었던 차가운 눈밭 속에 매몰된 기억들도 발굴해선 그 어딘가에서 오늘의 나를 만든 진정한 밀알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더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삶에 대해서도 더 관대해지리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01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