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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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일본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 이번에 그가 쓴 '무죄의 죄'가 출간되었다. 6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입소문만으로 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만하면 비평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닌 듯하다. 제목에서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에 속한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데 온전히 거기에만 할애되어 있는 건 아니다. 절반은 삶이 지는 씁슬한 비애감과 다소의 뭉클함이 느껴지는, 인간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것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그 둘의 교집합으로 이해하며 그 각각이 하나의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그 질문이란,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제도는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이다. 

전자의 질문은 인간 드라마 부분이, 후자의 질문은 미스터리 부분이 해답을 찾아간다.



 책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시작의 프롤로그와 끝의 에필로그 그리고 본편이 되는 1부('사건 전야')와 2부('판결 이후')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이제 24세가 된 여성, 다나카 유키노. 그는 방화로 임산부와 그녀의 쌍둥이 두 딸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다. 시작에서 우리는 그녀가 막 사형 집행을 당할 순간에 있음을 본다. 프롤로그에선 법정에서 피고인은 인생을 건 연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취미로 재판 방청을 즐기다 급기야 교도관까지 된 여성 사도야마의 눈으로 다나카 유키노와 그녀가 저지른 사건 정황이 소개된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도 그녀가 화자를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의 사건은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거기서 우리는 다나카 유키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한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나 새아버지에게서 학대를 받았고 강도 치사로 아동자립지원시설에 입소한 전력이 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런 불우한 과거와 끔찍한 범죄 때문에 사회는 그녀를 서슴없이 '괴물'로 부르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저런 쓰레기는 빨리 죽여야 해'(p. 27)'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 사건도, 사람도 사도야마가 술집에서 들었던 어떤 낯선 남자의 말처럼 '딱 그래 보이네'(p. 33)하는 한 문장으로 모두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사건 전야'라는 제목을 가진 1부는 이런 생각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여정이다.

여기서는 마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처럼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가 있는 주변 인물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듯 유키노라는 인물과 그 범행의 진실을 보여준다.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했다는 것 때문에 무책임한 엄마로 낙인찍힌 유키노의 어머니 히카루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큰 사랑을 받으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로 히카루가 유키노를 낙태하는 걸 그만두게 한 산부인과 의사 단게의 고백으로 오히려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 정반대의 인물로 밝혀지고 법정에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란 말로 모두를 놀라게 한 유키노 역시 배다른 언니 요코의 고백을 통해 백 살까지 살기를 꿈꿨던 천진난만하고 착한 소녀에 불과헸다는 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유키노가 프롤로그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는 것, 그렇게 사람도, 사건도 모두 '딱 그래 보이네'라는 말로 단정이 결단코 불가능한 복잡한 이면이 배여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아무 죄 없이, 제목처럼 무죄라는 죄 때문에 거기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판결 이후'라는 제목을 가진 2부는 그런 무죄의 죄 때문에 갇혀 있는 유키노를 사형에서 구하기 위한 여정이다.

 1부, 요코의 기억에서 잠깐 소개된 유키노의 어릴 적 친구 단게 쇼와 신이치가 여기서 주역을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를 버린 게이스케의 친구로 등장해 게이스케와 다나카 유키노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핫타 사토리 또한 등장한다. 1부가 인간 드라마적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미스터리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다나카 유키노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친구였지만 다나카 유키노가 이기적인 외할머니 다나카 미치코에게 끌려가 강제로 이별한 뒤로 오래도록 못 봤지만 단게 쇼가 매스컴이 묘사하고 있는 다나카 유키노의 모습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기억 속 그녀가 진짜 모습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나카 유키노와 아무런 개인적 접점이 없는 이들이 자기식대로 편집하고 해석하며 덧칠한 일반론을 따르기 보다는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웠던 어린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그녀의 말과 마음을 따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기대어 커다란 먹구름으로 자라난 세간의 정의(定義)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건 신이치, 핫타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주변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 다나카 유키노라는 인물상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다. 바로 그 개인적인 접점이 중요하다는 걸. 단게와 요코, 핫타와 쇼 그리고 신이치와 같이 내가 판단하려는 상대와 함께 한 눅진한 경험이 없다면 남들이 일으키는 풍문에 따라 덮어놓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왜 한 챕터를 시작할 때 다나카 유키노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인용하는 이유 또한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은 '딱 그래 보이네'에 따라 형성된 일반론의 집약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내용들은 그걸 차례로 배반한다. 우리는 아주 잘 알게 된다. 판결문은 아무런 진실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편견과 무지 그리고 오해와 무책임의 덩어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근거로 내려지는 사형을 우리는 과연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사형은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그걸 내리는 판사는 피고와 아무런 개인적인 접점이 없다. 오직 제출된 증거와 변론만이 전부다. 판관은 그래야 객관적일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일 그 근거가 되는 것들이 다나카 유키노의 경우처럼 잘못되었다면? 사형은 형법이 가진 최고의 형벌이므로 그것을 언도하는데 있어선 그 무게에 걸맞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원죄, 즉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피고의 모든 인격과 삶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쇼와 신이치처럼 아주 개인적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험이 있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실된 초상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을 여는 사도야마도 그렇고, 쇼와 신이치도 그렇고, 블로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는 핫타도 그렇고 계속 편지라는 형태의 개인적인 글로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를 맺게하는 이유가 뭘까? 매스컴 앞에선 오직 괴물의 면모만 보였던 다나카 유키노가 참된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열어보이는 것도 그런 개인적인 편지들인데 과연 그 이유는 뭘까?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진실은 급하게 먹어선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마치 뜸을 들여야 밥이 익는 것처럼 깊고도 오래된 경험의 공유가 있고서야 마침내 드러난다는 말 외엔.


우리는 그렇기에 섣부른 추정이 불러 올 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서 무죄의 죄가 언제든 생길 수 있으므로...


이건 비단 사형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 어서 빨리 죽고싶다는 열망밖에 없는 다나카 유키노를 만난다. 그녀는 왜 그런 절망만을 안게 되었던가? 그녀는 단게가 말했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쇼와 신이치, 핫타를 본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코와 오조네 리코도 본다. 그녀의 바람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살 방도가 열릴 수 있는데도 유키노는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지만 유키노에게 보이는 건 사막 뿐이었다. 편지를 통해 작은 반딧불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사막을 밝히기엔 너무나 모자라 보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래서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만일 그 작은 반딧불을 그저 미력하다고 여기지 않고 더 큰 것으로 봤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곧 적만한 어둠이 올 것이라는 황혼이 아니라 밝은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여명의 빛으로 인지했었다면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쇼와 신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에 가장 좋은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사회가 멋대로 만든 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여버렸을까? 너무 단순한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가 다나카 유키노를 바라봤던 것처럼 유키노 역시 삶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삶에 정말 도움이 되는 진실들은 그저 감처럼 툭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 깊고도 오랜 숙성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만한 깜냥은 안된다. 자격도 없다. 다만 이런 말만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절망은 우리의 성급함이 자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조금은 긴 호흡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사형에 대한 것도, 우리가 만나는 허다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나보는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는 이런 문장들로 응집될 파문들을 계속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도 오래도록.


이 소설엔 놀라운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충분히 납득되도록 단서도 다 깔아두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일절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한다. 이걸 쓰는 이유는 그런 반전 때문에 미스터리 물로써도 꽤 읽을만한 작품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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