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으로 만나 보는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가 1917년에 발표한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 그들 모두는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다. 거의 블랙홀과 맞먹는 압도적인 중력으로 날 붙잡아 마냥 끌고 가기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 광기, 죽음은 하나의 표지판이다. 내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땅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려주는. 그 너머는 타인의 땅이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내 힘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사랑 광기, 죽음은 나의 부재로 완성되는 장소다. 여기 실린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와 같이.

 

 그런데 이상도 하지. 사랑과 광기는 죽음에 맞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기엔 사랑은 능동이고 광기는 수동적인 상태로 다르지만 소설에선 그렇지 않다. 사랑마저 넓은 범주의 광기로 묘사한다. 첫 단편 ‘사랑의 계절’에서 주인공 네벨은 리디아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엘 솔리타리오’에서도 아내는 남편이 세공하는 보석을 보곤 한 순간에 매혹된다. ‘이졸데의 죽음’이나 ‘음울한 눈동자’도 그러하다. 이성으론 그 이유를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사로잡힘이 사랑의 촉발인 것이다. 작가는 이걸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 또한 사로잡힘에서 발아하는 걸 기억한다. 더구나 소설 속 사랑은 일방통행로만 달리는 열정의 착란에서 비롯되어 의혹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다 끝내, 두 편 정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환멸 아니면 비통에 이른다. 광기 또한 이와 유사한 여정을 보여주지 않던가. 이처럼 작가에게 사랑과 광기는 샴쌍둥이인 것이다.

 

 그가 사랑과 광기를 중요한 두 축으로 소설을 형성하는 것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속성 때문이다. 절대군주인 죽음이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곳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예측을 넘어서 있다. 밤마다 베고 자는 베개가 언제든 내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으며(깃털 베개) 잠깐 한 눈을 팔았을 뿐인데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던 막내 딸이 골육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목 없는 닭) 세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자신의 왜소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작가 또한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나의 취약함을 끝도 없이 상기하게 만드는 장소에 나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이 삶의 시간을 어찌 지속시켜야 하나? 난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랑이나 광기와 같은 열정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덤과 사막만을 약속하는 삶을 뚜벅뚜벅 관통해나가려는 존재들이. 가시철조망을 두려움 없이 뛰어넘는 황소(가시철조망)나 우물 안을 벗어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숲으로 뛰어들어 진정한 사냥을 하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은 개, 야구아이 아니면 우물에 뛰어들겠다는 협박으로 비로소 외삼촌에게 대등한 존재임을 인정받은 아이(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처럼. 그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증명하는 길은 바로 용기란 걸.

 

 그건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백치처럼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겁먹고 뒷걸음치기 바쁜 존재들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용기를 감행하는 타자에게 자신을 동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갇혀 있는 유배지를 탈출하려 해 보지만 결코 소심한 구경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더욱 보게 되었다. 그 위에 작가가 찍어놓은 투명한 방점들을. 뭐든 시도가,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당연히 여기엔 위험이 뒤따른다. 어떤 때는 ‘천연 꿀’에 나오는 것처럼 그 시도가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멘수들’에 나오는 벌목꾼 카예,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에서 원주민 칸디유 그리고 ‘음울한 눈동자’에서 사피올라가 화자에게 한 얘기들을 통해 분명히 전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뛰어들라고. 온전한 내 선택과 결단으로.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두 사람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나? 그림자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다만 착란에 의한 사랑 고백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는 모든 걸 마약에만 의지하다 죽어서도 두개골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손으로 만든 지옥’의 인물과 자신이 광견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며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 마침내 끔찍한 범행마저 저질러버린 ‘광견병에 걸린 개’의 주인공과 얼마나 다른가. 이들은 모두 자신이 정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 표류하면서 협소한 자신의 세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표류’에 나오는 파올리노의 분신들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삶이란 언젠가는 끝나야 하는 연극인 것을. 그렇다고 그 종막만을 생각하며 시곗바늘만 초조하게 바라보거나 어차피 허무하게 끝날 거 뭐하러 의미를 만들려 애쓸까 하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무덤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 세계에 갇혀 끝없이 맴도는 장면들은 그걸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왕에 태어나 지속이라는 정언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아주 사소한 배역이 주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며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작가의 혜안대로 진실로 생생한 삶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는 바로 거기서 창출되는 것이니까. 나 아닌 다른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영웅과 비겁자의 것이 다르듯이,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죽음의 의미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이 책 덕분에 살면서 늘 염두에 둬야 할 한 문장을 얻게 되었다. ‘다가올 무한을 근심하지 말고 지금의 유한을 사랑하라!’ 기억하고 또 기억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