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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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이 횡행하는 요즘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주자들에 대한 정책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듯이 세계 곳곳에서 내가 속한 곳에 있지 않은 이들에 대한 적대를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본다. 우리나라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왔던 예멘 난민에 대해서도 그렇고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볼 때마다 허다하게 올라오는 다른 성별에 대한 적대도 그렇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방송사는 같은 건물인데도 분양을 받은 세대와 임대한 세대를 층으로 나눠 장벽처럼 분리하고 있는 걸 보도한 바 있다. 아래에 사는 임대 세대들은 분양 세대가 사는 윗층으로 결코 올라갈 수 없다고 말이다. 나치가 유태인에게 실시했던 게토 정책을 이제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이런 격리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 됨에 따라 더욱 증가하는 형편이다. 그런 차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나와 동등하게 대우 받으려면 나와 같은 자격을 가질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향도 심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없던 벽을 만들어 너는 여기 못 들어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도시 자체가 방랑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중심지의 거리에서 몸 하나 얹힐 벤치도 찾기가 힘들다. 도시가 산책자마저 거부하면서 사람들을 이런저런 사회적 조건에 따라 영역을 구분하여 거기에만 있을 것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두고 '영토화'라 불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이며 제각각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지만 개인들을 통합하여 일련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움직여야 하는 사회로썬 그런 개인들의 성향을 마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인을 '영토화'한다. 사회가 원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토양에다 개인을 심고는 사회의 주류가 되는 사상과 가치관에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을 자신의 진실된 모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국적이 그렇고, 인종이 그렇고, 성별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은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입혀 놓은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사회가 설정한 행동 양식에 충실히 따르느라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의 토양에서 자라났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진실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은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이론이 아니던가?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 세력의 편의에 따라 제조되고 권위를 갖게 된 견해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거기에서 당장 자유롭게 되진 못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두고 '아비투스'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토양에 심어져 있었던 지라 이제 그것이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뿌리를 내려 다른 사람이나 사상 혹은 신념과 마주할 때 이성으로 제대로 헤아리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좋고 싫음을 느끼게 되는 걸 가리킨다. 그만큼 우리 내부에 깊이 심어져 손쉽게 떨쳐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족쇄를 순식간에 끊을 순 없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지식만이 아니라 경험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가 접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고 장소에 닿으며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하는 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속된 몸으로 부대낀 경험이 누적되어야만 우리는 날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날 식민화 한 영토에서 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의 퇴적을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여행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그만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낯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벗어나 대면하는 타자에 따라 가변적인 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과정, 그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나는 분명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도록 한 대표작이자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기도 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 여행을 전면에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방랑이다. 목적지 또한 없는 게 방랑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공간화가 불가능한 순수한 지속만을 시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순수 시간'으로 이름 붙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순수 시간이야말로 방랑이다. 방랑은 오직 움직이고 있을 때만 존재하니까 말이다. '방랑자들'에서 행해지는 여행 또한 그렇다. 어떤 목적에 따라 선택된 여정이 아니다. 이 책의 모든 여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어느 곳에 있게 된다. 방랑엔 경계가 없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모든 곳이 타향이자 고향인 것이 바로 방랑이다. '방랑자들'의 모든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없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들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얘기를 한다. 저마다 속한 시간과 장소에선 주연이지만, 소설에서 '듣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처럼, 다른 시간과 장소에선 오직 관객에 불과하다. 이는 방랑 혹은 여행자가 어디에 있든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자각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가 속한 곳의 가치관을 섣불리 내세워 자신이 현재 보고 있는 사건과 풍경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겸허하게 들을 뿐이며 자신의 가치관은 최대한 배제한 채, 되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리려 애쓸 뿐이다. 소설 속 멘추가 말했던 어떤 유목 부족이 자신이 깃들고자 하는 부족의 종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듯이, 내가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두고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일반적인 규칙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하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을 일깨워서 굳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p. 149)


 방랑이나 여행은 그러한 타자 중심의 여정이다. 작가가 '방랑자들'에서 여행을 가져온 것은 그래서다. '방랑자들' 자체가 작가가 직접 한 여행 기록을 바탕 삼아 만들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방랑, 여행과 같은 순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라 본 타자와 세계는 더이상 배척과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물리학자가 말한 대로 세상엔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암흑물질이 지천에 널려있고 아무 것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까만 밤이야말로 세상의 본질이기에  내가 무엇을 알 것이며,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p. 344)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밤이 세상을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더 이상 아무런 꾸밈도 포장도 없다. 낮은 빛이요 찬란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예외이고 부주의이며 질서의 붕괴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실 어둠 그 자체이며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으며 차갑다.(p. 347)


 이렇게 무지와 예측 불가라는 한없는 어둠의 베일 속을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동료이기에 타자들은 내게 다만 환대와 대화의 대상일 뿐이다. 어떤 목적을 위한 만남도 아니다. 그 누구도 수단이 아니다. 소설 자체가 그걸 보여준다. 여기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에 대해 좀 말해야겠다. 내가 소설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방랑자들'은 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정형화된 틀을 참 많이 벗어난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인공도 없지만 줄거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건 다만 이야기의 다발 혹은 묶음일 뿐이다. 그렇기에 소설에 흔히 있게 마련인 종결 같은 것도 없다. 여기서의 끝은 결말이 아니라 단지 소진이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제 다 떨어졌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방랑자들'은 방랑 혹은 여행 이야기의 순수 지속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순수 시간 그대로인 것이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p. 280)


 작가는 독자에게 바로 그 시간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영토화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버린 온갖 가치관의 족쇄로부터 날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나와 마주한 이들이 나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눈을 찌푸리며 외면하기 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어 대화 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타자를 중심에 둔 대화 시간의 창출이 바로 '방랑자들'인 것이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p. 191)


 사실 이런 시간의 창출은 현재 폴란드 상황을 보자면 절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2차 대전 당시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적대로 똘똘 뭉친 나치즘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였지만 그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현재의 폴란드는 한없이 전통적 권위와 위계 질서를 숭상하는 보수로 치닫는 중이다.


 낙태가 전면 금지되고 동성혼이 절대 금지되는 등, 유럽이 가고 있는 방향과 정반대의 모습을 잇달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확고하다고 여기면서 그것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모양새다. 이런 까닭에 유럽 사회에선 폴란드가 이러다 독재 국가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태고의 시간들'부터 내내 타자에 대한 포용과 변화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강조했던 작가로서는 이러한 폴란드의 상황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흐름에 제동을 걸고자 '방랑자들'을 썼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호소의 대상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비록 정도는 덜하지만 그 징후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이기도 하다. 소설은 자기보다 많이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를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부터 짧고 강렬한 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한다. 위험천만한 경주와 승리, 그리고 탈진. 그러므로 그들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흥분과 전율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값비싼 삶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비축된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야 하므로.(p. 558)


 비록 젊은 여자를 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모습 또한 이와 얼마나 다를까 싶다. 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욕망을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시간에 천착하느라 이미 우리 영혼의 잔고 또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방랑자들'이 이끄는 대로 숨이 막히는 걸 참으면서도 안주했던 곳을 박차고 나와 담장을 뛰어넘어 탈주를 감행해 보는 건 어떨까? '방랑자들'은 그렇게 하여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마주한 하늘과 대지가 오직 자유로움으로 가득차 환영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기꺼이 넘어가 보자.

 

 내가 아니었던 나를 버리고 타인과 함께이기에 더 커져버린 자유 속에서 나만의 나를 형성하는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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