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수해 기억해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평점 :
한 인간을 볼모로 잡는 범죄인 유괴 혹은 납치는 스릴러 장르에선, 거의 클리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정도로 흔하게 된 건 다른 범죄보다 더 생생한 현장감으로 독자를 작품에 더 몰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사건인데다 더하여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무고한 이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일이라 읽고 있는 이로썬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독서에도 적용되어서, 너무 많이 접하다보면 한껏 올라간 낯익음 때문에 아무래도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런 식상함이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면 장르는 ‘비틀기’라는 걸 시도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르의 틀을 슬쩍 바꾸어 그걸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여 작품의 신선도를 높이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 ‘스크림’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유괴, 납치물에 있어서도 이러한 비틀기는 이뤄졌다. 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편의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 있다.
바로 변호사 출신의 미국 여성 작가 섀넌 커크의 ‘복수해 기억해’다.
원래 제목은 ‘Method 15/33’. 사실은 소설 속에서 납치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하는 작전의 이름으로 이것만 가지고선 독자에게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하는 게 잘 전달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걸 보다 선명하게 전하려고 ‘복수해 기억해’로 바꾼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제목을 만든 이가 GOD의 팬인 것 같다. 그들의 노래 중에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가 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한다. 실은 제목을 보자마자 얼른 내 뇌리 속에서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란 노래가 BGM처럼 흐르기에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오로지 나만의 추리에 불과하니 너무 신뢰하실 건 없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어떤 비틀기가 이 소설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납치물(유괴, 납치물로 계속 쓰려니 좀 힘들어서 이렇게 그냥 납치물로 퉁치려 한다.)은 범죄자의 능동성과 납치, 감금된 자의 수동성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장르이다. 권력의 뜻으로 한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게 하거나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듯이, 납치물에서 피해자는 옴짝달짝 할 수 없는 그의 육체만큼 존재가 한없는 수동성의 냉기로 빙결된다. 반대로 가해자는 피해자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기 뜻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능동성이 태양처럼 훨훨 불타오른다. 뭐, 피해자의 생사여탈권마저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납치를 다루는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에서 가해자가 자신을 종종 신이라 운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말한 ‘비틀기’는 바로 이 관계에 가해진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해자의 능동성과 피해자의 수동성을 전복시켜버리는 것이다.
‘복수해 기억해’는 시작부터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납치 소설이 앞으로 전혀 다르게 펼쳐질 거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킨다. 한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열 여섯 살 소녀의 리사 일랜드는 공포에 떨기는 커녕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금 어떤 경로를 통해 끌려가고 있는 것인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사용하여 냉철하게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게 될 지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제목처럼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상대에 대한 자비없는 복수 뿐이다. 그 순간의 도래를 위해 리사는 괴한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순종하는 연기를 한다. 그러면서 상대의 목숨을 끊고 탈출을 도와주는 주위의 물건들을 번호를 붙여가며 하나하나 모은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 바로 그 작전명이 ’15/33’인 것이다.
‘걸크러쉬’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여자가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 대중 문화에선 남성들을 압도할 만큼의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여성이 나오는 작품(여성 ‘테이큰’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시영 주연의 영화 ‘언니’처럼)에 자주 쓰인다. 그렇다면 ‘복수해 기억해’ 또한 ‘걸크러쉬’다. 그것도 아주 쎈 걸크러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해 기억해’의 주인공 리사 일랜드는 스릴러 소설에 한정하여 가장 대표적인 걸크러쉬라 할만한 사라 패러츠키의 여자 사립탐정 캐릭터 V.I. 워쇼스키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전복성은 주인공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한 명은 주인공 리사 일랜드이고 다른 한 명은 리사 전에 납치된 소녀인 도로시 사건을 추적하는 FBI 수사관 로저 리우이다. 보통의 납치물에선 범죄자를 뒤쫓는 형사가 주인공이고 그 역시 가해자만큼이나 한껏 능동성으로 무장하고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형편인데, ‘복수해 기억해’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꿈조차 이루지 못한 남자(그 꿈은 아내가 대신 이뤄 그녀는 현재 미국 전역을 돌며 코미디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인데다 사건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뿐 이렇다 할 활약도 별로 없으며 존재감 또한 엷은 것이다. 작가는 이런 존재에게 이야기의 한 축을 기꺼이 담당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건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납치물과 얼마나 차이를 갖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 같다.
이건 위에서 말한 ‘장르 비틀기’가 원하는 또 하나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틀기는 단순히 작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이지만은 않는다. 그 목적엔 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건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 효과’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소외 효과’란 흔히 ‘낯설게 하기’로 풀이할 수 있는 말로 클리셰처럼 굳어진 장르 규칙에 변칙을 가져다 줘, 그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그 익숙함에 따라 굳어진 자신의 생각, 취향, 가치관들을 낯섦음의 효과 속에서 한 번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이것이 비틀기가 가진 또 하나의 목적이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믿음, 내리고 있는 판단들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는 시간 말이다. 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가치관이란 누군가 의도적으로 형성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그런 가치관을 점점 더 굳어지게만 했던 문화 자체를 비틀어 문화를 넘어 나 자신마저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다. 내가 너무 무리하게 설명하고 있어 잘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복수해 기억해’의 비틀기 또한 그런 연장선 상에 있다.
무엇보다 리사를 납치한 목적이 되는 범죄가 그렇다.
그녀가 납치된 건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열 여섯인데 임산부라고 충격받지 마시길!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게 있으니까! 그들이 리사를 납치한 건 리사 때문이 아니라 리사가 잉태한 아이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범죄자들은 리사처럼 어린 임산부를 납치하여 아이를 꺼낸다음 아이가 없는 부모들에게 매매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청년 경찰’에서도 이와 비슷한 범죄가 나왔던 것 같다. 또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도 생각난다. 실은 이 ‘시녀 이야기’가 작가가 이런 설정을 만드는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녀 이야기’가 배경으로 하는 세상에서 여성이 가진 의미는 오직 아이의 출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번식과 같은 동물적인 의미만 갖도록 하는 건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행위라 할 만하다. 작가는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구현된 여성의 수동성을 보다 선명하게 전복시키기 위하여 형사도, 범죄도 그렇게 설정한 게 아닐까 싶다.(원래는 ‘틀림없다’로 썼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한 발 물러선다. 으음….)
자, 결론이다.
주인공에, 형사에, 범죄에 이런 전복성이 넘치는 ‘복수해 기억해’는 분명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재미에 관해선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가열찬 복수 이야기만큼 짜릿하게 흥분시키는 게 또 있을까? 재미만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골인 지점을 두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달려나가는, 작품이 가진 에너지 때문에 난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대화 보다는 대립이, 포용 보다는 차별이 횡행하는 것엔 분명 타자를 전혀 달리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익숙함의 중력에 많이 붙들려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 기회를 위해서라도 꽈배기처럼 이전의 납치물을 한껏 비틀어버린 이 소설을 당신의 배갯머리 옆에 살며시 놓아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