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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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평등하다. 누구에게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골고루 영위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두가 저마다 소유한 시간 속에선 주인인 것이다. 세계란 알고보면 개별적인 시간들의 집합이다.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작고 다양한 개체들의 시간이 한데 모여 전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런 풍경을 역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주 어떤 이들만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모자이크 그림의 어떤 한 조각만을 딱 떼어내 보고는 그걸 가지고 그림 전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태고의 시간들'이란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수 많은 존재들의 시간들로 이뤄져 있다. 거기엔 사람만 있지 않다. 개나 집 같은 사물의 시간도 포함되고 저 천상에 있는 성모와 천사의 시간도 포함되며 이승의 건너편에 위치하는 유령들의 시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첫인상을 무척 독특하게 만든다. 소설도 역사와 다르지 않아서 중심과 주변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 소설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과 사람에게 머무른다. 조연이 주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모두 평등하다. 다들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주인인 것과 똑같이. 하물며 사람 아닌 온갖 존재들도 그렇다. 소설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롯하여 모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방에 있는 존재들까지 모두 중심으로 만든다. 하나의 존재가 이끌어가는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켜 자아내는 다양한 결을 최대한 담으려 하고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로 투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내려 한다. 마치 문명이 만든 인간의 편견을 모조리 벗겨내어 모든 존재가 태고적일 때 가졌던 순수한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는 것처럼.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태고와 그것을 둘러싼 예슈코틀레와 고시치나에츠 마을과 백강과 흑강을 마주하고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크워스커가 은둔한 숲을 거닐며 그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시간들을 유영한다. 이 시간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1914년부터 2차 세게대전을 지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과 중첩된다. 우리는 이렇게 겹쳐진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 모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이들은 이분법에 빠져 있다. 나와 타자가 나뉘고, 나가 될 수 없는 타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우린 실제 역사에서 그런 시간들이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과오의 성찰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태고라는 마을을 작가가 이렇게 위치하도록 한 걸 보면 말이다.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부른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p. 7)


 태고는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종합 명제(synthese) 자리에 위치한다. 그것은 나와 반대된다고 배척하지 않으며 모두를 포용한다. 이처럼 마을엔 숲으로 상징되는 신화적인 공간과 마을로 대변되는 문명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설은 포용이 사라진 세계가 가져오는 비극으로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남편 미하우가 러시아 군대로 차출되면서 게노베파와 이뤘던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 즈음 마을에서 가장 밑바닥의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크워스카 역시 임신한 자신을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숲에서 홀로 출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문명이 작위적으로 일으킨 분열의 시간을 마을의 존재들이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차례로 보여준다. 어떤 이는 문명을 버리고 신화(크워스카)나 광기(플로렌틴카)에게 자신을 맡기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문명을 더욱 굳건하게 구축한다(보스키 영감, 교구신부). 이토록 다양한 시도들을 작가는 자신의 판단을 하나도 첨부하지 않으면서 그저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여주기만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그렇다고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을 일면적으로 묘사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인데, 모든 존재들을 하나같이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신의 방앗간에 일하러 온 젊은 청년 엘리에게 자꾸만 이끌리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게노베파는 물론이고 크워스카의 딸로 신화적인 공간에서 태어나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으나 문명의 유혹에 쉽게 굴복해 버린 루타 또한 그러하며 독일이 폴란드 점령 당시, 그 점령군으로 온 독일인 쿠르트마저 학살자 면모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이만큼 다변화 하는 묘사를 보다보면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든 간에 단 하나의 규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을 애써 피하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 감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사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주 경계를 넘나드는 게 중요하며 긍정할만한 행위라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노베파가 한 남편의 아내라는 사회가 그어놓은 울타리를 넘어 엘리를 사랑하는 것이나, 루타와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가 서로가 위치한 신화와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좋아하는 것이나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 폴란드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유대인 랍비가 선물한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나 다 그렇다. 물론 이건 대표적으로 거론한 예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월담 행위들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보스키 영감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게노베파의 딸 미시아의 남편이 되는 파부아 그리고 익사자 유령인 물까마귀가 여기에 속한다. 자기 혼자만의 영역에 강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영역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으며 보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나 더욱 협소한 장소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물까마귀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다른 죽은 영혼들과 달리 결코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며 늘 자신이 익사한 개울에만 거처하는 것이다.


 익사자는 영혼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 이런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영혼을 쫓아가려 애썼지만, 그들은 익사자 물까마귀와는 다른 법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익사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p. 204)


 이런 식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월담, 즉 나의 시간을 벗어나 타인의 시간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꺼이 거기로 건너가 서로의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바로 그런 시간들이 많아졌다면 죄없는 플로렌틴카를 쿠르트가 무참히 학살한 것과 같은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가져온 동기는 모두 물까마귀처럼 타인의 시간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의 시간만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가져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단지 타인의 시간을 건너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응시가 되기 위해선   그 바탕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소설에서 미시아의 수호 천사에 대해 얘기할 때 처음 등장한다.


 천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 즉 애정 어린 연민이 미시아의 천사에게도 차오른다. 이것은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다.(p. 15)


 연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소설은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설에 나타난 여러가지 정황으로 추정하건데,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강한 연대 의식을 연민으로 상정하는 것 같다. 이런 연대 의식은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에 발현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대표적으로 이반 무크타의 세상 해석을 통해 잘 보여준 바 대로 우리 모두가 우연 속에 태어나 필멸할 운명이며 후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크타의 영향을 받아 이지도르가 해석한 세상의 모습 그대로.


 이지도르가 목격한 모든 것의 속성은 일시적이었다. 겉은 알록달록한 껍데기에 싸여 있지만, 모든 것은 몰락과 부패, 파멸 속으로 융합되었다.(p. 178)


 이반 무크타는 이러한 무신론에 기반한 허무주의 때문에 타인을 건너다 보면서도 아무런 연민을 가지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타인마저 단순히 기계적으로 결합 가능하거나 그러지 못할 존재로 볼 뿐이며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지도르 앞에서 수간까지 감행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연민이 천사처럼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천사와 달리 인간에게 있어 연민은 결단을 통해 형성되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미시아의 행로도, 문명의 늪 속에 푹 빠졌다가 그것의 독기를 느끼고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써 신화적 공간의 분위기가 다분한 브라질로 떠나는 루타의 여정도, 게임을 통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과정도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민은 이 삶의 끝에 허무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충실히 경작하겠다는 다짐이며 그런 시간을 나 아닌 당신 역시 같이 머리에 힘겹게 지고 있으니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위로이며 응원인 것이다. 그토록 플로렌틴카에게서 원망을 많이 받았던 달이 오히려 그녀에게 따스한 위로를 해주려 했던 것처럼.


 이러한 연민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 미시아가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 미하우에게서 받았던 커피 그라인더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라인더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 제 것처럼 받아들이는 존재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어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려는 것이다.(p. 53)


 이는 게임의 천착을 통해 각성하게 된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말년에 보여주는 모습과 많이 유사하다.


 "아버지는 아예 작은 실험실을 마련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그 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분이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신발 밑창과 부츠가 마치 인류를 구원하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 여기셨어요.(p. 318)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내치지 않으며 다른 이들 눈에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중요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와 포피엘스키는 허무의 숙명 속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여 그 격리와 차별로 삶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문명이 오직 전쟁과 학살이라는 파국을 가져온 것과 달리 미하우가 딸 미시아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만든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터전이 되듯이 세상에 가장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딸이 하는 말에서 확인된다.


 하긴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가요그가 일종의 안전 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수도.(p. 320)


  놀랍게도 작가는 이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이 구원받고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연민을 강조하는 작가의 말에 설득될 밖에. 물론 이건 작가가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 내가 추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난 작가의 이러한 말이 이 시간 참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세상은 2차 대전 중의 폴란드와 다를 바 없이 타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깎아내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혐오의 말부터 내뱉는 일들이 주위에서 현저하게 일어난다. 최근엔 한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 못해 비극적인 선택을 해버린 일도 있었고 말이다. 우리에게 연민이 있었다면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니 더욱 올가 토카르추크가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내미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미시아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p. 345 ~ 346)


 맞다.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를 넘어 내 집 마련과 인간 관계도 포기하는 '5포'란 말이 나오더니 지금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란 말마저 공공연히 나오는 현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과 비관, 불안과 고통은 점철되기만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껍데기만큼 필요한 것도 또 없다. 작가는 같은 운명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껍데기가 되어주자고 말한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껍데기가 되어주라고 말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깊이 깨닫게 된 나는 작가의 말에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주기 위해 나 역시 그라인더처럼 연민 속에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며 한껏 포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디 '태고의 시간들'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이러한 연민의 시간에 참여하여 배제된 차별과 혐오로 불편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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