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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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장 대표작인 와일드 시드 발간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 출간은 아니다지금은 절판되었는데예전에 오멜라스에서 ‘야생종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다아마도 그것이 장편으론 처음으로 소개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와일드 시드 말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제목인 ‘와일드 시드(야생종)’마저도 어떤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지배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냥우는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알지요.”

 “그래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하지만  여자는 야생종이야제어하기 힘들지 여자를 제어하는  지쳤다.”(p. 355)





 주인공은 여성인 아냥우. 그녀가 바로 야생종이다.

 ‘와일드 시드 1976년에 발표된 ‘패턴마스터’(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한 ‘PATTERNIST 시리즈'  네번  작품으로  시리즈답게 역시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물론 아냥우도   하나다소설은 작품 내내 그녀와 대척점을 이루는 도로의 눈을 통해 독자들 앞에 아냥우가 얼마나 특별하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한다일단 그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으며 성별은 물론 동물까지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있는데다  백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이기도 하다 정도라면 거의 ‘DEMI-GOD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하다도로 또한 아냥우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강탈할  있다자신의 존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때로는 아버지로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주술사 할머니로 자식들을 낳고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냥우를 유일하게 알아보는  또한 도로다그렇게 소설은 도로가 아냥우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아냥우는 자신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겠다는 도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내 그가 상종해선 안되는 악과도 같은 존재라는  깨닫고 반목하게 된다그렇게 17세기 말의 아프리카에서부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난 19세기 중반까지 도로와 아냥우가 이루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와일드 시드.


 아냥우와 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의 성격과  소설의 시작이 하필이면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말이라는 점이며 끝나는 시점 또한 노예 해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임을 감안한다면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무엇보다 지배와 종속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일단 도로만 봐도 그러하다그는 무려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그가 그토록 오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젊고 건강한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타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지배할  있는 사람이다이런 면에서 도로는 권력과 지배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아냥우는 정반대의 사람이다그는 문제가 생기면  쪽에서 먼저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존재다아냥우는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보다는 그늘에 숨어서 타인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변신의 능력은 이러한 아냥우의 성격이 그대로 집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도로는 타자의 신체를 취해서까지 절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냥우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소설에서 아냥우는 도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아냥우는 그야말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대표하는 모성 상징이라  만하다.


 이러한 아냥우의 자질 때문에 독자인 우리 눈에는 도로보다 아냥우가 훨씬  인간답게 보인다.

 이처럼 아냥우가 도로보다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왜냐하면 노예무역이 처음 시작되던 17세기 말에 서양 문명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인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에서 도로와 아냥우를 나란히 두고 ‘누가  인간다운가?’하고 묻는 것은 헤겔마저 순순히 인정했던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기다 도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도로가 마음대로 남의 아내를 취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을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오직 우수한 혈통을 만만든다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교배(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시키는 아주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도로는 아내로 삼은 아냥우마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한다그러자 아냥우는 이렇게 거세게 항의한다.


 “ 잘못된  잘못된 거야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당신 일족이 짐승의 젖을 마셔서 자기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냥 모른 척하겠어수치를 겪는 것은  사람들이니까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그들보다  끔찍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는 거잖아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도로 나라 자체가 저주받을 거야당신 일족의 작물이 말라 죽을 거라고!”(p. 239)


  항의가 17세기 말뿐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가지 편리한 이유를 갖다대며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것이라 생각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와일드 시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란 존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차별에 대해 날서린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그런 차별을 온갖 이유로 정당화하며 오직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당당하게 탈주를 감행하는 야생종이 되라고 말이다그건 사회가 흔히 비정상으로 분류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존재가 아니다오히려 그런 편견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존재들이다이런 점에서 ‘와일드 시드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로가 끝내 인간이 되지못하고 홀로 괴물로 남게 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설을 인종차별에 근거해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은 여성차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아냥우가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녀가 도로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되어 하는 것들이나 도로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걸  보여준다 글의 처음에서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라고  것도 그래서다사실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함부로   있다는 생각들이 알고 보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말이다차별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타인의 인정을 다른 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하지만 도로처럼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정작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뿐이다그들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이들의 얼굴에 괴물의 가면을 씌우지만 그들의 얼굴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르고 있다.


 그런 식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로(徒努)  뿐이다.

 여기서 도로(徒努) 일이 잘못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한다물론 옥타비아 버틀러가  도로라는 말을 알고 이름으로 썼을 리는 없지만도로에겐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외롭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결국 도로(徒努외롭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도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인정받을  있는지 모색해봐야겠다. ‘와일드 시드에서 아냥우가 걸어간 길은 거기에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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