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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문의 비극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5
고사카이 후보쿠 외 지음, 엄인경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6월
평점 :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일본은 미스터리 소설 강국으로 인식된다. 미스터리 소설 쪽으로 유명한 작가도 많고 해마다 많은 미스터리 소설들이 출간될 뿐만 아니라 독자층도 넓어 판매량도 상당하다. 일본은 매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와 같은 미스터리 소설 대상 작품도 발표하는데, 우리나라 독자들 또한 어떤 작품이 그 상을 탔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일본이 어떻게 해서 그만한 미스터리 소설의 강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학의 경우, 순전한 무에서 창조되는 경우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학이 부흥하는 걸 보고 있다면 그건 그것이 지닌 역사 속에서 성장한 것의 결과일 게 분명하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역사가 아주 깊다. 일본에서 소위 근대 소설이라는 것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미스터리, 즉 추리 소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서양 문학 세례를 받았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소화했던 것이 서양의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했다. 그 시기 활동한 에도가와 란포는 서양의 미스터리 소설을 거름 삼아 일본 특유의 추리 소설 세계를 창조했다. 그건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 시리즈로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윗 세대들의 적극적 수용과 독창성을 향한 노력이 시간 속에서 천천히 숙성되어 오늘날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 세계를 구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과거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과연 어땠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나기란 어려웠다. 주로 현대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만 소개될 뿐, 초창기의 작품들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작년, 정말 반가운 시리즈를 하나 만났다. 바로 고려대학교 일본추리연구회가 의욕적(2018년에 시작되어 벌써 6권까지 나왔으니 ‘의욕적’이라 할 만하다.)으로 발간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로, 여기서는 무엇보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 초창기의, 거의 일본 추리 소설의 원형이라 해도 좋을,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동안 나의 고전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유일하게 채워주었던 ‘일본의 탐정 소설(‘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이란 책에서 오직 이름으로만 접했던 작가와 작품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해묵은 호기심을 비로소 풀 수 있게 되었으니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쓰노다 기쿠오의 중편 작품을 표제작으로 하는 ‘어느 가문의 비극’은 시리즈 중 다섯 번째 책이다. 여기엔. ‘법의학자’ 출신답게 주로 자신의 전공인 의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으며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고사카이 후보쿠의 단편 두 편(‘’연애 곡선’, ‘투쟁’)과 ‘에도가와 란포’, ‘오시타 우다루’와 함께 ‘일본 탐정 소설의 3대 거성’으로 불리며 흔히 ‘사회파 추리소설’과 구분하기 부르는 말로 순수하게 미스터리 해결에만 집중하는 추리소설을 일컫는 ‘본격’이란 단어를 처음 썼던 고가 사부로의 단편 두 편(‘호박 파이프’, ‘꾀꼬리의 탄식’) 그리고 그 고가 사부로를 추리 소설 작가로 입문하게 했으며 그 역시 3대 거성 중 하나인 오시타 우다루의 ‘연’이란 단편 하나와 앞서 말한, 요코미조 세이시와 더불어 장편 추리소설의 시대를 함께 열었던 쓰노다 기쿠오의 ‘어느 가문의 비극’이 실려 있다. 모두 다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정작 작품은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이들이라 특히 더 반가웠던 책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고카사이 후보쿠의 ‘연애 곡선’이다.
제목만으로 내용이 얼른 짐작되지 않는 이 단편은 정말 제목 그대로 연애 곡선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곧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받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그 편지는 한 의학자가 쓴 것으로 알고보니 그는 남자가 결혼하려는 여인을 오래도록 사랑한 사람으로 남자 때문에 커다란 실연을 겪어 그것을 기회로 마침내 연애 곡선을 발견하게 되었다면서 그 과정을 소상하게 밝힌 것이었다. 이 ‘연애 곡선’이란 게 무엇인지 그리고 이 곡선이 과연 어떻게 미스터리로 형상화되는지 궁금하다면 꼭 한 번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법의학 출신 작가답게 그 과정이 꽤 설득력있게 재현되어 있으며 추리소설다운 마무리도 일품이다. 뒤이은 ‘투쟁’은 얼마 전에 작고한 천재 의학 교수인 모리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기타자와란 남자의 자살 사건을 그 제자가 친구에게 소개하는 편지로 된 소설이다. 지병으로 39세에 요절한 작가가 거의 마지막에 발표한 작품으로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 단편이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은 사건의 배후에서 이뤄진 두 천재 교수의 불꽃 튀는 대결을 보여주는데(제목이 ‘투쟁’인 건 이 때문이다.), 이러한 천재의 대결에서 왜 이 작가가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으로 불리워지는지 알것 같기도 하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천재들의 대결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어서 만나본 고가 사부로의 두 단편은 왜 이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 3대 거성 중 하나인지 짐작하게 했다. 그가 처음 만든 말이기도 한 ‘본격’의 맛을 충분히 지향하면서도 2차 세계 대전(‘꾀꼬리의 탄식’)과 관동 대지진(‘호박 파이프) 같은 거대한 자연 재해가 가져다 준 사회적 충격의 여파를 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코미조 세이시가 잘 보여준, 미스터리와 기존 사회 질서의 몰락을 교묘하게 잘 뒤섞는 것이 어디서 연원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호박 파이프’에 등장한 자경단의 설정이나 범인의 진실된 정체는 경찰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이제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게 했으며 그건 2차 대전 이후 가속화된 화족의 몰락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는 ‘꾀꼬리의 탄식’에서도 여전했다. 흥미로운 설정에 기반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는 미스터리를 계속 발생시키며 끝까지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어가는 능력도 좋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맥락 속에다 집어넣어 급격하게 변해버린 사회적 상황 앞에서 자신의 무력감과 혼돈을 곱씹는 그당시 일본인들의 자화상을 세밀하게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 범죄를 다루는 미스터리 소설은 범죄라는 상황 때문에 순문학보다 인간이나 시대상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걸 느끼게 해 준 작품들이었다. 때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의 해결로 인해 조금 흠이 보이긴 하지만 감히 명성에 걸맞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시리즈가 처음 시작될 때 나왔던 책들과 나란히 함께 찍어보았다.]
미스터리 보다 유일하게 심리 묘사에 더 많이 치중하여 이색적인 색채로 다가오는 오시타 우다루의 ‘연’은 ‘대지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22년’이라는 작중 언급이 없다면 그대로 최근 나온 일본 추리소설로 믿을만한 소재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더 흥미롭다. 요즘 나오는 일본 추리소설에서 자주 다루는 붕괴한 가정과 그로인해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자녀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고가 사부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당대 사회의 맥락 속에 넣어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갈등의 원천이 되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리한 교육을 멋대로 강요하는 폭군이자 아내에게 늘상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이러한 그는 그대로 전쟁을 획책하며 국민을 강제 동원하던 군국주의 국가 일본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소설은 불현듯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이 가진 미스터리의 진실과 그것이 남긴 여파를 차분하게 그려나가고 있는데, 그런 전개 속에서 폐인의 궤적을 거듭하는 아들의 모습과 아버지와 전혀 다른 인생 항로를 걷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군국주의 국가 일본이 가져올 미래와 그 병폐를 가급적 억제할 대안은 어떤 것인지 슬며시 드러내고 있다. 딱 한 편에다 짧은 분량의 작품이라 과연 들었던 명성대로 오시타 우다루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했었는데, 충분히 만끽할 수 있어서 더욱 만족스러운 소설이었다.
마지막은 표제작이자 가장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보여준 쓰노다 기쿠오의 ‘어느 가문의 비극’이다. 만일 당신이 오직 재미를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면 바로 그걸 이 작품에서 흠뻑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947년에 발표되었지만(원래 제목은 ‘총구를 마주하고 웃는 남자’였다.) 소설이 묘사한 시대상을 논외로 한다면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전혀 여겨지지 않으며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이중, 삼중의 미스터리와 반전이 전해주는 재미를 생각한다면 이런 작품이 왜 이제야 소개되었는지 의아함마저 느끼게 했던 작품이었다. 재미가 가득한 작품이므로 왜 내가 이런 재미를 느끼게 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가급적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다카기 고헤이가 자신의 침대에서 얼굴에 총을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평소 하녀를 포함 여동생, 친아들까지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아주 잔인하게 굴었던 그이기에 살인 동기를 가진 용의자가 꽤 많은 상황이다. 거기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후 3시의 알리바이가 모두에게 다 있다. 과연 다카기 고헤이는 누구에게 살해된 것인가? 여기에 가가미 게이스케는 딱 한 사람을 의심한다. 그건 바로 고헤이의 친아들 고로. 가가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한 카페에서 그가 소동을 일으키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첫 장면이기도 하다. 거기서 가가미는 고로가 계속 시간을 상기시키는 것에 의혹을 가진다. 나중에 살해 시각이 하필이면 고로가 소동을 일으켰던 시간과 동일하여 그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자 고로에게 향하는 의혹의 시선은 한층 더 짙어진다. 그러던 차에 고로와 연인으로 알려진 하녀 유코가 자신이 고헤이를 살해했다고 자백한다. 그러나 드러난 증거에 비추어 누군가를 비호하기 위해 유코가 일부러 자백했다는 게 밝혀지고 가가미는 유코가 고로를 위해 거짓 자백한 것으로 판단하고 집요하게 고로를 뒤쫓는다. 그런데 그만 고로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중요한 용의자였던 고로가 갑자기 살해되자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고 그러던 차에 새롭게 용의자가 나타난다. 과연 그가 진범일까?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싶게 만드는 설정을 툭 하고 던져주더니 그걸 계속 거듭된 수수께끼로 불려나가 결말을 도저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알리바이 깨드리기와 비밀 장치 살인 그리고 뜻밖의 범인 등 셜록 홈즈와 엘큘 포와로, 혹은 란포의 ‘아케치 코코로’나 긴다이치 코스케 같은 탐정이 활약하는 고전 추리소설의 스타일이 아주 잘 살아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좋아한다면 정말 환호작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이런 재미도 재미지만, 이 소설을 말할 때 무엇보다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탐정 캐릭터다. 형사인 ‘가가미’가 바로 그 존재인데, 언뜻 조르주 심농의 유명한 형사 ‘매그레’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가급적 말없는 관찰자로 자처하며 오직 수사에만 묵묵히 전념한다. 탐정은 보통 수다스러운 편인지만 가가미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것이 한없이 개성적인 색채를 지녀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이처럼 흔치 않은 캐릭터는 양날의 검이다. 잘 묘사하면 더없이 매력적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허무맹랑하게 생각되기 십상이다. 바로 그걸 나누는 것이 작가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인데, 쓰노다 기쿠오는 전자다. 그리 무리하지 않은 설정과 필치로 가가미란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형상화하는 것을 보노라면 자신의 캐릭터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매력이 잘 살아난 가가미 형사가 활약하는 또다른 작품을 만나고 싶어진다. 책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약력을 보니 정말 많은 작품들을 출간했던데, 부디 이 하나로 그치지 말고 다른 작품들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가가미 형사가 활약하는 것으로.
처음엔 오랜 호기심으로 잡아 본 시리즈였지만 책이 거듭될 수록 예전엔 미처 그 매력을 몰랐던 작가와 작품들을 새롭게 만나는 재미가 더 컸던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이번에 만난 ‘어느 가문의 비극’은 내가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크게 확인시켜 준 책이었다. 더구나 추리소설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도 그저 재미만 추구하지 않고 작가가 직면한 시대의 어둠과 고통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뜻깊었다.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알게되어 인식의 지평이 날로 확대되는 것만큼 좋은 일로 다가오는 것도 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일본 추리소설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그런 좋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가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되어 더욱 더 많은 읽고 아는 재미를 경험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