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무나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이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 않았다. 왜 소년만 야망을 가져야 하는 거지? 노년은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이런 의문이 들었는가 하면,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꿈꾸는 할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노년이 야망을 품으면 노욕(老慾)이라고. 늙어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말한다. 꿈이든 야망이든 사랑이든 그런 건 모두 나이와 전혀 상관 없다고. 혁명도 얼마든지 꿈꾸어도 좋다고. 그 할머니의 이름은 메르타 안데르손. 그녀는 다이아몬드 요양원에서 보호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온갖 금지 속에 갇혀 있다. 예전에 그녀는 농부였다. 억센 두 손으로 가축도 기르고 작물도 생산했다. 자기 스스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잠자는 시간조차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다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가 끌기 보다는 남에게 끌려가기만 하는 생활. 당연하게도 이런 자신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다.


 여기, 노인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할지 모른다. 메르타는 <거의 언제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메르타는 이 믿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p. 15)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믿음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메르타처럼 꿈을 이루기가 요원한 장소에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감을 따고자 한다면 직접 장대를 사용해 가지를 흔들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이 행위로 완성되듯이 오로지 적극적인 실천만이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메르타에겐 과감한 실천력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쥐구멍을 찾아내는, 아니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함께 금지를 위반해, 거기서 오는 자유와 쾌감을 통해 반기의 즐거움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장차 다이아몬드 요양원만이 아니라 스웨덴 전국의 노인 요양원 전체를 뒤바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갖고 올 그룹이.


 애초엔 감옥에 가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전혀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요양원의 처사에 반발해서였다. 감옥의 간수는 적어도 죄수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진 않으니까. 다시 말해 메르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린아이로 길들이려는 요양원의 행태에 지쳤던 것이다. 


 메르타가 바르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젊은 것은 노는 게 뭔지 도통 몰라! 어린아이들도 잔치를 하면 밤새 놀고 그러잖아!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야."

 천재가 입을 열었다. "규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p. 525)


 그건 그들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원 출신 갈퀴는 각종 꽃과 허브를 길렀다. '천재'라 불리는 오스카르 크루프는 온갖 물건들을 발명했다.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여성 모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던 스티나는 회화에 몰두했다. 평생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한 안나그레타만이 다소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정해진 궤도만 따라 살던 사람에겐 위반이 더 큰 의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들 모두 메르타에 뜻에 동조, 감옥에 가기 위하여 범죄를 지으려 했다.


 감옥, 그 곳은 평범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무진장 멀리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스스로 간다고 하는 것은 구획된 삶에서 탈주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 탈주를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행위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화단에 심어 놓은 꽃처럼 사회가 정한 위치에서 그가 부여한 정체성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이 형성하는 사회적 정체성의 중력으로 어느새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모르게 된 우리들은 사회가 씌어준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벗어날 줄 모른다. 탈주란 그 예속의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려는 움직임이기에 주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탈주의 강조를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비정상의 장소로써 '감옥'을 가져왔을 것이지만 그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메르타 일행이 막상 감옥에 가보니 요양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바르브로가 있다면 감옥엔 리사가 있듯이, 어디서나 개인에게 주체의 역량을 빼앗고 명령을 잘 따르는 아이로 길들이려 하는 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으로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작은 실천이라도 하다보면 탈주는 이뤄지는 것이며 장소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즉 메르타와 '노인 강도단' 동료들이 모여서 범죄를 모의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노인들이 돼보는 거야.(p. 54)


 정말 그들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서의 그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노쇠한 몸에게 어디서든 공격이 이뤄질 수 있는 감옥은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다. 하지만 메르타 일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옥은 오히려 메르타는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천재는 다른 사람의 범죄 방법을 배우며 몸을 젊게 가꾸는 등, 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토양이 될 뿐이다.


 이처럼 요양원의 금지된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는 이미 자기 내부에 있다. 안주하지 않고 탈주를 감행할 때 열쇠 또한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 가장 먼저 능동적인 주체가 된 메르타가 하필이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훔치게 되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러한 탈주를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성별, 인종별, 종교별 그리고 연령별. 저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데서 오지 않은, 누군가 주입한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거기에 따라 판단한다. 우리는 이런 걸 선입관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메르타 일행이 고가의 명화 두 점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선입관 덕분이었다. 노인은 약하고 수동적이라 범죄 행위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다는, 이러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선입관이 경비원으로 하여금 메르타 일행을 범행 현장에서 뻔히 보고도 그냥 가게 한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고 보면 메르타 일행이 하필이면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범죄 영화에서 노인들은 은행 같은 곳에서 범인들의 총구 앞에 덜덜 떠는 존재이거나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활약하게 만드는 계기였지 이렇게 범죄 행위의 주축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메르타 일행이 저지르는 것과 같은 강탈 행위에선 더욱 그랬다. 갑자기 횡단 보도 위로 넘어져 주인공의 활약을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가가 허다한 범죄 중에서도 절도와 은행 강도 같은 강탈 행위를 가져온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걸로 영화가 노인에게 반복적으로 형성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렬하게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메르타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p. 4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도 사회가 씌어 놓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지만 타인을 볼 때도 가면인 줄 모르고 진짜 얼굴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는 기성복처럼 양산된 가짜 얼굴에 안주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맨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사회가 이식(移植)한 자리를 마냥 있어야 할 내 자리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평생 누군가 씌워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로 그 가면을 벗기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짜 얼굴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탈주를 강조한다. 탈주란, 다름아닌 그 가면을 벗기는 행위이니까.

 스티나가 덧칠한 것을 벗겨내자 비로소 진짜 명화가 드러났던 것처럼.


 노인의 야망을 노욕이라 부르는 것도 선입관이다. 어떤 나이든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선 안된다. 탈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듯 나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 없이 사람은 다만 그 자체로 이해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겉모습이, 거기에 덧칠된 선입관이 점점 본질을 압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성별과 인종, 국적과 계층 그리고 세대에 있어 그런 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가는 혐오와 적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거기 있는 단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입관에 물든 가면을 벗기고 그 사람만의 진실된 얼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메르타의 탈주는 그 직시(直視)를 위한 궤적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렬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0-3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