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세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



 윌리엄 세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현대 유명 작가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소설을 쓰는 '호가스 세익스피어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어떤 작가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지 명단을 미리 알렸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작가는 바로 '요 네스뵈'였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너무나도 아끼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요 네스뵈는 권력을 향한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맥베스'를 맡았다. 늘 사랑으로 아파하고 그로인해 고난을 자처하는 해리 홀레를 떠올린다면 리어왕이 좀 더 그와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울과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홀레를 생각한다면 맥베스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파멸의 궤적을 그리는 데 있어 능한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으니! 그러고 보면 '맥베스' 처음에 등장하는 맥베스가 극 중에서 첫 전투를 치르게 되는 이가 바로 노르웨이의 왕 '스위노'다. 혹시 이것 때문에 요 네스뵈가 맥베스를 맡게 된 건 아니겠지?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 작가라서. 안다. 말 도 안 되는 상상이란 걸.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흰 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드디어 수 년의 기다림 끝에 그 작품을 만났다. 그런데 이런! 제법 두툼하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은데, 어쩌다 이렇게 분량이 늘어났을까? 그 궁금증 때문에라도 나는 서둘러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요 네스뵈는 일단 맥베스의 골격을 그다지 바꾸진 않았다. 스위노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덩컨 왕에게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고, 갑자기 나타난 세 마녀를 통해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것이며 버남 숲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가 상대라면 절대 파멸하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는 것도 그대로 나온다. 물론 자멸하는 것도. 인물들 역시 원래 희곡에서 맡은 역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새로운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그것을 아주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옮겼기 때문이다. 희곡의 무대가 되었던 중세의 스코틀랜드는 70년대의 도시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도시란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전직 경찰청장 케네스 때문에 부패와 마약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희곡에선 스코틀랜드 왕으로 나왔던 덩컨은 그런 부패와 마약 조직을 일거에 소탕하여 깨끗한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신임 경찰청장이다. 소설의 맥베스는 희곡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마약 시장을 카테(희곡에선 세 마녀를 거느린 여신 같은 존재였는데, 소설에선 마약 조직의 수장이다.) 조직과 양분하고 있던 노스 라이더 조직 급습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그 와중에 노스 라이더 조직의 수장 스위노는 사살된다.) 덩컨에 의해, 희곡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었던 것과 똑같이 조직범죄수사반장이 된다. 그러자 헤카테가 거느린 세 마녀와 같은 존재들(그들은 헤카테 아래에서 마약을 제조한다.)이 나타나 희곡과 같은 예언을 들려준다. 세 마녀는 헤카테에게 돌아가 맥베스 마음에 일단 씨앗은 심어 놓았지만 과연 맥베스가 헤카테 생각대로 움직일 것인지 의심한다. 그런 그들에게 헤카테는 맥베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레이디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레이디는 맥베스가 결혼한 여성으로 그녀는 인버네스 카지노의 사장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이름이 아니라 레이디로 나오는 이유는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도 그냥 '맥베스 부인'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줬어도 별 상관없었을테지만 이만큼 요 네스뵈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아무튼 맥베스는 그 예언을 레이디에게 들려주고 레이디는 맥베스에게 덩컨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요 네스뵈는 레이디를 맥베스만큼이나 권력 욕망에 물든 존재로 그린다. 그런데 여기엔 연유가 있다. 과거에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다 보니 권력의 집착에서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레이디의 잘못을 맥베스 역시 하게 된다. 처음엔 사소한 오판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이 나중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의 올무가 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한낱 낯선 이의 예언이 나중엔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신탁이 되어버렸던 맥베스처럼.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맥베스' 역시 욕망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욕망을 자신의 인간성과 맞바꾼 자의 이야기다. 그건 그가 원하는 자리에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이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분노가 되지만, 맥베스의 죽음은 찰라로 묘사되며 누구에게도 잔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림인 것처럼 된다. 요 네스뵈는 이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맥베스가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살해하는 인물은 알고보면 그 때 가지고 있었던 맥베스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덩컨은 경찰로서 맥베스가 되고 싶은 바람직한 경찰의 상징같은 인물이고 뱅쿼(희곡에선 맥베스와 함께 세 마녀의 예언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진짜 아버지도 아니면서 진짜 아버지보다 더한 부성애로 약물에 중독되었던 맥베스를 파멸에서 건져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준,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기회를 가져다 준 사람으로 인간으로써의 맥베스가 가져야 할 사람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둘을 참혹하게 살해하여 원하는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는데, 이건 그대로 권력을 차지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경찰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는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는 경찰청장이 되고 난 후, 더욱 약효가 강한 마약을 찾게 된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크기에 비례하여 더 중독성 강한 약을 찾는 것만 같다. 여기서 약은 이중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약의 중독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사소한 잘못된 선택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맥베스의 삶이 그랬듯이 처음엔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자의에 따라 괴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약은 명확하게 괴물의 상징이다. 사람의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을 억제하고 오로지 욕망의 충족만 추구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는 맥베스에게 잠을 박탈하는 것으로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그를 나타내었다. 소설에서의 마약 중독은 마약이 늘 각성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희곡에서 잠을 상실한 것을 빗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잠의 상실이 소설에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더프가 맥베스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게 뭐야?"

 "정의와 우리의 잠을 돌려 받는 것"(p. 430)



그런 마약이 팽배해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나 타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모두 마약과 멀리 있다는 것도 이것을 방증한다. 한 쪽에는 괴물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사람이 있다. 맥베스의 반대편엔 더프(희곡에선 맥더프)가 있다. 희곡을 읽어 본 사람은 이 더프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연인 케이스네스(희곡에서 케이스네스는 그저 더프와 뜻을 같이 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나왔는데, 요 네스뵈는 재밌게도 소설에서 연인으로 만들어버렸다.)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욕망보다 사랑과 책임을 더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케이스네스를 향한 욕망 또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사랑 때문에 과감하게 접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쳤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당신을 희생했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랬듯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내 천헝이라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걸 바치지는 못할망정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내 이기적인 욕심에 아이들에게서 가족을 빼앗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어머니의 무덤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어.(p. 313)


 올곧게 욕망의 길만 따랐던 맥베스와는 정반대의 남자. 하지만 아직 맥베스를 만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저 세익스피어가 맥베스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잘 리메이크 하고 생생한 현실과 심리 묘사로 잘 살을 붙여 더욱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만 말해두려 한다. 부피가 이토록 두터워진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등장 인물들을 리얼한 삶의 현장 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그만한 부피로 핍진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성공했고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액션 장면도 많아 더욱 지루할 틈이 없다. 맥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요 네스뵈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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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