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의인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2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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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 그 평가를 가장 많이 참조하고 미스터리 팬에겐 걸출한 평론서인 '블러디 머더'로 이름 높은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월리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작 작가들 중에서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지닌 사람은 에드거 월리스가 유일했다.('블러디 머더', p. 317)


 신랄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 시먼스라 이 정도로 말하면 상찬이 분명하다. 그러나 에드거 월리스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려 173편의 소설을 발표(그 중의 절반이 추리 소설이다. 그는 SF를 쓰는 것도 좋아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작품의 출간이 반가웠다. 그것도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네 명의 의인'이라서 더욱 그랬다.






 '네 명의 의인'은 제목과 다르게 피카레스크 장르에 넣어야 할 듯 하다.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사익 때문에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실 돈 때문에 살인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살인을 감행한다. 세상을 고통 속에 빠뜨렸는데도 자신의 돈과 권력을 사용하여 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내 처형하는 것이다. 때로 여기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자를 방해하는 이들도 포함된다. 소설에서 '네 명의 의인'의 최종 목적이 되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이 그러하다. 최근 영국에 스페인에서 부패한 정부(엄청난 기근이 스페인에게 닥쳐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정부는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만 급급해 국민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 마누엘 가르시아가 스페인 정부의 손을 피해 망명해왔다. 그런데 필립 레이먼 경은 새로운 스페인을 위한 혁명의 등뼈와도 같은 가르시아를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하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려 한다. 이 법이 실행될 경우 가르시아는 죽은 목숨이다. 그것은 현재 부패한 스페인 정부가 계속 존치하는 것을 뜻한다. '네 명의 의인'은 이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선 가르시아를 영국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걸 방해하는 필립 레이먼 경은 죽어야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네 명의 의인'(실은 세 명이지만.)이 필립 레이면 경을 암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탈퇴해 경찰에 쫓기다 죽어버린 맴버를 대신해 '네 명의 의인'이 새로 영입한 인물은 '테리'. 그러나 스페인에서 데려온 이 청년은 선뜻 합류하려 하지 않는다. '네 명의 의인'에게 그는 필립 레이먼 경을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다. 과연 테리는 그들의 맴버가 될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한 축에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필립 레이먼 경을 암살하기 위한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들은 스스로 신사라 자청하기에 방법도 정정당당하게 한다. 그러니까 필립 레이먼 경에게 법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죽일 것이라 예고장을 공개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아침마다 수 십 통의 협박을 받는 레이먼 경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자 '네 명의 의인'은 자신이 마음먹으면 누구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예고장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영국 하원 의회에 폭탄을 설치하고 그렇게 했다는 쪽지를 남긴다. 오직 경고의 목적이었기에 폭발을 하지 않도록 된 폭탄이었지만, 그토록 사람이 많았던 하원 의회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와 폭탄까지 설치했다는 사실에 그 의회에 있던 사람은 물론 영국 전체가 공포에 잠긴다. 그 일로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네 명의 의인'은 그들이 전에도 대의 명분을 위해 먼 외국의 대통령까지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등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해왔다는 게 알려지면서 더 비상한 관심과 공포의 존재가 되며 과연 그들이 제시한 시간에 레이먼 경이 죽을 것인가가 초유의 관심이 된다.


 그러나 뚝심 있는 레이먼 경은 법안 철회를 생각도 않고, 경찰은 '네 명의 의인'을 대대적으로 쫓는 한 편, 레이먼 경을 보호하기 위해 물샐틈 없는 경비로 완벽한 밀실을 만든다. 과연 '네 명의 의인'은 이 두터운 벽을 뚫고 레이먼 경을 암살할 수 있을까?


 피카레스크 장르에 밀실 살인을 뒤섞은 참신한 설정의 소설이다. 거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05년임을 감안하면 돈과 권력의 힘을 빌어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를 스스로 처벌하는 자경단이 등장한다는 것도 놀랍다. 자경단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도 1940년이 되어서야 등장했으니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배트맨의 설정은 아주 부유한 자가 자경단이 된다는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밥 케인이 '네 명의 의인'을 읽고 그런 설정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네 명의 의인'은 1921년과 39년에 두 번이나 무성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어서 밥 케인이 영화로 만났을 수도 있다.


 

1939년에 나온 영화의 포스터


 어쨌거나 저쨌거나 당대엔 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형식으로 무장했으니, 왜 줄리언 시먼스가 에드가 월리스를 두고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주 오래된 작품이지만 피카레스크 장르에 미스터리 물, 법정 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에 마지막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읽힌다. '네 명의 의인'이 때로는 위협을 위해, 때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트릭을 구사하는데 그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물론 그 중 어떤 것은 좀 너무 안일한 것 같지만 말이다.(하지만 1905년이란 시간을 감안하면 용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프랑스의 유명한, 범죄자 출신 경찰이자 경찰 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던 '비독'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아무튼 재밌다. 분량도 2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니 가볍게 즐길 만하다. 고전 미스터리 소설이 취향이라면 오래도록 미싱 링크였던 것을 이제 확인한다는 마음으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 줄리언 시먼스에 따르면, 에드가 윌리스는 꽤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인물의 이름만 적어두고 거기에 대해 다른 어떤 것도 메모하지 않았고 연재 소설을 쓸 때는 다음 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즉흥적으로 썼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왜 '네 명의 의인'이 자유 분방한 전개를 보였는지 알 것 같다. 이런 그가 믿었던 것은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에드가 윌리스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여러 직업을 거쳐 가며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그러한 거리의 삶이란 당시를 생각해보면 범죄에 많이 노출된 삶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윌리스는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숨길 수 없는 사회가 가진 냉엄한 진실을 보았던 것 같다. 주로 사기꾼들을 통해서 말이다. 시먼스에 따르면 윌리스는 사기꾼들의 습성과 언어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을 작품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나온 재치있는 트릭들도 그런 식의 활용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악인을 통해 사회의 참된 진실을 보고 그런 그들의 행위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가진 자들 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사회의 균형을 바로 잡는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사회가 만든 정상성의 범주를 이탈한 타자를 통해 기존 사회의 전복을 꾀하는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의인'도 그렇지만 이 책의 띠지에서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소개하고 있는 '킹콩'(이것은 책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1931년,  RKO 영화사가 당시 고릴라가 나오는 영화를 계획했을 때, 그것을 위해 썼던 110 페이지 분량의 초안이다. 월리스는 이것을 5주에 걸쳐 썼다고 한다.)도 문명 저 바깥의, 오로지 야만의 땅에서 온 타자가 아니던가. 그 타자가 자신을 이용만 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기존 사회를 거의 전복시킬 정도로 뒤흔드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혁명의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언제까지 타자를 배척하거나 이용만해서는 사회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외침의 표현이다. '네 명의 의인' 역시 정확히 그 연장선 상에 있다.


1933년 '킹콩' 영화 포스터. 원안이 에드거 윌리스에서 나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 후기에는 나오지 않는데, 시먼스는 이 책과 관련하여 재미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원래 이 책은 출판사에 팔리지 않아서 에드거 윌리스가 자비로 출판했다고 한다. 그는 책이 좀 많이 팔릴 수 있도록 꾀를 냈는데, 그건 마지막에 필립 레이먼 경이 사방이 가로막힌 밀실에서 살해 당하는데 과연 '네 명의 의인'이 어떤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그 방법을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누군가 정답을 맞추면 상금으로 500 파운드를 주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실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다고 한다. 아무도 못 맞힐 것이라 여겨서 500 파운드나 되는 상금을 걸었는데, 정답이 너무 많이 접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윌리스의 최고작으로 1922년에 발표된 '크림슨 서클'을 꼽고 있다. '놀라운 심리 탐정' 데릭 예일이 스코틀랜드 야드와 맞붙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을 자신의 베스트 100으로 꼽기도 했다. 그 당시에 미드 '멘탈리스트'와 같은 심리 분석 탐정이라니, 놀랍다. 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게되면 좋겠다.


1933년에 나온 영국판 초판 페이퍼백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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