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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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아주 고통스런 기억에 대한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늘 죽음을 바랐던 이가 오로지 거기에 대해서 쓰는 것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기에 써야만 했던 소설이기도 하다. 바로 2018년 5월,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 '패트릭 멜로즈'의 원작이 되는 소설에 대한 얘기다.





 그 원작이 되는 소설이 국내에 발간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1960년에 영국 런던에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작가와 작품 모두 아직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한다. 그 예로 총 다섯 권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의 첫 권인 '괜찮아'는 베티트래스크 문학상을 받았고 네 번째 권인 '모유'는 페미나상을 받았으며 맨부커 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나는 그 중 처음으로 나온 '괜찮아'를 읽었다. 원제는 'NEVER MIND'. 귀에 낯이 익다면 그건 미국의 대표적인 얼터너티브 락그룹인 '너바나' 때문이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자 90년대의 음악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역사적인 음반 제목이 바로 'NEVER MIND'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 역시 너바나의 음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음반은 91년, 소설은 92년에 나왔으니까. 92년 쯤이면 'NEVER MIND'가 특히 'SMELLS LIKE TEEN SPIRIT'를 선두로 세계 전체를 폭풍처럼 휩쓸고 다닐 무렵이다. 제목을 지을 때, 작가나 편집자의 귀에 한 번은 들어갔을 것이며 너바나의 노래가 담고있는 메세지가 '패트릭 멜로즈'의 주제와도 상통한다는 생각에 '이거 좀 잘 어울리는군' 하며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SMELLS LIKE TEEN SPIRIT'이 어떤 노래인가에 대해 커트 코베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 노래는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노래이며 그들은 늘 자신을 십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늘 어른이 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 지금 세상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세상. 그들은 어른이라 말하지만 사실 실패한 어른에 지나지 않는 세상. 그러므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어른이 되는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 'SMELLS LIKE TEEN SPIRIT'은 바로 그런 세상의 모습을 얘기했고 'TEEN SPIRIT'을 지도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혁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괜찮아'를 읽어보면 보여주는 것이 이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소설은 오전 7시부터 모두가 잠든 밤까지 단 하루를 담는다. 1960년대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말이다. 소설이 한 권에 걸쳐서 이 하루를 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괜찮아'를 비롯하여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모든 작품들은 사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고 그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그 하루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날, 다섯 살인 패트릭은 아버지 데이비드에게 강간을 당했다. 실제 작가 또한 그랬다. 겨우 담 위로 올라가 걷다가 뛰어내린 일에서 촉발된 그 사건은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로 작가는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내내 약물 중독과 반복된 자살 시도라는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뒤이은 시리즈의 책들은 모두 그런 고통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무간 지옥으로 변해버렸으니, 한 권 전체를 할애하여 그 날을 복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 데이비드로 시작한다. 출발부터 데이비드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원의 개미들을 물줄기를 퍼부어 죽이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하층 계급인 이베트가 무거운 세탁물을 들고 지나가자 일부러 말을 걸어 팔이 아파서 괴로울 때까지 그 자리에 있도록 하기도 한다. 영국 왕의 사생아 가문인 그는 마치 조상이 당한 멸시를 후손이 되갚아 주기라도 하는 듯이 타인을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못 사는 존재이다. 식탁 상석에 있는 데이비드 전용 의자인 '총독 의자'는 그런 데이비드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그런 아버지로 시작하여 소설이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른의 모습이다. 그들은 많은 돈과 지식 그리고 교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도, 데이비를 숭배하는 니콜라이도, 친구인 교수 빅터도 모두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정 받기 위해 허영을 부리고 남을 험담한다. 후반의 데이비드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저녁 만찬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처럼(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가장 압권인 부분이 아닐까 한다.)남을 비꼬고 무시하는 것이 마치 상류층의 매너라도 되는듯 행동하는 그들은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듯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패트릭이 당한 강간은 진실과 존중 그리고 배려가 사라진, 그러한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의 세계가 끝내 낳고야 만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두 커버가 겹쳐져 있습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이 드라마 방영을 기념하여 특별히 나온 표지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원래 표지입니다.


 '괜찮아'는 도저히 지도로 삼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마치 날카로운 메스를 대듯 신랄하게 비난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른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너바나가 'NEVER MIND'를 통해 들려주려 했던 이 말을 우리는 바로 이 소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이 정말 그랬다. 90년대는 미국 부시 정부의 걸프 전쟁으로 막을 올렸다. 초장부터 십대의 아이들이 보게 된 것은 밤 하늘을 별처럼 수 놓으며 날아가는 미사일과 대기에 꽉 차 흐르는 피와 죽음의 냄새 그리고 증오의 후끈한 열기였다. 이것은 80년대 횡행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배제로 요약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최대치에 도달해 폭발한 것만 같았다. 그것이 십대에게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는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었다. 도처에서 죽고 다쳐서 쓸려나가는 사람들과 폐허가 되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십대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자신의 손에 쥐어준 지도를 찢어 발기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목은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그 어디서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 소설은 차라리 '너바나'와 같은 제목을 사용했던 섹스 피스톨즈이 외쳤던 것과 똑같이 그런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선 '신경 꺼라!'로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말은 그 후로도 3년 내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때의 자신에게 지금의 작가가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괜찮아'엔 그런 시대의 들끓음, 응집된 분노가 서려있다. 이 소설이 하필이면 대처 수상의 은퇴하고 얼마 안 되어 나왔다는 것도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어쨌든 고통은 시작되었다. 이후로 오래도록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은 절뚝거리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데이비드에게도 공포는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그리스의 이타카 공항에서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를 본 적이 있다. 데이비드는 혹시 자신의 진실된 초상이 그런 거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더 타인의 약점을 물어뜯는 걸 즐기며 남들에게 아멸차게 군다. 그의 공포는 그대로 패트릭에게 전이되어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이후의 패트릭 삶은 실상 그런 거지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지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결국 아들을 그런 거지로 만들고 말았다. 옛 사람들은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죗값을 치른다는 말을 흔히 했다. 누군가의 탐욕과 무분별이 일으킨 전쟁이 많은 고아를 만드는 것과 똑같이. 악의와 죄는 어디로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도착하고 마는 편지처럼 돌아와 응당의 대가를 치루도록 한다. 크면 클수록 더 오랫동안. '패트릭 멜로즈'는 그 궤적의 길이를 생각토록 한다. 비록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가 그랬듯이 또 뭔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끝내 방관하고만 앤이 그랬듯이 침묵과 방관 속에 더 커지고 길어지는 누군가의 비극을.


  작가의 엄마는 작가가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그 아픔이 고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다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치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가 새겨진 단테의 지옥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중 하나이기에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다음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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