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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난 원래 추사 김정희를 잘 몰랐다.
그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세한도'를 그린 사람 정도만 알았다. 책은 '세한도'가 정말 걸작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엔 솔직히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는데 이런 그림이 걸작이라고?'만 생각했다. 외워야 하니까 이름을 외웠을 뿐, 흥미도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추사의 위대함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었던 건, 유홍준의 '완당 평전' 을 읽고나서였다. 아마도 최초로 추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아닐까 기억한다. 유홍준에게 추사란 삶에서 한 번은 꼭 정복해야할 산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추사를 연구하기 위해 나이 40에 성균관대 박사 과정에 입학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5년 간 박사 논문을 위해 열심히 추사를 연구했지만 유일하게 추사의 학문 세계를 밝힐 근거가 되는 '완당선생전집'의 부실 때문에 논문은 쓰지 못하고 그 연구의 결실은 '완당 평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으로 나처럼 추사를 비로소 진정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비판과 질정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보다 완전한 추사에 대한 책을 위해 유홍준은 '완당 평전'을 시나브로 절판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2017년. 칠순을 앞둔 작가는 다시금 추사란 산을 올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흡하기 때문에 절판시켜 버린 '완당 평전'을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을 맞아 공개된 무수한 새자료를 비롯 그동안 발굴하고 연구한 자료까지 포함시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완당 평전'을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당 평전'의 성격은 학술인 동시에 문학인데 지금 당장 보완하기 힘든 것은 학술의 문제이지 문학의 문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그려낸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과 작가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당 평전'을 전기 문학으로 개고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예술가의 전기는 나의 학문적 과제였다.(...) 그 생각을 하면서 머리가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학술적 정확성을 위해서는 자료를 제시할 때마다 출처를 밝히고 고증해야 하지만 문학으로 임한다 생각하니 그런 주석과 고증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군더더기였다.(...) 그로인해 역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논문 형태보다 전기로 기술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p. 576)
그렇게 하여 이번엔 전기의 형태로 다시금 추사의 생애가 우리 앞으로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추사 김정희'라는 책이다.
유홍준에 의하면 추사의 일생은 보통 이렇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1) 1786 ~ 1809년(1 ~ 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 ~ 19년(24 ~ 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 ~ 40년(34 ~ 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의 중년기
4) 1840 ~ 49년(55 ~ 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 ~ 56년(64 ~ 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책은 이 모든 시기를 시간 순서대로 담고 있고 그렇게 서장과 종장을 합하여 모두 12장에 걸쳐 추사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고 살면서 안팎으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특히 상호 영향 관계가 두드러지는 학문과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삶이 그랬다. 그는 먼 청나라까지 정말 많은 교류를 폭넓게 했다. 그의 시야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 걸쳐 결코 한정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금석학과 글씨에 대한 부분은 이러한 추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만 옳다하지 않는 것, 이만큼이면 되었다 자부하지 않는 것,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타인의 것을 제 것처럼 살피며 공부하는 것. 어쩌면 바로 그러한 타자에의 열림이야말로 추사를 위대하게 만든 원천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하면서 함께 쌓인 것들이 추사의 삶 전체에 걸쳐 녹여져 있기 때문에 유홍준이 책의 마지막에 술회한 것처럼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란 정녕 산숭심해(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되는 것은 아닐지.
사진은 청나라 유학자들이 '세한도'를 보고 찬(贊)한 글로, '세한도' 뒤에 저렇게 길게 붙어 있다고 한다.
국제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단면이다.
'완당 평전'과 비교하자면(정확한 비교를 위해 책을 찾았으나 내 집의 서림(書林)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예전에 읽은 막연한 기억에 기대어 말해야 한다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지만), 확실히 이 책이 추사의 삶을 더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전기라서 삶의 세세한 면모를 더욱 잘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주고받은 서신이나 추사가 타인에게 하거나 타인이 추사에게 한 찬(贊)이나 논(論)도 많이 인용되고 있기에 추사의 내면은 물론 객관적인 모습까지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책은 추사의 삶이 가진 모든 변곡점마다 그것이 어떤 상호 영향 관계로 이뤄졌는지 잘 나타내고 있기에 삶의 모든 굽이마다 추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만큼은 확실히 알게 만든다. 때로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게 또 어떻게든 추사의 산을 넘어보려는 작가의 집념 혹은 추사에 대한 존경으로 되도록 왜곡이나 훼손 없이 추사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려는 노력 같아서 지루함을 느끼려는 머리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든다. 과문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지만, 어쨌든 내게만은 이 책은 '추사 김정희에 관한 집대성'으로 보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에 실린 풍부한 도판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엔 정말 많은 도판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추사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금석학과 글씨인 것만큼 그 실체를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진 자료가 실린 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빠짐 없이 수록되어 있기에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삶 전체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여정을 시각적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강상 시절의 추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사진은 강상 시절에 쓴 추사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이다.
추사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의 8할은 교류였다. 사람과 정파, 국적을 가리지 않은 많고도 다양한 사귐이 '추사'라는 '산숭심해'를 만든 것이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 옛날의 추사처럼 교류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려는 지금, 이러한 추사의 삶은 특히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추사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은연 중에 오늘의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까지 알려주는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사가 말년에 강조했던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가 한껏 드러난,
과천 시절의 대표작이자 기념비적 명작인 '산해숭심, 유천희해'.
'산해숭심'은 원래 옹방강이 실사구시 정신을 풀이한 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