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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치 못하게 중앙일보를 보게 된 이후, 신문을 잘 안읽게 됐다. 하도 황당한 내용이 많아서다. 그러던 어느날, 신간소개 코너를 우연히 보다가 폴 크루그먼이 책을 냈다는 걸 알게 됐다. <미래를 말하다>라는 책이란다. 샀다. 사흘 내내 그 책만 읽었다. '이렇게 유익한 책이 있다니!'란 감탄을 한 사십번쯤 했다. 책값이 18,000원이라 살까 말까 망설였던 게 겸연쩍었을 정도. 중앙일보같은 신문에도 가끔 쓸만한 내용이 실린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건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들 한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미국 경제의 70년을 근거로 그게 그렇지 않음을 논증한다. 시장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정치라는 얘기다. "시기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먼저 이루어졌고, 경제적 불평등이 그 뒤를 따랐다(23쪽)"라고 말하는 저자는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경제가 성숙해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고,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만들어진다(34쪽)"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엔 물론 풍부한 자료가 인용되어 있어 정말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권자들은 왜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복지를 축소하자는 정치세력에 표를 던지는 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기독교와 선거자금 문제, 빈자에게 인색한 선거권 문제 등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인종문제라고 말한다. 즉, 흑인과 섞이는 게 두려운 백인들-특히 남부 지방-이 인종차별에 일가견이 있는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거다.
"공화당이 남부지방에서 이기기 위해 인종문제를 교묘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비결의 전부다 (231쪽)."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도 인종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지역문제. 전라도 차별로 대변되는 희한한 지역정서가 월 소득 100만원 이하의 극빈층까지도 한나라당을 찍게 만들지 않는가? 책 말미에서 크루그먼은 인종문제가 점차 무뎌지고 있다면서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의 지역문제는 별반 나아질 기미가 없다. 네이버 같은 사이트에서 소위 네티즌이라는 젊은이들이 다는 댓글을 보면서 기가 막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이번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는 전라도 찌질이들의 한풀이'라는 댓글에 무지막지한 숫자의 공감이 눌러진 걸 보면 앞으로도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다.
성장과 분배 중 어느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우리 사회는 압도적으로 성장 쪽의 손을 들어준다. 파이가 커지면 분배는 저절로 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하층계급으로의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극적으로 성공시"킨 루즈벨트와 트루먼의 재임 후에도 "미국 경제는 망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향후 세대가 누릴 경기호황의 기반을 마련했다(59쪽)." 그러니 분배를 하면 우리 경제가 망한다는 주술 따윈 집어치워야 할텐데, 그놈의 지역감정 때문에, 무식해서, 혹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파란색 깃발이 우리나라 전역에 휘날리고 있다. 내가 매일 이용하는 영등포 역 지하상가에 "영세상인 다 죽이는 한나라당은 재벌정당인가?"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걸 보면, 그리고 "2MB 찍어줬더니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하는 아주머니를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비교적 낙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한 크루그먼과 달리 난 극심한 절망 속에 책을 덮었는데, 노동자를 위한다는 당이 얻은 득표율을 보면 크루그먼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보지 않을까? 한가지 더. 맨 마지막 장에는 미국의 의료보험 얘기가 나오는데, 이걸 읽으면 우리가 누리는 전국민의료보험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지금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은 그 좋은 제도를 흔들려는 청와대 사람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