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여기 좀 읽어보세요. 재밌지 않아요?"

연구원 선생님이 나랑 가까이 살아 기차로 출퇴근을 같이 한다. 그전엔 기차에서 책만 읽었는데, 지금은 그분과 얘기도 해야 하니 진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음 장면이 너무도 궁금했으니까. 창문만 보시는 연구원 선생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책의 초반부 하이라이트를 읽어 드렸다.


전날 무리한 탓일까. 책을 읽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평택을 지나갈 무렵 겨우 눈을 떴는데, 책이 없어졌다. 좌우로 눈을 돌리다 보니 연구원 선생님이 내 책을 읽고 계시다. 노안이라 기차에서 책을 잘 안보시던데, 역시 선생님도 이 책이 재밌나보다. 마저 읽으시라고 난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기차가 영등포에 도착할 무렵 눈을 떴더니, 연구원 선생님은 아쉽다는 듯이 책을 돌려준다. 물론 이 말은 잊지 않았다.

"서박(그분은 날 이렇게 부른다), 다 읽으면 나 좀 빌려줘."


심윤경 작가가 쓴 <서라벌 사람들>을 읽는 동안 그 책을 탐낸 사람은 연구원 선생님만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책을 좋아하는 아내가 그 책을 빼앗아 읽더니만, 자신이 먼저 읽겠다고 우기기도 했다.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게 재미라고 한다면, <서라벌 사람들>은 좋은 소설의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달의 제단>에서 고전에 대한 녹녹한 솜씨를 보여주었던 작가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소재를 찾아 (작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선데이 서라벌'을 썼다. 이 책이 심상치 않음을 안 것은 지증황제의 그것이 '한자 다섯치'라며 다른 사람의 것이 '귀이개'로 묘사된 초반부인데, 그 심상치 않음은 다행히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되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쓰고 비보이들이 추는 뱅글뱅글 도는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끝이 난다. 심윤경 작가를 강의에 모셨을 때 그의 유머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작가가 자신의 유머를 마음껏 발휘한 건 이 책이 처음이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신라 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무척이나 관대했던 것 같다. 그러던 게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고 우리 문화가 야만으로 취급되면서, 공적인 자리에서 성은 발설조차 안되는 엄숙한 무엇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그 엄숙함 아래 도사린 수많은 일탈과 불륜을 생각하면, 공적인 자리에서도 거리낌없이 성을 이야기하던 그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 작가의 팬이라는 건, 책을 읽는 며칠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그 작가의 책을 기다리며 보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책을 읽었으니 당분간은 기다림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어디선가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겠지. 나무아미타불 (이 책을 읽고나면 저절로 이 단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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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06-2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심윤경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아요. 작가님은 어쩜 그리 유머가 넘치시고 지적이실 수 있을까요. 정말 정말 정말 멋진 심윤경 작가님. 정말 정말 좋아요 ㅠㅠㅠㅠㅠㅠ

2008-06-20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6-2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새 책이 나왔군요!

마냐 2008-06-2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반가워요. 저 '심빠'라고 커밍아웃 했는데...팬클럽 지부장 하심 제가 도와드릴께요. ㅎ 이번 작품은 특히나...컨셉 맘에 들고, 표현 수위 좋슴다. 야한건 즐겁다는 거...진짜 좋은 작품이니까 이게 되더라구요. 으하하...제가 서재 들락거리기 시작한 딸래미 눈치 보여서, 이 좋은 맘 다 표현못하고 검열했다니까여. ㅋ

마태우스 2008-06-2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안녕하세요 마냐님도 심빠시군요!! 전 팬클럽 지부장이 아니라 회장할 겁니다^^ 저도 이번 작품의 수위, 컨셉 다 맘에 들었어요. 으하하. 글구 따님에게 서재를 알려주셨군요!! 이거이거 검열이 많이되겠네요 가족 얘기는 전혀 못쓰시겠군요!
주드님/네... 이 책이 재미 면에서는 단연 최고입니다
속삭님/어마 오랜만이어요. 요즘 저한테 적이 많아져서요 제 서재 안오심 그런가보다 합니다. 근데 이렇게 아름다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요!! 5년 후에나 오신다니, 그동안 조신하게 님을 기다리렵니다^^ 청량제같다고 해주셔서 감사!
최상의발명품님/이곳엔 유난히 심작가님 팬이 많은 것 같군요 팬클럽 회장은 접니다!!^^ 님은 지부장 맡겨드릴께요!

최상의발명품 2008-06-2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도봉구 지부장으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