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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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호크쉴드의 책은 이것이 두번째인데, 전에 읽은 <레오폴드의 유령> 만큼이나 그의 솜씨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그는 역사가도, 언론인도 아닌 저술가다.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와 주제를 택해 역사가만큼이나 치밀하게 자료를 모으고 해석하고, 언론인 만큼이나 현장감있게 기술한다. 우리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저술의 유형인 셈이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자체에 대한 탐구라기 보다는, 이 국제화된 전쟁에 기꺼이 몸을 내던졌던  (주로) 미국인 국제여단 참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주 오래 전에 일본인 좌파 학자들의 논문을 모은 <스페인 내전연구>(형성사) 정도가 그동안 이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앤터니 비버)에 대해 내가 읽은 거의 전부였다. 그 책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약칭 POUM으로 불렸던 집단의 정통성을 주장했던 듯 하다. 그건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반복된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감동스러운 점은, 그리고 아주 읽을 만한 책이라는 점은, 스페인 내전이 전세계 좌파 지식인들이 반파시즘에 대한 신념에 찬 헌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감동스러운 대목은, 스페인 내전이 패전으로 돌아간 이후 국제여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살았던 '그 이후'의 삶이다. 버클리의 교수, 하버드의 대학생, 노조원, 미국 공산당 당원, 부자집 도련님, 헤밍웨이에서 마사 겔혼과 같은 언론인/소설가, 루이스 피셔와 같은 기자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총을 들고 스페인으로 가서 싸웠다. 그리고, 이들은 내전에서 패배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영역에서 인종주의와 싸우고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진보적 삶을 살았다. 프랑코의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군수물자를 보내주고, 전투기 부대와 지원부대를 파견했던 강력한 지원자들이 있었다.(히틀러에게는 2차대전을 위한 사전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실전경험을 제공했다.) 공화파에게는 소련이 있었으나 그들의 지원은 관료적인 무능에 겹쳐 무기도 형편없었고, 눈앞의 전투보다는 소련내의 숙청과 숙청의 국제화(트로츠키 암살과 스페인 내전 참여자들에 대한 숙청)에 더 관심이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이념적으로는 파시즘과 반파시즘, 반파시즘 내부에서는 혁명과 전쟁을 둘러싼 입장과 이념에 따른 분파주의적 갈등, 지역적으로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주의와 단일한 국가를 옹호하는 국가주의의 대립 등이 중첩된 전쟁이었다. 거기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고, 국가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묵인하거나 오히려 조장함으로써 공화파를 궁지에 넣은 영국과 미국(루스벨트), 프랑스가 있었다. 파시즘 세력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거대한 지원에 힘입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반면, 공화파는 이념적 갈등과 내분에 시달리면서, 국제여단이라는 는 '인적 자원'외에는 별다른 지원이 없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했던 것이다. 공산당의 패권주의, POUM의 분파주의, 아나키스트들의 비현실적 헉명노선 등 그 무엇도 공화파의 승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설사 공화파가 이겼다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아나키스트들과 공산당 간에 또다른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주책없이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는데,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이 보여주는 국제주의적 헌신이 눈물겨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해 목숨을 내건 자들의 운명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이런 가치에 대한 헌신은 탈레반이나 극우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국제여단 참여자들이 보여준 가치가 파시즘이나 종교적 이념에 대한 경사와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국제여단 참여자들이 보여준 가치는 민주와 공화, 민중의 편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중의 하나인 전직 버클리대 강사이자 링컨 연대 중대장인 로버트 메리언의 아내는 이렇게 묻는다. "그 시대는 어디로 간 걸까요?" 파시즘에 맞서 자신의 조국을 떠나 보편의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야말로,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주 희미하게 존재했었던 국제주의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준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몇가지 기억할만한 사실들 .텍사코는 프랑코의 목숨줄이었다. 그들의 외상으로 준 석유 덕분에 프랑코는 승리할 수 있었고, 루즈벨트의 미국은 그렇게 국가주의자를 도와주었다. 빌리 브란트, 생텍쥐페리도 국제여단에서 싸웠다. POUM의 정통성은 공산당과 아니키스트들의 상대적 후진성 또는 반동성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노선이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정당하거나 온당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쟁은 삶과 죽음, 그리고 많은 민중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스페인 내전에 지원군으로 보냈던 거의 대부분의 장교들을 암살하거나 숙청했다. 영국군에 합류하여 독일의 루프트바페 공습을 막아내고 괴링의 공중전을 무력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던 폴란드 공군조종사들이 2차 대전 후 귀국했을 때, 감옥에 갇히거나 숙청당한 것과 비슷하다. 베리야의 NKVD는 역사의 야수같은 집단이었다. 폴란드의 카틴숲 학살, 유대인을 구출한 영웅 발렌베리의 죽음도 모두 그들의 작품이었다. 


"노 파사란"(No passaran, 그들은 통과할 수 없다)을 외친 광부의 딸이자 아내이자 재봉사였던 스페인 공산당 의원 돌로레스 이바루리(라 파시오나리아 La Pasionaria 예명)의 국제여단 해체 고별 연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취재'나 하고 겔혼과 '염문'이나 뿌리고 다닌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실제 전투에도 참여했다), 조지 오웰은 POUM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나 국제여단으로 옮길 찰나에 공산당의 반동이 시작되었다는 것("POUM의 혁명적 순수성에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었지만 내게는 무의미해보였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2일, 공산당이 품과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공화파 내부의 내전(무정부주의자 교환수가 공화국 대통령의 전화를 제지하면서 시작된 어처구니 없는 사건), 국제여단의 통제본부나 지휘부는 소련이 이 장악하거나 스탈린주의자들이 '관료적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 그리고 스페인의 가톨릭은 반동의 극치이자 종교적 가치를 스스로 부정했던 극단적 파시즘 세력이었다는 것. '오염된 서구사회'에서 유일한 정통 가톨릭임을 스스로 자임하여 프랑코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었다는 것. 이런 등등도 두루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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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대학도시 루뱅’(Leuven)의 시청광장 한 구석에는 청동으로 된 한 사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실물보다 작은 크기의 이 동상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골목 앞에 있어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제복을 입고 천상의 고고한 이상을 동경하듯,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남긴 흔적은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거의 전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중세 최대의 인문주의자로 불리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EU가 주관하는 대규모 교환학생 및 장학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도 바로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태어난 고향의 이름을 붙여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1466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한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가 살던 15~16세기는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이뤄졌던 시대, 기사도의 몰락과 도시의 발전, 종교개혁의 서막이 올랐던 대격변의 시대였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에 수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수도사 생활을 하다 25살에 카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사제는 교구에 매여 있어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는 캉브레(Cambrai) 지역 주교의 비서가 되면서 수도원 밖에서 생활을 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유럽 최대의 인문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삶은 에라스무스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것이기도 했다. 1495년에는 파리에 머물면서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공부를 했고, 영국으로 건너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를 비롯해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도 대학을 다녔고, 베네치아의 한 출판사에서는 책을 쓰며 지냈으며, 벨기에 루뱅에서도 글을 쓰며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자 수많은 대학들이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그는 차라리 베네치아의 인쇄소 교정원을 택하거나 영국 귀족의 가정교사나 부자집 식객으로 살기를 원했다. 만년에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 정착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초상은 이 시기 당대 유럽 최대의 초상화가였던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이다.


<사진 : 루뱅시 광장 귀퉁이에 있는 동상>


그가 세계주의적 정신,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이같은 자유로운 정신과 다양한 곳에서의 학문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에도 정주하지 않았고, 머무는 곳은 모두 고향으로 알고 지낸,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이었던 그는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어느 한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와 인종, 계층으로부터 선별한 고결한 사람들을 커다란 교양인의 동맹체로 불러 모으는 것, 이 숭고한 시도를 그는 자기 삶의 본래 목표로 받아들였다.”(스테판 츠바이크) 유럽지역의 대학생들에게 지역과 대학의 범위를 넘어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종교개혁과 우신예찬’, 루터와의 갈등


에라스무스가 인문주의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라틴어 인용문을 모은 <격언집 Adagia>를 출간하면서부터. 이 책은 식자라면 라틴어 문구 하나쯤은 인용해야 대접받던 당시의 지적 속물근성과 맞아 떨어져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자는 단순한 인용문 모음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해석과 논평이 덧붙여진 것이었는데, 르네상스가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참고서가 되어 중세의 지적 세계를 허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격언집>을 출간한 이후 에라스무스는 1511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 집에 머물며 일주일 만에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을 써냈고, 이어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를 펴내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한 복판으로 들어서게 된다. <우신예찬>은 당대 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금서로 취급받아 상당부분이 삭제된 채로 유통되었고 저자의 이름도 가려져 있었다.


사진 :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은 헤라클레스의 업적들이라는 제목의 책에 손을 얹고 있는 그림인데, 에라스무스의 업적이 헤라클레스 만큼이나 위대하다는 존경의 표시를 그렇게 표현했다.


이 책은 우매함이라는 부인을 내세워 풍자적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비판한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바보들'의 목록은 수사학자, 법률가, 철학자, 귀족들, 금전착취자, 신부, 군주, 추기경 등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우매함이라는 부인은 가톨릭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번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성스러운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나님의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에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가지의 다른 힘겨움이 대신 들어서게 되겠지요.” 당대의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적 비판인 셈이다. 당시 교황을 피를 빨아먹는 거대한 거미로 묘사한 그림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우신예찬>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을 당기고,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를 통해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성서만이, 인간적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적 방법으로 교황중심의 교회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1517년 비텐베르크의 대학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며 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다. 그는 학생시절 눈 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신다면 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한 뒤 실제로 수사가 된 인물로, 가톨릭 교회에 대해 그들은 돈 통에서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가르쳤다고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다.

초기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친분을 유지하며 종교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에라스무스는 교황에게 루터를 파문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질만큼이나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달랐다. 루터가 가톨릭 교회와 전면적인 전쟁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혁명가이자 선동가라면,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타협, 공존과 화해를 역설한 온건주의자이자 대화를 통한 해법을 찾는 외교관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강경론과 비타협적 자세가 교회 내 보수 강경세력의 입지만을 강화할 것이라 우려했다.


(사진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30년 전쟁의 모습)



탄핵당한 평화, 종교전쟁과 에라스무스


두 사람 사이의 불화와 논쟁은 종교개혁을 둘러싼 방법과 교리상의 논쟁이지만, 동시에 종교전쟁이 임박할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루터는 교회에 대한 공격을 선동하며 더 과격한 개혁으로 나아가면서 에라스무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지독한 적이라 증오하며 결별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파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며, 이후 닥쳐올 종교전쟁의 서막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 루터에게 편지를 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분별 있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교만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리고 폭도와 같은 그 태도가 온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오. 당신의 의지로 인해 이 폭풍이, 내가 그토록 이루고자 싸워왔던 그 화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나를 분노케 하고 있소.”


에라스무스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에게만 전쟁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하며, 1517유럽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서 비난받고 쫒겨나며 죽임당한 평화의 탄핵을 말하는 <평화의 탄핵 Querela pacis>을 출간한 바 있었다.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루터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장 철회 요구를 거부하면서 결국 파문을 당했다. 1530년 에라스무스의 관용과 타협의 정신에 입각해 신구교간의 화해를 시도했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도 무위로 끝나면서 유럽사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긴 살육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의 역사를 상기해보면 현실에서의 에라스무스주의는 결국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급진적인 루터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그의 평화와 인문주의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를 황제가 자문위원회 자리를 제공하고, 영국의 헨리 8세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가 초청장을 보내고, 유럽의 다섯 개의 대학이 교수직을 수여하고, 세 명의 교황이 존경의 편지를 보내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교도 지도자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농민군이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도록 부추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톨릭 도시 루뱅의 시민들은 에라스무스를 루터의 페스트균이라 비난을 퍼부었고, 대학생들은 그가 강의하던 강단을 뒤집어 버렸다. 신교도의 도시인 바젤에서도 그는 쫓겨나야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고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인문주의를 통해 초국가적 이성’,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대립과 갈등의 와중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에라스무스의 패배는 한 명민한 지성의 실패라기보다는, 대립과 증오, 폭력과 반폭력이 맞서는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일 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 사후 유럽 신구교 국가 내부에서, 또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은 대략 8백만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산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이 전쟁이 종결되면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는 근대적 이념이 수립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랜 고통과 희생 위에서야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 에라스무스의 후예들


에라스무스 평전을 쓴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그를 평화사상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의 제자 몽테뉴가 통찰과 관용을 계속해서 전파한다. 스피노자는 맹목적 정열 대신 정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디드로, 볼테르, 레싱, 그리고 회의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 그들이 동시에 모두를 이해하는 관용을 위해 편협에 맞서 싸운다. 실러의 문학에서는 세계 시민의 정신이 활기차게 일어나고,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요구한다. 톨스토이와 간디, 롤랑에 이르기까지 타협의 정신은 논리적 힘으로 폭력의 자위권 앞에서 자신의 도덕적 권리를 요구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로망 롤랑의 반전주의와 같은 근대적 평화주의는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통합의 선구자인 장 모네는 2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 유럽이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별국가를 넘어선 국가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유럽통합운동을 불을 지폈다. 로베르 쉬망, 콘라트 아데나워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유럽통합 운동에 앞장 선 것도 이런 배경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유럽연합(EU)의 출범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유럽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왔던 에라스무스적인 것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화합과 평화야말로 에라스무스가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한 가치였던 것이다. 과거 그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던 루뱅의 시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운 것도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이 갖는 현재성 때문일 것이다.


(사진 :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화, 여기서 그는 한손에 잉크를, 다른 손에 펜을 쥐고 있다. 유럽 인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림)


그가 남긴 유산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서 더 뚜렷하다. 1987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2013년까지 300만 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누렸고, 후속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에는 2018년의 경우, 85만 명/95천 개의 기관이 참여해 235백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유럽 전역의 대학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던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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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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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의 계속된 작업은 내게 줄곧 관심의 대상이었다. 폴란드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나 아마 거기에서 많은 부분 비롯되었을 '민족주의'의 반동성에 대한 저술들이나 기억연구자라고 이름붙인 최근의 작업도 그러하다. (그가 최근 작업한 집시 전시회에 못가본게 참 아쉽다.) 그의 저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당연하게 해석되었던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성찰을 필수적으로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해석의 프리즘(민족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엇이든)을 벗겨내고 사실(그 사실조차도 가끔은 의심스럽지만) 그 자체에 대해 천착할 때 종종은 혼돈스럽고 '진실'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 <기억전쟁>은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생각의 단초, 성찰의 계기를 가장 많이 제공하고 있는 저술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과 '전쟁'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 학살에서부터 2차대전, 폴란드와 동구에서 벌어졌던 살육들, 일본군에 의한/에 대한 많은 죽음들. 거기에는 그 학살을 주도한, 국가이든 군대이든 간에 하나의 집단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또는 집단화된 신념)이 존재하고, 추후에 그것을 기억하는 한 개인들 또는 역사가들이 있다. 임지현은 그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집단화된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내면, 집단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개별자들의 내면에 더 주목하고 있다. 중심부의 해석을 벗어나 끊임없이 주변화한 시선으로 보기, 주변에 선 개인의 위치와 내면에서 응시하기. 집단 학살에 대한 역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학살을 겪어온 개인의 내면과 의식에 더 신뢰가 간다. 내가 프리모 레비나 스베틀라나 알렉세에비치의 책 같은 것에 더 이끌리는 까닭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브라함 헤셀이 전하는 일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몬 비젠탈의 일화다. 기차안에서 랍비에게 폭력을 가했던 상인의 이야기, 랍비를 못 알아본 상인은 그를 자리에서 쫓아냈으나 추후에 그가 존경받는 랍비인줄 알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자 그 랍비는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기차 안에서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니가 그는 내가 아니라 어느 이름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셈이지. 그러니 나 말고 그 이름없는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게 옳다." 


이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나치 친위대원은 죽기 직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인 비젠탈을 불러달라 요청하고 그 앞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자 한다. 자신의 행위를 두고 도저히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없으니 다른 유대인에게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것. 비젠탈은 그의 용서에 대한 간청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온다.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용서할 권리를 위임받지 않은 상황에서 비젠탈이든 요제크든 또다른 누구든 그들을 대신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가 저지른 죄를 용서할 지 말지는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용서는 때로 폭력적이다." 그것은 오롯이 그 폭력 행위를 당한 바로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이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인자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 역시 해당 살인자에게 용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서도,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용서에서도, 독일국가가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할 때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용서를 하고 사과를 하는 것은 거짓 화해이자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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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 - 대한민국을 위해 최전방에 설 젊은이들에게
김현종 지음 / 홍성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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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의 다른 이름은 '한미FTA'다. 그를 빼놓고 한미FTA를 말할 수 없으며, 그가 아니었다면 한미FTA도 불가능했다. 그는 곧 FTA며 FTA는 김현종이다. 한 개인이 과연 한 국가의 통상전략에 있어 차지하는 위치가 그 정도일 것인가하는 의문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 이 문장들은 사실에 부합한다. 오랫동안 그를 다른 많은 진보인사들처럼 '검은 머리 외국인' 정도로 생각해왔다. 외모만 한국인일뿐 그는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외국인이라는 것.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미국사람이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었는데, 가까이서 접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방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통상문제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상호이익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일방의 이익이거나 손해가 된다면 거래가 가능하지 않다. 물론, 글로벌한 경제불균형 상태에서 또는 국가간의 힘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통상은 존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김현종이 직접 썼다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 그리고 통상문제에 대해, 이른바 한국의 진보논객들이 펼쳐온 주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은 그동안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볼 기회를 가졌다는 뜻이다. 한미FTA 체결 반대/무효를 '거리의 정치'를 통해 관철하려던 수많은 진보단체와 진보지식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미국 중심의 패권적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얘기였다. 


이 책은 김현종에 대해 두가지 점에서 내 생각을 바꾸게 했다. 그 첫번째는 그는 민족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책 머리에서 그는 구한말 역사를 끄집어 내면서 당시 국제정세에 둔감하고 자폐적인 질서속에 안주하려던 당대의 집권층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는가를 지적한다. 쇄국주의가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판단이다. 미국에서 자라고 콜럼비아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스위스에서 국제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국내의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한국인이며, 한국의 역사가 개방체제를 외면했기 때문에 당대의 국제 질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인식을 매우 강렬하게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선택한 '발전경로'는 개방적 통상국가로 가는 것이다. 국제 통상질서에 대한 인식, 그리고 유시민이 언젠가 강조했던 한국경제발전의 '경로의존성'에 대한 인식속에서 '통상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안했던 '남북 FTA'와 같은 대담한 구상도 그런 시각이 아니었으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애국'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고, 더구나 민족이라는 집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선택은 '애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것이 복수의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느 한 집단이나 특정한 방법론을 가진 존재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김현종은 외국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 그것도 통상민족주의자인 것이다. 그가 동시다발적 FTA 전략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개방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개방을 하지 않으면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이나 "FTA는 협상 당사자가 아닌 제3국에 대한 차별이 본질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리해진다"는 인식, 여기에는 불가피한 국제통상질서가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이걸 외면하고 다른 길을 택할 방법은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 숨어 있다. 


그가 통상전문가로서 뛰어난 점은 실제 협상 과정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협상력과 대담함, 협상의 논리와 세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준비, 뛰어난 영어실력, 판을 깰 수도 있다는 배짱 등의 덕목이다. 실제 협상과정에 대한 그의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거의 무협지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데, 자화자찬이 과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전략과 전술은 주효했다. 이른바 4대 선결조건 등 10여년 전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극렬하게 반대했던 측의 논리와 주장은 매우 앙상해 보인다. 그들의 우려처럼 우리의 건강보험이 무너진 것은 아니며, 감기약이 10만원으로 오르지도 않았으며, 농업이 FTA 때문에 붕괴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미FTA는 우리에게 '약간' 혜택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만약 체결되지 않았더라면(그래서 관세철폐 효과를 보지 않았다면) 손해는 상대적으로 더 컸을지 모르겠다. 요컨대, 체결이 가져온 결과를 놓고 보면 대표적인 반대론자 한신대 이해영 교수 같은 사람의 전망은 오히려 맞지 않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김현종은 이력과 다르게 매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거칠게 말해 그는 자신의 처신을 결정할 때 봉건적 '군신관계'와 유사한 방식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을 발견하고 발탁한 노무현에 대해 '주군'으로서의 예를 다하고 있다. 그가 협상장에 나설 때도, 협상에서 진전이 없거나 다른 부처 장관들과의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도 그는 대통령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그의 판단과 동의를 구한 후에야 거사를 도모한다. 정권이 바뀌어 그에게 다른 제안이 왔을 때도 그는 주군으로서의 노무현을 버리지 않고 '자리'를 거절했고,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부름을 받고 통상 수장에 오른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청와대의 국가안보실 2차장이다. 이제 안보는 외교군사의 영역에서 경제의 영역으로 바뀐 모양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좀 이채로운 부분이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박사나 '경계인' 송두율 선생처럼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주요한 이력을 쌓았으면서도 도저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지식인들이 있다. 산업혁명에는 뒤졌지만 IT에 있어서는 앞서 가자며 척박한 한국으로 돌아와 인터넷 분야의 후학을 키운 전길남 박사의 민족주의는 감동적인 바가 있다. 반대로, 미국의 빅터 차처럼 일촉즉발의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미국 강경파보다 더 심한 인식과 논리를 보여주는 자들도 있다. (미국 주요 싱크탱크의 '한국계' 북한 전문가(?)들 중 대다수는 매파 또는 전쟁불사론자들이다. 그들의 혈연적 연결성에서 '분단의 고통과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김현종은 자신의 민족적/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분명해 보이고, 그 집단에 대한 귀속 의식 내지는 책임의식이 매우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현종은 그런 사람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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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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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묵은 책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볼테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도 그렇고, '캉디드'라는 아주 고전적인(?) 책 제목도 그렇다. 오랫동안 낡은 서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음직한 책. 새삼 이 책을 들춰 읽게 된 까닭은 얼마 전에 번스타인의 '캔디드(candide)'가 무대에 올랐던 것 때문인데, 그게 이 묵은 책을 내게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서가 어딘가에 범우사판이 분명히 꽂혀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 열린책들 판을 사서 읽었다. 이 책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으나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캉디드'는 내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던 것이다. 원래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법이 아니던가. 


이솝우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쯔의 세계관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순진한 청년 캉디드'의 좌충우돌, 종횡무진 모험기인데, 그의 모험담은 우화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당대의 종교, 권력, 전쟁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 아주 유머러스한 문체와 스토리 속에 녹아 있다. 주인공 캉디드는 퀴네공드와 키스를 한 '죄'로 귀족의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포르투갈, 남미, 페루의 엘도라도, 프랑스, 네덜란드, 베네치아,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을 전전하며 죽다 살아나거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거나 기인을 만나거나 죽었던 스승과 옛 애인을 만난다. 우연과 기연(奇然)이 뒤죽박죽으로 반복되는 소설. 볼테르는 엄숙하거나 자못 진지한 체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유쾌한 악동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삶의 아이러니, 곧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순진한 믿음이 배반당하는 과정에 있다.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 최악의 세계이거나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한 바다. 볼테르의 풍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이 스토리가 순진한 믿음을 배반하는 교회를 비롯한 당대의 제도와 관습, 부당한 권력과 인간이 가진 사악한 이기심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추악한 세계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는 것,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나기 않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소박한 근면의 세계. 캉디드와 그의 무리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마을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이유다. 


캉디드의 거창한 모험 치고는 결말이 너무나 단순한데, 어쨌든 천상의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네 주변의 땅이나 갈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게 그의 전언이다. 미인이었던 퀴네공드는 늙고 보니 추녀가 되어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 철학자는 터키의 한 농부만도 못한 인식을 갖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761년의 세계상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남미를 비롯한 신대륙에 대한 경이와 환상(엘도라도), 대항해 시대를 거쳐온 유럽인들의 지리적 인식이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드러난다. 이 길지 않은 작품에 지구의 반 이상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볼테르의 합리주의는 이 전지구적 인식에 근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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