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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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권을 읽고 무한 감동을 받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나 보다.

유희경 시인은 언젠가 '오늘 아침 단어'라는 시집을 선물받아 읽게 되었는데,

그때 나와 감성의 파장이 비슷하다고 설레발을 칠 정도로 좋았었다.

('오늘 아침단어' 리뷰 링크==>)

그랬는데 요번 시집을 읽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걸 보면,

시인의 시나 감성의 파장이 바뀌었을리는 없고,

내가 무덤덤한 것이 나이들어가나 보다.

 

내 자신을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ㅋ~.

사람 사는 세상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지만,

연애 감정이나 사랑 얘기 따위,

직접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랑이나 사랑 그후에 오는 상실이나 쓸쓸함에 대한 얘기가,

아름답다기보다는 공허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사랑을 떼어내고 관계나 존재에 관한 것에만 집중하여 읽으려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다 보니, 마냥 어렵게만 읽힌다.

 

개인적으로 문지시인선의 표지 초상화를 좋아하는데,

지난 번 시집도 좋았지만,

요번 시집도 좋았다.

여백에 채색을 하여 얼굴을 두드러지게한 이런 기법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청 분위기 있고 시적이다.

 

시집은 내가 괜히 툴툴거려서 그렇지,

1, 2, 3부 제일 앞에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란 제목의 시로 배치하는 등,

기법 면에서도 산뜻했다.

시는 제목만 같을 뿐이지 전혀 다른 내용의 독특한 시다.

 

좋은 시가 여럿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시들이 좋았다.

 

무사

 

   한 아이에 대해 쓰는 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 우묵한 저

물녘 아이가 길을 배워가는 그런 시를 나는 쓰고 있다 아

이가 내민 길고 가늘고 하얀 지팡이가 길고 가늘고 하얗

게 빛난다 그것을 본 적 없이 아이는 웃는다 나는 아이의

즐거움을 모르겠다고 적는다 아이의 뒤에서 선생은 구령

을 붙인다 하나와 둘 사이를 짚고 아이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라고 적은 문장은

지우기로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마조마하다 무엇이 무엇

인지도 모르는 것이 깨질 듯 종내 깨져버리지 않고 거기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너무 많

다 그런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

하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보이지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섣불리 얘기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 뿐만 아니라 간혹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볼때가 있다.

그 웃음이 너무 해맑아 부러우면서도 불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기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아이들은 웃음 외의 다른 감정들은 경험하지 못하였고,

때문에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웃음이나 즐거움은 내 기준으론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도 좋았다.

 

안과 밖

 

   잎을 뒤집으면 거기, 살과 뼈의 사람이 있어 색 다 벗

겨지고 투명해지도록 울창한 한 계절 함께 나고 싶었네

숲을 심고 들어가 나무가 되고, 둥치가 되어 둥치마다 이

름을 새기고, 이름이 되어 고개를 들면 일렁이는 평생을

잇는 단서가 있을 거라 믿고 싶었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도 뒤덮여 썩어가는 것이 있어, 몸을 半 묻고도 다 울 수

도 없는 지금이 前生이지 나는 아무것도 적지 못하겠네

가는지 오는지 더듬어도 없는 흔적이어서, 그제야 뒤집

어도 보이지 않고 놓아도 가라앉지 않는 사람의 뼈와 살

이 거기 있었네

 

이외에 '놀라운 지시', '봄' 등 아껴읽을 시가 많았다.

 

소설이 됐든,

수필이나 자서전의 형태가 됐든,

아니면 시여도 좋고,

안으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글은,

그윽하고 웅숭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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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8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04-18 17:14   좋아요 0 | URL
꾸준히 시 읽으며 자기와 맞는 시를 찾고 갱신하는 일 자체가 첨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멋진 나무꾼님이세요.

양철나무꾼 2018-04-19 11:38   좋아요 0 | URL
시집은 꾸준히 사들이고, 시는 꾸준히 읽어요.
근데 저랑 맞는, 제 취향의 시집만 사들이는데,
취향이라고 장만해도,
어떤 땐 잘 들어맞고 어떤 땐 비껴가고 그래요~^^

전 면허증만 갱신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시 목록도 갱신 가능하군요.

참 이상한게 같은 단어라도 syo님이 사용하시면 되게 멋지게 들려요.
그런 syo님에게 멋지다는 소리를 들어서,
이 아침 (밥을 먹어 배가 빵빵한데도 불구하고) 날아갈것 같아요~^^

AgalmA 2018-04-19 09:03   좋아요 0 | URL
표지 그림이 착각을 줄 여지가 많은 듯ㅎ 이 시인 잘 모르는 사람은 이름도 그렇고 여성 시인이라고 보기 딱 좋은ㅎ;
유희경 시인 시는 뭐랄까. 바람이 불고 커튼 뒤의 풍경이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가려지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요즘 문지 시집 좋아서 계속 사게 되네요^^

양철나무꾼 2018-04-19 11:44   좋아요 1 | URL
agalma님 페이퍼에도 이 시인 등장하는 거 봤어요.
이시인 ‘위트 앤 시니컬‘이라고 ‘시집 서점‘을 운영하신다죠.
서점 제목으론 어떤지 모르겠지만,
위트는 좀 글쎄~@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요번 시집 시니컬한 것이 멋지구리 합니다.

님의 ‘바람이 불고 커튼 뒤의 풍경이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가려지는 그런 느낌‘이란 표현도 완전 죽음입니다~^^
 
평범한 게 어때서
로빈순 지음 / 동아일보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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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어제부터 머리가 복잡하다길래,

머리를 빨래처럼 햇살에 내다 말리라고 했었다.

버릴 것 버리고,

헹구고 탈탈 널어서 말리면,

그럼 간단해진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머리는 맨날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며,

답이 없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양철나무꾼이라는 나의 닉처럼 '썸웨어 오버 더 레인부우'라고 흥얼거리고 싶기도 했었지만,

어쩜 그림 속에서처럼 '아 썅 그래도 힘든 건 힘들어...' 라고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좀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때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요즘이야 책이 눈 뻑뻑함과 안구 건조 등 각종 안과질환을 유발하지만,

본디 책은 종류를 막론하고 내게 만병통치약 쯤이었다.

소설 책 등을 읽으며 감정이입하여 대리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전문 분야 서적 을 읽으면서 객관적 지식을 습득하기도 한다.

 

간혹 이런 종류의 책을 읽긴 하지만,

이렇게 몰입하고 감정 이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한 위로가 되는 것이 세상엔 이런 종류의 처방전도 있음을 일러주는것 같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냐고 한다면 딱히 꼬집어 애기할 수는 없으나,

읽고나서 가슴이 말랑말랑하고 넉넉해지는 느낌이랄까,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며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 책의 제목이 되는 '평범한게 어때서'는 이런 부분에서 비롯한 것 같다.

 

세상에는 멋진 싱글, 골드 미스, 플레티넘 미스 등 당당한 독신이 많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평범한 삶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165쪽)

라고 하는데,

요즘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것도 '평범한 삶'이지만,

'멋진'이 됐건, '당당한'이 됐건, 설혹 '찌질한'이란 수식어가 붙더라도 그 또한 평범한 삶이 될 수도 있다.

 

주변을 인식하고 소심한 성격에, 안달을 하고 사는 순간,

자신을 들볶는 순간, 찌질해지는 것이고,

그것 또한 평범한 삶이어서 위로가 되는 것이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안해보던 많은 일들을 아이를 위해 하며 사는 삶 또한  다른 의미로 평범한 삶이어서 위로가 되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삶의 매순간순간이 때때로 찌질하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그게 나의 또 다른 모습이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가슴 뜨뜻해져 오는 것이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여러 부류의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나처럼 나이 마흔을 넘긴,

직장 생활을 하는,

섬세하고 소심해서 마음이 안달루시아를 넘나드는 사람에게는 특히 무한 위로가 될 것이다.

 

사실 난 이 책을 만나기 전에,

이 책의 저자 로빈순 님의 블로그(=>링크)를 먼저 만났었다.

기분이 꿀꿀할때면 블로그의 글들과 그림을 혼자 훔쳐보면서 낄낄거리다 보면 나아지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로빈순 님이 요즘 좀 그러하신가 보다.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반짝이는 글을 쓸 수 있다니~.

스스로 반짝이는 삶도 멋지지만,

더불어 같이 밝아지는 삶 또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로빈순 님이야말로 어떻게 해서 더불어 반짝일 수 있는 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글은 로빈순 님의 블로그에서 업어왔다.

나에겐 통치방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의 남편 또한 재미도 없고 멋대가리도 없지만 내게 사기친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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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17 20:17   좋아요 1 | URL
가끔 사람을 악의 길로 인도하는 ‘독약‘ 같은 책도 있어요. ^^;;

양철나무꾼 2018-04-18 09:49   좋아요 0 | URL
전 왜 사람도 나쁜 남자가 더 끌리고,
책도 독약 같은 책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인지, 원~--;
(퍽=3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는 소리. 나 지금 뭐래니? 응?)

cyrus님이 권해주시는 책은 독약이라도 마셔볼 의향 있습니다~^^

세실 2018-04-17 21:44   좋아요 0 | URL
마음이 안달루시아...ㅎㅎ
재미 없고 멋대가리없는 남자! 우리집도 추가합니다.

양철나무꾼 2018-04-18 09:55   좋아요 0 | URL
전 겉으로는 매사에 의연한척 하는데,
속으로는 안달을 할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안달을 표현하게 되구요.
요즘은 아들이 좀 컸다고 아들에게까지 안달을 할때가 있는데,
아들 유전자의 반은 아빠에게서 비롯되어 그런지 어떤지,
재미 없고 멋대가리 없기로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세실 님 댁도 그러하시다니,
세실 님이랑 끈끈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거 있죠~^^


AgalmA 2018-04-18 05:11   좋아요 0 | URL
머리 복잡할 땐 그림그리기, 트랜스 음악에 맞춰 춤추기, 미뤄뒀던 영화 보기, 만화책 보기 등등이죠!
그림이 나와서 이 책 보신 건가 보다^^

양철나무꾼 2018-04-18 09:59   좋아요 0 | URL
네~, 권해보겠습니다.
전 머리가 복잡할때는 뜨거운 물에 몸을 푸욱 담그는 목욕을 한 후,
독한 술을 한잔 마시고,
아무 생각 안하고 자는게 좋더라구요~^^

네, 그림체가 예뻐서 이 책 본 거 맞습니다.^^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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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이 책을 올려놓았더니,

지나가던 직원이 보고는,

'이젠 라틴어까지 배우려는 것이냐'며 혀를 끌끌찬다.

그 직원이 보기에도 내가 여러 언어를 건드리기만 하는 꼴이 기가 찼었나 보다.

내가 펼쳐놓기만 하고 수습을 못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기는 하지만,

그 어렵다는 라틴어에 함부로 손을 댈 정도로 들이대지는 않는다.

'라틴어수업'이라는 제목을 빙자한, 한동일이라는 분의 삶의 흔적, 발자취 정도 되겠다.

 

사실 이 책이 처음부터 재밌지는 않았다.

아주 반듯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바른생활 교과서를 보는 느낌이었달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예전 강의 내용을 정리한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입말과 글말은 체감 온도가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책의 중반쯤을 읽다가 문득 저자의 양력이 떠올랐는데,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일뿐만 아니라, 신부님이셨던 것이다.

이 분이 사제복을 입지 않고 일반 복장을 하셔서 그런걸까.

깨달을 새가 없었는데,

문득 문득 성직자 같은 이미지가 엿보였었는데,

성직자였다.

책의 후반부쯤 일반 복장을 하는 이유가 나온다.

 

강의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책에서는 라틴어 공부 자체보다는,

우리가 알고있는 단어나 숙어의 의미나 뉘앙스 같은 걸 알기 쉽게 풀어낸다.

라틴어가 갖는 언어적 특성 따위가 배어있는 인생론에 가깝다.

 

그런 라틴어의 특성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측면을 든다.

우리가 사용하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법률적 표현인데,

'하지 마라', '주의해라'와 같은 명령형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45쪽)

 

'라틴어의 고상함'을 얘기하면서는,

문학적, 언어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여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한데,

라틴어가 그런 언어라고 얘기한다.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여, 오해가 생기고 소통이 되지않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말은 곧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 책이 재밌지 않았던 이유는,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표현하는 부분과,

공부를 습관이라면서 꾸준히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게 좀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한때 너무 공부만 했고,

그리하여 엉뚱(=엉덩이가 뚱뚱)하기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자신이 있는데,

하지만 다시 공부를 하라면 그건 또 완전 싫다, ㅋ~.

 

그러면서 '하비투스'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들려준다.

'습관'이라는 뜻 외에도 '수도사들이 입는 옷'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수도사들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기도를 하고 노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두 일괄적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여기서 '습관'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단다.

 

공부하는 습관에서 그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하는 걸 중요시하는데,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게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는게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모든 일을, 내지는 모든 공부를 자신이 다 할 수 있다고 하고 깔고 앉아 뭉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라틴어의 뜻을 설명해주는 것도 쏙쏙 들어왔는데,

'Sacer(사체르)'라는 단어에 '거룩한'이라는 뜻과 '저주받은'이라는 뜻도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단어라는 것이다.

가끔 만나게 되는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이 '저주받아라'라는 욕설을 담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몰랐던 그 말의 뉘앙스를 명쾌하게 알게 되어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꾸준히 산책을 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점.

공부도 꾸준히 하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산책을 한다는 데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만든달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마치 폭발 직전의 폭주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필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상처가 오히려 그런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되어주었습니다. 멈춰 서서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으니까요. 그래도 때로는 '이 간이역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이 간이역을 지나고 또 지나면 제가 닿을 종착역도 어디쯤인가 있을 겁니다.(259쪽) 

 

이러저러한 라틴어 격언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지금의 내 마음가짐과도 닮아서 좋다 싶었던 건 이 문장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272쪽)

 

malo가 인도 유럽어로 '나쁜'을 의미한다는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재즈보컬리스트 '말로'도 그러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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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0 16:00   좋아요 0 | URL
라틴어가 많은 유럽어의 모어가 된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저도 라틴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가지지만 현실은 쉽지 않네요 ^^:)

양철나무꾼 2018-04-12 08:54   좋아요 1 | URL
전에 나폴리4부작을 읽으면서 이탈리아는 라틴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었었는데,
한동일 님의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가를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라틴어 한번 배워보세요, 멋있으실거 같아요.
전 공식에 딱딱 들어맞는 그 점이 잼날것 같지만.
현살의 저는 라틴어는 고사하고 일본어도 히라카라에서 늘 제자립니다~--;

서니데이 2018-04-10 16:03   좋아요 0 | URL
이 책 제목이 라틴어 수업이라서, 라틴어교재라고 생각하셨나봐요.
저는 책 내용소개를 먼저 읽어서 그렇지는 않았지만, 아마 제목부터 보았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요.^^;
여긴 바람이 정말 세게 불어요.
양철나무꾼님도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8-04-12 08:59   좋아요 1 | URL
아마 저 직장동료는 제가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여러가지 책을 (공부는 안 하고) 사들인 것을 보아서 더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엊그제 집에 가면서 깜. 놀.했지 뭐예요.
차 바퀴가 도로면에 붙어있는게 아니라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보니까 인천 쪽은 더 심했나 보더군요.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듯 평화로운 아침입니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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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 책이 삶을 살아가는 얘기일 줄로 알았다.

살아가면서 병을 얻게 되고,

그 병을 얻은 채로 치료받고 회복되는 과정에 관한 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아픈 몸을 살다'라는 제목도 참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저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얘기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의사라는 특수한 신분인 채로 아프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아니 절대적으로 일반인의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병에 걸리게 되어, 검사(?)-이 책에는 조사라는 말로 나온다.-를 받고, 화학적 요법을 취하고, 그런 과정에서 대하게 되는 의사와 의료인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자신이 어떤 느낌을 받았고, 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이건 저자가 의사였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 지금 이 책을 통해서 라도 뭐라고 투덜거릴 수 있는 것이지,

일반인이었으면 꿈도 꿀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 모든 얘기를 이끌어 나가기 이전에,

저자가 미국 의사라는 것과,

미국의 지독한 의료보험제도에 대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는 살아 남아 지금 70세가 넘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바다 건너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료보험제도나 의료윤리 따위가,

그게 한명의 의사이자 환자 입장에서 어떻게 느껴졌는지 따위가, 궁금한게 아니고,

지금 현재 이 땅에서,

병이 걸렸거나 병이 나서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한번쯤 주목했으면 싶어서 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을 한번쯤 애기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에 나오는 용어들이 어렵거나 생소한 단어는 아니지만,

의학 용어가 되는 순간 다른 뉘앙스로 해석되는 것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하나만 예를 들자면 '사회적 역사'라고 번역한건 social history 정도 될 것 같다.

이런 경우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만으론 부족한 것 같은데,

영어를 곧이 곧대로 해석했을때와,

의학용어로 취급하여 그 규칙대로 번역했을때,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의 내용들은 좀 모호하게 둥글려진 느낌이 든다.

 

또 한가지 영어권 번역을 하면서 종종 문제가 되는,

무생물 주어에 관한 문제,

여기선 질환을 주어로 놓아 능동과 수동의 문제로 번역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앞에서 언급한 의사는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이루 이어질 드라마의 각본을 짰다. 내 몸 안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관람만 하도록 객석으로 보내졌다.(88쪽)

 

위 문장은 좀 아이러니컬 한데,

주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조사를 해봐야겠네요'라고 할 수 있을텐데...

'조사가 있어야겠네요'가 되는 순간,

주체조차 모호해져서,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조사'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모호한 존재가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살아있는 몸이 아픈 몸이 되는 순간, 생물(=생명체)이 무생물이 되는 듯 여겨진다.

 

암튼 이 책에는 아픈 사람들이 겪게 되는 많은 감정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저자 아서 플랭크는 의사여서이면서 동시에 아픈 사람이어서 경험하고 크게 체감했을 감정들이다.

다른 아픈 사람들은 겪지 못했을 감정이라는게 아니라,

일반인들은 수동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어서 자각하기 힘들었을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미국의 경우라서 그런것인지,

저자 아서 프랭크가 의사여서 자신의 질환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내 주변의 얘기는 아닌것 같다.

내 주변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경우 병 앞에선 소심해질 수밖에 없고,

본인이 느낄때쯤엔 일이 많이 진행되어 버려 손 쓰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책에서 읽을만 했던 부분은 '개정판 후기'였다.

 

의료종사자들이 언제 좌절감을 느끼고 언제 자부심을 느끼는지 들었고, 이들의 옹졸한 면과 고귀한 면 모두를 관찰했다.

ㆍㆍㆍㆍㆍㆍ

심하게 아픈 환자에게는 의료인들의 말과 행동 전부가 처방되는 약과 수술만큼이나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의료인들의 업무는 대부분 너무 빡빡하게 짜여 있어서 이들이 환자의 혼란, 두려움 그리고 자존감 있는 인간이고자 하는 분투에 민감하게 마음 쓰기 어렵다.(237쪽)

 

이 책은 질병의 연구나 의료윤리 따위의 목적으로 쓰여지진 않은 것 같다.

'질병과 회복의 영적인 차원'이라고 했는데,

우리 말로 옮기면 간증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가 원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책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뭔가 특별한 의료서비스와 처우 따위를 원했던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이 사회에서 또는 병원에서 어떻게 치료받고 위로받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뜬구름 잡는 식으로가 아닌,

우리의 현실과 의료제도에 맞는,

보다 적절한 무엇인가를 원했었던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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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7 17:33   좋아요 2 | URL
병원의 군기문화에 길들여진 의료인들은 마음이 병든 환자입니다. 후배들을 괴롭히는 의료인들은 후배의 말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료인들이 진료 받는 환자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3-28 09:44   좋아요 1 | URL
음~, 너무 많은 부분을 아우르는 얘기라서 쉽게 답하기가 어렵네요.
게다가 제가 필드에 있는 사람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고 말이죠.

이 책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지, 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의사이니까,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거리두기에 힘을 주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3-28 08:42   좋아요 2 | URL
자신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본다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절실한 무엇인가가 저자에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양철나무꾼 2018-03-28 09:51   좋아요 2 | URL
이 분은 필드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아니었던 것 같고,
의료사회학, 의료윤리학 분야의 연구의였었던 것 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자신이 환자인채로 환자를 본다는 것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환자였을때의 경험을 살려 저술을 하고 강연을 하는 것은 또 별개인것 같습니다.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네요.
연의 어린이 표정이 참 풍부해요.
환한 것이 봄이 제 마음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3-28 09:5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아이여서인지 얌체공처럼 튀네요. 재미있으면서도 그게 생명력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니데이 2018-04-10 13:56   좋아요 0 | URL
오늘은 어제보다는 기온이 많이 올라갔고, 따뜻한 바람이 세게 부는 오후예요.
제가 사는 곳에는 지난주부터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붑니다.
점심 맛있게 드셨나요.
양철나무꾼님,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8-04-10 14:45   좋아요 1 | URL
어제보다 날씨가 따뜻해진 건 알겠는데,
점심 시간에 웅크려조느라 바깥세상 얘길 듣지못했네요.
그 동네 바람이 세게 분다구요?
울 서니데이 님 날라가면 안 되는데...^^

점심은 입맛은 없으나, 끼니에 이름을 정하느라 먹었습니다.
입맛 없다고 하기엔 좀 많이 먹었습니다~ㅅ!^^

서니데이 2018-04-10 14:50   좋아요 1 | URL
네. 날아가지 말라고 조금전에 긴급재난문자 왔어요. 바람 불어서 위험하대요.^^;
많이 드시고 기운 내셔서, 오늘 저녁에는 더 맛있는 저녁밥도 꼭 드세요. ^^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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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아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더니,

거리에 이쁜 화분을 놓고 피는 트럭이 있더라.

'이쁘네~'하고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똘똘한 애들은 다 골라가 버리고,

약간 어정쩡한 애들만 두개 남은거라,

그 두 개를 가져오며 봄맞이를 했다고 잠시 뿌듯하였다.

나는 시인 장석주와 장석남을 혼동한다.

그들의 문체라던가 시풍을 혼동하는게 아니라,

사람 이름 한끗을 혼동한다.

이 시집도 '주'인지 '남'인지 잘 모르고,

그래, 누구라도 상관없다...하면서 집어들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장석남이었다.

 

여린 눈을 가졌고,

꽃 밟을 일을 근심하는 시인.

 

아니나 다를까, 시집의 뒷표지에서 소설가 '권여선'은 그를 이렇게 얘기한다.

한때 그는 망명한 자였고 앓는 자였고 숨죽여 우는 자였으리라. 내가 그를 알기 전의 일이다. 내가 아는 그는 술 퍼먹고 무언가를 묻는 자였다. 그의 질문은 사소하여 철학적이었다.

내가 읽은 그는 시 속에서 웅얼웅얼 답하는 자였다. 그의 대답은 절박하여 미학적이었다. 삶과 시를 오가며 그는 자해하듯 자문자답하는 자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의 꽃겹 속에 갓 태어난 노인이, 노파의 얼굴을 한 연인이 있었다. 시인이 아닌 그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이제 그는 꽃 밟을 일을 근심하는데 이미 밟아놓은 후다. 그는 죄지은 대장장이, 녹아도 사라지지 않는 쇠를 응시하는 자이다. 이토록 사뿐하고 육중한 몸의 문답이 있을까. 이토록 눈부신 울화가, 이토록 뉘엿뉘엿한 돌파가 있을까. 아무도 이 어눌한 생을 사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영원히 쓰라고, 나는 근심스레 말한다.

 

이런 권여선의 뒷표지 글로도 충분히 좋은데, 해설은 신형철의 그것이라 더 좋다.

 

전에 '뺨에 서쪽을 비치다' 때도 느꼈던 것인데,

꽃밟을 일을 근심하였을 그의 섬세함이 느껴져서,

그게 철학이나 어쭙잖은 선문답의 형태를 띤게 아니라서,

묘한 설레임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좋았던 시가 여럿인데,

춘분인 어제 읽었던 '입춘 부근'이라는 시도 좋았다.

이 시의 일부분은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하였다.

 

입춘부근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쫒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이 시는 내게 생존으로 읽혔다.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은 것도 그러하지만,

밥을 먹느라 앉아 쉬던 것일지도 모를 기러기를 쫒는 행위로 이어진다.

먹는다는 건 살기 위한 일이지만,

삶이라는 건 발을 땅에 붙이고 있어야 이어지는 실존적인 일이 아닐까.

 

그 근원에는,

꽃만 피고지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러기도 철새여서 머물고 날때가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피어날 꽃들에 마음 환해지지만,

날아가는 기러기를 아쉬워하는 것 또한, 입춘부근, 그 무렵이다.

 

또 좋았던 시는 '파란 돛'

시는 좀 어려웠지만,

색깔의 선명한 대비가 느껴져서 좋았다.

 

파란 돛

 

바다는

어디서부터 가져온 파도를 해변에, 하나의 사소한 소멸로써

부려놓는것일까

누군가의 내부를 향한 응시를

이 세계의 경계에 부려놓는 것일까

 

바다는 질문만으로 살아오르고

함성을 감춘 질문인 채 그대로 내려앉는다

우리는 천상 돛을 하나 가져야겠기에

쉬지 않고 사랑을 하여

파란 돛을 얻는다.

 

'오래된, 오래되었다는 고백'도 좋았다.

 

오래된, 오래되었다는 고백

그에게 남은 말은 없고

 

서서히,

선반의 백자 항아리에 먼지가 앉듯이

말을 꺼내게 될 것인데

약간의 분홍빛이 섞인 억양으로

 

솟은 어깨에 펼쳐진 빛무리와

머릿결의 갑작스런 쏟아짐에 머물다가

종내 그에게 남는 말은 하나도 없이

나의 입술은 풀입처럼 마르고

날고기처럼 피 흘리리

 

이 밖에도 좋은 시가 많았다.

'사랑에 대하여 말하여주세요'도 좋았고,

'다섯켤레의 양말'은 오랫동안 입안에 굴려가며 읽었다.

시각적 잔상이 청각적으로, 아니 공감각적으로 바뀌는 묘한 경험을 했다.

 

늘 내뱉는 말은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손으로 써내려가는 문장들은 자연스레 둥글려지는듯 조심성이 없다.

내 조심성 없음을 가지고, 시인은 몸서리 치는 듯 하다.

 

다섯켤레의 양말

 

각색 양말을 빨아 방바닥에 널어놓고

나도 모르게 짝을 맞춰 그리해놓고

나는 그리해놓았다

전에는 없는 일이라 핸드폰으로 찍어놓고

나는 흐뭇하다

 

나의 디자인, 이 구성진 디자인

궁상각치랑 우 도레미 도레미

썰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내 낚시에 끝까지 걸려들지 않던 어린 날

참으로 아름답던 다섯마리 물고기의 유영을

나의 방바닥에서 본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양말 다섯켤레가 각 다섯 방향으로 널려 있다

나의 혀와 살아온 날들의 교감들이

또 미래의 그림자 같은 족적들이

수십만석의 농업으로 나를 닦아세우고 있는

이 만다라의 순간이 나는 싫지만

꼼짝할 수 없고 염주를 꿰 돌리며

양말을 빨고 난 후의 그 땟국몰이 혹

욕조 바닥 가장자리에 남아 있을 것을 염려한다

그것마저도 혀가 되리라

 

참으로 아름답던 다섯마리 물고기의 유영을

나의 방바닥에 풀어놓고도

나는 몸서리를 친다

 

이봄,

난 아지랭이를 밟을 일도 없으면서 날아오를 것 마냥,

꽃이 채 피기도 전에 꽃 밟을 일을 근심하는 것이,

마냥 수선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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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8-03-22 19:36   좋아요 1 | URL
‘이쁘네~‘ 하고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똘똘한 놈들은 다 골라가 바리고. ㅎㅎㅎ 제가 저런 스탈이라 크큭 웃었어요. 그래도
데려오신 것들도 충분히 이쁘고 봄봄합니다!

양철나무꾼 2018-03-23 17:44   좋아요 0 | URL
우리 찌찌뽕인거예요?ㅎㅎ
그렇죠?
봄은 그렇게 그렇게 오려나 봅니다.

그나저나 완전 기분 좋은 하룹니다.
저녁엔 MB구속 기념 파뤼를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