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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ㄲ님,
그러니까 님께서 수면제 대용으로 해주신 시집 처방은 감사하지만 실패예요.
세권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이 그랬어요.
그제도 다른 날처럼 잘 준비를 하고 누웠어요.
에어컨을 틀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열대야의 밤이면 우리 가족은 모두 안방에 모여 복작거려요.
아들과 남편은 에어컨 바람을 직빵으로 맞는 침대 위에서,
전 에어컨 바람은 싫지만 누군가와 살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오는 관계로, 발가락이라도 닿기 위하여 침대 발치의 좁은 공간에 스폰지 요를 깔고 솜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말이지요.
읽다가 잠 들 수 있도록 가벼운 시집 한 권을 골랐어요.
설렁설렁 넘기다가 소리 내어 읊기도 하고, 몇 편은 마음 속에 새기기도 할 요량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누워서 읽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나와 비슷한 파장을 만났다고 해야할까요?
그동안 비슷한 파장을 만나면 자석의 같은 극처럼 밀어낸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내 마음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던 더듬이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부르르 부르르 떨리는 거예요.
죄다 머릿속에 새겨넣고 싶었어요.
아니, 그동안 언어로 고착시킬 재주가 없어서 그랬지 이미 내 안에 내재되었던 감정들이라서 머릿속에 새겨넣고 말고 할것도 없었어요.
이쯤되자 유희경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찾아보고 싶었어요.
전에 글에서 상상했던 것과 영 딴판인 얼굴을 만난 적도 있는지라 조심스러웠어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적잖이 충격이었어요.
아무도 여자라고 못 박아 얘기한 적이 없지만, 시집 겉표지의 펜화를 보고도...전 여자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오늘 아침 단어>란 시집 제목을 보곤 아침과 연결되는 희망이나 햇살 따위를 생각했었고 말이죠.
아무래도 시인은 저처럼 움추러들고 숫기가 없는 사람인가 보아요.
'비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한편)'고 얘기하는가 하면,
'당신 발밑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당신의 자리)'라고 하기도 해요.
'그럴땐 몰래 아프기도 하다(버린 말)'고도 하고,
또,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표현으로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과 내통하고 있으니 말이예요.
이 시대는 어쩜 누구나 다 각자의 사정으로 아파하고 있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다 아픈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아픈 상처를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 용기인지도 모르겠어요.
환부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편이 되고 다독임을 얻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이젠 알겠어요.
저도 누군가를 애써 다독이고 위로하려 했으나 어긋나 본 경험이 있거든요.
내 자신을 그림자 속에 감추고,
우산 속에 젖어들지 않도록 가리우는 내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서도 마음이란 것이 전해질까봐 닫아거는 내가,
넘치거나 버거워하지 않고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 했었거든요.
그래서 시인의 '눈물, 비, 우산, 그림자'등 촉촉하고 습기를 머금은 단어들이 내게 달라붙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계속 젖지않을 것이고, 어둠에 물들지도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해요.
그리하여 못내 쓸쓸할 거예요.
다 좋아서 어떤 시를 골라야 할까 망설였어요.
그래도 이 시집을 선물해주신 ㄲ님과도 나누고 싶어 몇개 골라봤어요.
어쩜, 이 시집을 통째로 님께 선물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버린 말
버린 말 위에는 이파리 돋아나 흔들리고 꽃을 찾아내 피워 올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아래, 툭 던지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피가 놀고 거리에 찾아가 한없이 등지고 서 있다가 문득 돌아서는 버린 말 위에는 친구가 찾아오기도 하다 엿보는 사람들이 있고 애써 뒤적이는 사람들도 있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그림자를 날름대기도 하는 그럴 땐 몰래 아프기도 하다 아니오와 예 사이를 끈기 있게 망설이는 사람이 있으면 어깨를 툭 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무원처럼 춥기만 하기도 하다 꿈이 너무 많은 아이처럼 복도를 지나가며 어떤 소리를, 추억을 불러일으킬 괴음을, 그렇지만 쓸모없지만은 않은, 그런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있고 애써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지 않았는지 망설이는 버린 말은 인파를 향해 나 있는 테라스에도 앉아 있는 것이다
너가 오면
그렇게, 네가 있구나 하면 나는 빨래를 털어 널고 담배를 피우다 말고 이불 구석구석을 살펴본 그대로 나는 앉아 있고 종일 기우는 해를 따라서 조금씩 고개를 틀고 틀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오는 방향으로 발꿈치를 들기도 하고 두 팔을 살짝 들었다가 놓는 너가 아니 너와 비슷한 모양으로라도 오면 나는 펼쳤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 그때 나는 어떤 손짓으로 어떻게 웃어야 슬퍼야 가장 예쁠까 생각하고 그렇게 나, 나, 나를 날개처럼 접어놓는 너 너 너의 짓들 너머로 어깨가 쏟아질 듯 멈춰놓는 모습 그대로 아니 그대로, 멈춰서 멈추길 멈췄으면 다시처럼 떠올려 무수히 많은 다시 다시와 같이 나를 놓고 앉아 있었으면 나를 눕히고 누웠으면 그렇게 가만히 엿보고 만지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밋밋한 한 곳을 가리키듯 막막함이 그려져 손으로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대로 너를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이 타오름이 재가 된 질식이 딱딱하게 그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그건 너가 아니고 기실, 나는 네 눈 뒤에 서 있어서 도저히 보이질 않는 너라는 미로를 폭우를 폭우 쏟아져 내리는 오후처럼 기다려 이를 깨물고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물고 어떻게든 그러므로, 너로부터 기어이 너가 오고
같은 사람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같은 사람이라서
수천 수백 수십의
같은 사람이 살짝
웃는 거라고
두 뺨에 손을
두 손을 이마에
번질 수 있도록
내어주는 거라고
같은 사람이라서
눈을 감는 거라고
닿지 않는 이야기
---L에게
달이 있더라니 구부러진 뒤에야 밝은 줄 알았다 귀를 대고 한참 서 있었다 그저 아득하기만 한 그런 밤이었다 누가 손등을 대고 까맣도록 칠해놓은 그런
앉았다가 떠난 자리를 꽃이라 부르고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래, 누가 흔들고 지나간 것들을 모아 그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꽃이 다 그늘일 수밖에
있었던 말들을 놓아주었더니 스르륵 눈이 감겼다 감고 싶었다 그랬다고 손목을 놓아주는 건 아니었을텐데 스르륵 소리가 나고 눈을 감았다
그것도 소원이라고 휘청거리는 바람이 피었다 아무리 잡아도 허공이었다 허공에 대고, 울어놓은 자리마다 흔적이 생겼다 그 자리는 건들지 않았다 꺾을 힘마저 놓아버렸다
음, 쓰다보니 넋두리가 되었네요.
넋두리를 페이퍼도 아니고 리뷰로 올리려니 살짝 부끄러워 졌어요.
하지만 내가 이 시집의 평점에 기여하고 싶었어요.
별 다섯개를 꾹꾹 눌러주고 싶었어요.
이 글을 읽어주시는 그대라면, 이 시집을 읽으셨던지 또는 읽게되실 그대라면 제 마음을 알아주실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