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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4월
평점 :
시집 한권을 읽고 무한 감동을 받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나 보다.
유희경 시인은 언젠가 '오늘 아침 단어'라는 시집을 선물받아 읽게 되었는데,
그때 나와 감성의 파장이 비슷하다고 설레발을 칠 정도로 좋았었다.
('오늘 아침단어' 리뷰 링크==>)
그랬는데 요번 시집을 읽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걸 보면,
시인의 시나 감성의 파장이 바뀌었을리는 없고,
내가 무덤덤한 것이 나이들어가나 보다.
내 자신을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ㅋ~.
사람 사는 세상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지만,
연애 감정이나 사랑 얘기 따위,
직접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랑이나 사랑 그후에 오는 상실이나 쓸쓸함에 대한 얘기가,
아름답다기보다는 공허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사랑을 떼어내고 관계나 존재에 관한 것에만 집중하여 읽으려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다 보니, 마냥 어렵게만 읽힌다.
개인적으로 문지시인선의 표지 초상화를 좋아하는데,
지난 번 시집도 좋았지만,
요번 시집도 좋았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418/pimg_7451441771888194.png)
여백에 채색을 하여 얼굴을 두드러지게한 이런 기법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청 분위기 있고 시적이다.
시집은 내가 괜히 툴툴거려서 그렇지,
1, 2, 3부 제일 앞에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란 제목의 시로 배치하는 등,
기법 면에서도 산뜻했다.
시는 제목만 같을 뿐이지 전혀 다른 내용의 독특한 시다.
좋은 시가 여럿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시들이 좋았다.
무사
한 아이에 대해 쓰는 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 우묵한 저
물녘 아이가 길을 배워가는 그런 시를 나는 쓰고 있다 아
이가 내민 길고 가늘고 하얀 지팡이가 길고 가늘고 하얗
게 빛난다 그것을 본 적 없이 아이는 웃는다 나는 아이의
즐거움을 모르겠다고 적는다 아이의 뒤에서 선생은 구령
을 붙인다 하나와 둘 사이를 짚고 아이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라고 적은 문장은
지우기로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마조마하다 무엇이 무엇
인지도 모르는 것이 깨질 듯 종내 깨져버리지 않고 거기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너무 많
다 그런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
하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보이지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섣불리 얘기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 뿐만 아니라 간혹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볼때가 있다.
그 웃음이 너무 해맑아 부러우면서도 불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기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아이들은 웃음 외의 다른 감정들은 경험하지 못하였고,
때문에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웃음이나 즐거움은 내 기준으론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도 좋았다.
안과 밖
잎을 뒤집으면 거기, 살과 뼈의 사람이 있어 색 다 벗
겨지고 투명해지도록 울창한 한 계절 함께 나고 싶었네
숲을 심고 들어가 나무가 되고, 둥치가 되어 둥치마다 이
름을 새기고, 이름이 되어 고개를 들면 일렁이는 평생을
잇는 단서가 있을 거라 믿고 싶었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도 뒤덮여 썩어가는 것이 있어, 몸을 半 묻고도 다 울 수
도 없는 지금이 前生이지 나는 아무것도 적지 못하겠네
가는지 오는지 더듬어도 없는 흔적이어서, 그제야 뒤집
어도 보이지 않고 놓아도 가라앉지 않는 사람의 뼈와 살
이 거기 있었네
이외에 '놀라운 지시', '봄' 등 아껴읽을 시가 많았다.
소설이 됐든,
수필이나 자서전의 형태가 됐든,
아니면 시여도 좋고,
안으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글은,
그윽하고 웅숭깊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