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땐 세상을 잘 못랐었다.

국민(=초등)학교 땐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해서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 가고 잠도 안 자고 그러고 살 줄 알았다.

시인들을 향하여서도 비슷한 환상을 품고 있었는데,

시 속의 언어처럼 예쁜 말만 하고 시 속의 삶처럼 그렇게 예쁘게 살 줄로만 알았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고 삶을 살면서,

이젠 선생님들도, 시인들도,

환상을 품고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지지고 볶고 그렇게 그렇게 삶을 사는 존재들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당신들이 산 삶의 경험과 체험들을 함께 나누려고 선생님을 하고 시를 쓰는 것일 게다.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고기잡는 법을 알려줘야지 고기를 잡아줘선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알지만,

때론 함께 하는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걸 알고 실천에 옮긴 이들이 아닐까 싶다.

 

 

 

 

 집에 가자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6월

 

'김해자'라고하면 '데드슬로우'란 시에 익숙해 있던 나는,

요번 시집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알던 그 '김해자'가 맞나 하고 갸우뚱했었다.

시를 통해서 느끼게 되는 정서가 무게 잡지 않는 것이 가볍고 경쾌하지만,

그렇다고 태양을 향해 날아들어 소진하고 녹아내리는 밀랍인형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살아보니 뭐 별거 없더라 하는 달관의 경지에서 비롯된 가벼움 같은 것이었다.

시들도 그랬다.

어려운 말을 쓰거나  시적인 수사법을 일부러 구사한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느 시보다도 큰 감동과 진한 여운을 주었다.

니가 좋으면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평범한 일상이고,

그런 일상에서 포착해낸 평범한 단어들인데,

적재적소에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건 있어야 할게 제자리에 있는 거란다.

 

지그시

소나기 몇 줄금 지나간 어스름 옥수수 몇 개 땄지요 흘

러내리는 자주와 갈칠 섞인 수염, 아무렇게나 겹겹 두른

거친 옷들 한 겹 두 겹 벗기다 그만 그의 연한 병아리 빛

속 털 보고 만 것이네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

알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속내 만지고 만 것인데

요, 진안 동향면 지나다 왜가리숲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적 있어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왜가리들, 꼼짝 않고

있는 새들은 모두 알을 품고 있었죠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

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

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지그시 덮어주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랑

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온갖 생각도 지우고 지그시, 중얼

거림도 멈추고 그냥 지그시

'지그시'라는 시도 좋다.

시가 어쩜 이렇게 순하고 맑을 수가 있는지,

어떻게 이토록 여리고 보드러워질 수 있는지,

이 시를 생각하면 중얼거림도 노래가 되고, 중얼거리다 멈추는 것도 춤이 된다.

왼손이란 시는 또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왼손

오른손으로 김치찌개를 푸다 왼손에 엎질렀다

오른손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는데

글렀다, 오른손이 한 짓 왼손도 알아버렸을 게다

벌겋게 부어오른 자리가 쉬지 않고 욱신거리므로

생각해보니 다친 손은 대부분 왼쪽,

사과 깎다 칼에 찔린 것도 왼손 엄지고

못질하다 망치에 두드려 맞은 것도 왼손 검지

오른발이 미끄러졌는데도 부러진 건 왼쪽 손목 아니었나

내 짓 생각해보더라도 제 손으로 제 손 찍는 일

이 행성에선 드물지 않다 내가 잠시 살아본 오른손잡이

세상에선 칼 쥔 오른손에 왼손이 자주 베이고 피 흘렸다

상한 왼손에 성한 오른손이 약 바르고 방대 감아준다

할 일 대충 마친 오른손이 볼펜 잡고 글도 못 쓰는

왼 손을 잠시 바라본다 친친 감겨 입까지 틀어 막힌

왼손이 불뚝거리고 있다

합일

거기, 밖이 무너지고

여기, 안으로 삼켜져

눈 감는 음저를

거기까지 너였다,

여기까지 나였다,

경계가 차츰 무뎌지고 무너지다

문득 모든 말들이 끊긴다

하지 못한 말,

이미 한 말,

들이키고서야 합쳐지는 입과 입

여기서부터 검은 숲,

침묵이 범람한다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나조차 잊어버려야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너조차 잊어버려야 너에게 들어갈 수 있다

'합일'이라는 시는 '날선 울음'이라는 시와 닮았다.

'날선울음'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가진 것만 잃어버릴 수 있다

나인 것은 도저히 잃어버릴 수가 없다

가진 것은 더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지만,

체화하여 내 안에 들인, 나 자체는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잃어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욕심부리지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겠다.

 

김해자는 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수필도 멋지다.

수필이란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데,

그것이 시든 수필이든 간에,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서 멋진 것인가 보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김해자 지음 / 아비요 /

 2013년 7월

 

요즘은,

집 안에 쌓아둔 책을 정리하고 버리는데 집중하다보니,

책이 안 읽히고 비껴가기만 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겠지 싶어 집어든 책들이었는데,

책의 무게가 가벼웠을 뿐이었고,

의외로 진하고 강한 여운을 주는 책들이었다.

 

책구매를 최대한 자제하다보니, 알라딘 서재 마실도 뜨문뜨문이다.

오래간만에 책 마실을 다니다가 이런 책을 발견하였다.

아무리 자제를 해도 이런 시집의 구매까지 자제할 필요는 없고, 자제해서도 안 되지 싶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그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정여민 시, 허구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6년 8월

 

요즘 내가 열쉬미 듣는 앨범'페이퍼컷 프로젝트'

 

 페이퍼컷 프로젝트 - 1집 불공정연애
 페이퍼컷 프로젝트 (Papercut Project) 노래 /

 미러볼뮤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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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24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 분량이 조금 되어서 일까요 ..먼저 ,,,선 댓 후 감...하겠습니다.^^..

아무튼, 시인들은 존재의 감성특공대^^...혹은 감성 선발대....아닐까 싶어요..
유난히 삶에 대한 촉수가 민감한 감도가 있는 분들이니까요..

흔히 저처럼 무덤덤한 것들에게 까지 세밀한 농도의 감각 촉수를 내미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좋은 시가 많아서 엄지척!~

양철나무꾼 2016-08-24 16:18   좋아요 3 | URL
yureka님이 무덤덤하시다구요?
동의할 수 없습니다~ㅅ!

그럼 님의 사진이나 페이퍼에 매번 감동을 받는 전~
넘쳐나서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걸까요? 으허엉~ OTL

님에게 적절한 수식어가 생각났는데,
감정 깡패 어떠세요~ㅅ?
(자신을 과소평가한 벌입니다여~!ㅎㅎ)

yureka01 2016-08-24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감정 깡패..완전 웃었습니다..ㅋ 뭐 감정 말미잘 쯤 했으면 좋겠...촉수가 흐느적흐느적 ㅋㅋㅋ ^^ 덕분에 웃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양철나무꾼 2016-09-02 16:13   좋아요 0 | URL
이 한 몸 망가져 웃음을 드릴 수 있다면야, ㅋ~.

2016-08-24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2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얇고, 가볍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싸니까 많이 살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 문장에 오타가 있어요.

양철나무꾼 2016-09-02 16:16   좋아요 0 | URL
시집을 사면서 감성의 수혈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렴한 가격으로 감정적으로 호사를 누리는건, 시집이 으뜸아닐까 싶어요~^^

2016-08-2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9-0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쇳물 쓰지마라 에 실린 시인 제페토님 .. 오래전에 인터넷 찾아가면서 열심히 읽었었는데 시집으로 나와서 저도 너무 반가왔어요.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긴 하지만, 뉴스와 연결되어 있어서 더욱더 절절함이 느껴졌었어요~

저는 부모님이 선생니이셔서, 그런 신비감은 없었는데, 부모님(엄마만)이 선생님 같았어요. 마주치면 뭔가 잘못한 거 같아서 슬금슬금 피하고 싶은 ㅋ

양철나무꾼 2016-09-02 16:33   좋아요 0 | URL
제가 님을 어떻게 유추했느냐 하면, 리뷰 쓰는 문체 때문이었어요.
문장과 단락을 나누는 솜씨도 그렇지만, 길게 늘어지지 않고 간결하고 단정한 느낌.

부모님이 선생님이셨다고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님은 왠지 일상도 간결하고 단정할 것 같다는, 헤에~^^

짧게 쓰는게 더 힘든 저로서는 마냥 부러울 뿐이랍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