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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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하라리! 그가 우리에게 21가지 제언을 했다. 그의 제언들은 대부분 정확한 정답을 던져주기 보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다. 마치 현명한 교사와 부모가 학생과 자녀의 질문에 정답을 가르쳐주기 보다 스스로 더 많은 탐구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듯했다. 그의 책은 쉬우면서도 한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직업이 사라진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전에서 이세돌이 무참히 패배했을때,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충격적으로 느꼈다. 터미네이터를 떠올리며,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지구를 멸망시킬수도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커다란 혼란이 우리들 머릿속에 불어닥쳤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멸종시킨다는 설정이 다소 과장된 상상이라면, 인공지능 시대가 나의 직업을 위협할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직업이 사라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유발하라는 기본소득을 하나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육아와 같은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의 이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자를 중심에둔, 인간중심의 정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노동에 인간이 종속된 사회가 아니라, 어쩌면 인류가 그토록 원했던 '노동으로 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한 '노동 없는 시대'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동으로 부터의 버림받음'으로 느끼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우리가 두려움만 먼저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노동 없음은 축복일 수도 있다. 하라리가 예로 들고 있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는 일을 하지 않으며, 성경공부와 종교의식 수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백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말했던가? 노동이 사라지고, 노동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하는 시대가 사라지고, 진정한 '백수의 시대'가 도래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백수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백수로서의 창조성'을 우리는 지니고 있는가? 고미숙이 말하듯이,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펼쳤던 백수의 향연! 그 백수의 향연은 새로운 창조성의 발현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이 우리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100년후, 어떠한 삶이 펼쳐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면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며 새로운 창조성으로 전지구적 관점으로 새시대를 준비해보자.

 

2. 지구적관점에서 생각하라!

  우리 세계는 '문명의 충돌'을 겪고 있는가? 아니면 '문명의 교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유행하면서 이슬람 문명과 크리스트교 문명을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지구문명은 서로 다른 것 보다는 같은 것이 많다. 형제가 서로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많듯이, 우리 지구문명안에 이슬람문명을 비롯한 기독교 문명, 불교 문명 등의 다양한 문명이 있고, 이들은 형제라 주장한다. 갈등이냐 교류냐는 패러다임을 뛰어 넘어 '지구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라는 하라리의 주장은 탁월한 생각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민족', '국가'의 패러다임으로는 환경문제, 핵문제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민족'이라는 상상의 관념은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종교'는 어떠한가? 유발 하라리는 '종교는 민족주의의 시녀'라고 단언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랑과 자비, 평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자국의 영광을 위해서 타국을 무참히도 도륙하는데 봉사한다. 유발 하라리는 극우 기독교인의 가짜뉴스 또한 과감히 비판한다.

  지구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하지만, 우리의 머릿속은 아직도 '민족'과 '종교'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너무도 멀어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족'과 '종교'의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당신의 종교, 이데올로기, 세계관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무엇을 잘못했지요?" 라고 물으라고 한다. 이 물음에 심각한 잘못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하라리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말한다. 극우 기독교인들이 우리 민족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현실은 '종교가 민족주의의 시녀'라는 하라리의 주장이 가슴이 와닿게 한다. 극우 종교인들이 나에게 특정 종교를 강요한다면, 나는 유발 하라리의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의 종교는 인류에게 저지른 해악을 말할 수 있는지를....

 

3. 모든 것에는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호주를 여행하던 일본인이 GPS를 믿고 가다가 바다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본인은 GPS가 시키는데로 운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알고리즘에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이다. 알고리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인간의 비참함을 미리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모습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패하지 않는 결정을 위해서 알고리즘을 이용할 것이고, 실패를 두려워할 수록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갈 것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패는 학습의 한과정이다. 불필요해보이는 실패가 사실은 학습을 위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 없음의 쓰임을 인간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래교육이 알고리즘의 노예에서 벗어나, 알고리즘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실패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아야한다. 물론, 실패의 경험이 자산이 될 수 있으려면,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로 우리사회가 변모해야한다.

  모든 것에는 댓가가 필요하다. '디지털 독재', '커지는 불평등' 속에서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된다. 반면 인간은 다운그래드되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운전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컴퓨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어령 교수는 말과 경쟁하려하지 말고, 말에 올라타라 강조한다. AI와 경쟁하려하지 말고 AI에 올라타라한다. 알고리즘과 컴퓨터에 올라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미래사회는 축복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재앙일 것이다.

  미래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할 또다른 조건에는 무엇이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한다."라고 말한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가짜 정보도 범람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믿을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한다.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한다. 중요한 이슈라면 그것에 관한 과학적 문헌들을 찾아 읽는 노력도 필요하다. 공짜 무가지에 현혹되어 수구신문을 구독했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수구 신문은 아직도 살아남아 한국사회를 뒷걸음질치게했다. 진실한 언론에 돈을 지불하고 구독하고,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덧 이 사회의 꼰데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공짜 이메일 서비스와 동영상의 댓가로 '개인정보'를 내주는 것을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 비유하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화려한 구슬과 싸구려 담요를 댓가로 주고 온나라를 넘겨 받은 일화이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아프리카 원주민들 처럼 화려한 구슬에 현혹되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정보를 팔아 넘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메일 써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 각종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 나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않는 자연인으로 살라는 말인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4. 종교의 허구성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일침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조론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는 유대교를 믿고 있는가? 자신의 지식과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종교가 불일치할때, 유발 하라리는 어떠한 사고를 할까? 이 책에 비친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사실로 믿지 않는다. 하나의 믿음일 뿐이다. 심지어 시온주의자들이 "땅없는 사람의 사람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비판하기 까지 한다.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그가, 이스라엘 탄생의 원천인 시온주의를 비판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뿌리를 부정하는 말을 한다면, 대중으로 부터 몰매를 맞을 것이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그가 유대교의 효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부인권 사상'이 진실이 아니지만, 천부인권에 대한 믿임이 인류를 행복하게 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경전 내용이 진실이라 믿지는 않지만, 경전을 믿음으로써 유대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실에는 유발 하라리는 동의할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태도는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데까지 나아간다. 단지 합리화하는 도구라 말한다. '종교는 개인의 온순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아울러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서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종교에서 결혼 사실이 문제가 되고, 교회를 세습하고, 잦은 성추문으로 몸살을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유발하라리의 지적은 참으로 날카롭다.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조심하자. 종교의 탈을 쓰고 신도 위에 군림하며 신도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종교에 기생한는 자들을 조심하자.아울러,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신'이라면 섬길 수 있으나, '분노를 유발하는 신'이라면 우리는 그 신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특정 종교를 믿는 신도들에게 유발 하라리는 깊이 있는 경고를 하고 있다.

 

5. 유발 하라리! 그의 창조성의 원천은?

  유발 하라리! 그의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들을 모두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내가 생각하는 혹은 하라리가 밝히 창조성의 근원을 탐구해보자.

  유발 하라리와 미셸 푸코의 공통점을 아는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둘은 동성애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두사람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의 엄청난 저작들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철학을 넘어 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창조의 영감을 주었다. 유발 하라리도 20대에 방황을 했다고 한다. 타인과 다른 자신을 보면서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타인과 다른 자신을 긍정하면서 남들이 긍정하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되었다. 그의 명저 '사피엔스'는 이러한 고통의 산물이었다. 전병근 번역자는 유발 하라리가 '동성애'에 대해서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 않은 점이 놀랍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자신이 동성애자이기에 겪었던 방황을 끝마친 것으로 보인다. 끝나버린 방황 때문에 하나의 장을 할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방황을 마치고 유발 하라리에게는 나와 다른 남을 긍정하고, 남과 다른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창조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윤활류였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 자신이 말하는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는 '비파사나'라는 명상법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진리를 알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있을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비파사나'라는 명상법은 집중력의 비결이라 말한다. 아울러, 명상을 통한 자기 관찰의 필요성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21세기, 미래 기술 사회의 도래를 논하면서 전통적인 불교 명상의 효용성을 강조한점이 무척 흥미롭다. 문화재지킴이 혜문 스님이 책을 읽으면 모두 기억하는 비결을 참선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고용히 자신의 내명을 들여다보는 명상이 인간의 뇌를 집중시킨다는 사실이 놀랍다. 유발 하라리는 하루에 2시간씩 비파사나를 하며, 일년에 한두달 정도는 비파사나를 하기 위해서 수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나도 이제부터 명상을 통한 정신탐구, 자기애해를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겠다.

 

6. 사피엔스를 위한 제언

  사피엔스가 침팬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도덕성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침팬치 사회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침팬치를 우두머리 침팬치가 거두는 모습이 관찰된다. 승자독식의 시대, 노블레스 오빌리쥐가 지켜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비추어 본다면, 침팬치는 보다 도덕적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사피엔스가 특별한 이유는 첫째,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종교, 민족,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공유하는가가 우리사회를 바꿀수 있다는 말이된다. 과연 21세기를 준비하는 한국사회는 어떠한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승자독식의 신회를 믿으며, 약자를 짓밟는 자들을 위한 믿음을 공유할 것인가? 분단을 고착화시켜, 전쟁의 위험속에 살도록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고수할 것인가? 평화와 사랑을 위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21세기를 위한 한국사회의 준비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이다. 뉴턴이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올려다 보았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피엔스의 문명은 어느 특출한 사피엔스 개인의 결과물이 아니다. 집단 지성의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유해야할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깨어있는 개개인이 함께 우리사회를 깨어있게하는 담론을 만들어가야한다. 특정 보수 언론이, 특정 보수 세력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한다.

  이러한 사피엔스의 능력은 그들을 지구별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허구를 진실로 믿고, 집단으로 사고하는 무시무시한 사피엔스의 질주를 막을 수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관찰'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민족', '국가', '정의'가 인간을 고통스럽게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다. 좌와 우라는 도그마에 갖힌, '일베'들이 세월호 피해자들이 단식투쟁하는 현장에서 '폭식 투쟁'을 한적이 있다. 그들은 자식잃은 고통으로 시름하고 있는 이웃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자. 그것이 허구적 이야기의 노예가 되어 폭주하는 우리에게 냉정한 진실을 보게할 수 있다.

 

 

이제 유발 하라리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의 책이 나오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얇지 않은 두께의 책을 미친듯이 읽으면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려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길 기대한다. 이번 책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라는 말은 고 신영복 교수의 '변방에서'를 떠오르게했고, 세계 권력의 중심부에 있지 않은 한국이 새로운 창조성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했다. 또한 새로운 종이 출현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하라리는 나노기술 등의 조작으로 자신을 업그래이드하는 일에 섣불리 도전하지 않겠다고 한다. 새로운 종이 실패할 수도 있다. 지름길이 황천길일수도 있는 법이다. 새로운 21세기!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새로운 사회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새로운 기술의 주인이 되기 위한 능력을 길러 놓아야한다. 그러나 섣불리 새로운 기술을 적용했다가 불행한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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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1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변방에서, 하라리의 탈중심주의 공감합니다.
정희진의 탈식민주의도 떠오르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 2018-10-14 19: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석학들의 공통된 의견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붕붕툐툐 2018-10-14 2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너무 읽고 싶은 책이라 스포 당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읽지 못했어요~ ㅋㅋ
책 읽고 와서 이 글 읽을게요:)

강나루 2018-10-14 21:34   좋아요 0 | URL
^&^
하라리의 매력에 빠지셨군요
천천히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