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에서 나온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이라는 책이 있다. 옛이야기 그림책들을 조목조목 비교하고 살펴서 구전된 옛이야기의 화소들을 지나치게 생략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잘 담아냈는지, 글과 그림이 서로 소통하며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지 등등을 분석해 놓은 책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지만, 어떤 그림책이 제대로 된 그림책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꽤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를 다루면서 오누이가 똥이 마렵다고 둘러대면서 호랑이로부터 도망치는 대목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이 대목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용기로 호랑이와 맞서 처음으로 이기는 통쾌한 대목'이라면서 '옛사람들의 이야기철학, 삶의 지혜, 해학을 잘 느낄 수' 있으며 '공포와 웃음이 교차하는, 긴장미와 골계미가 절묘하게 배합된 대목'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서 '똥 마렵다고 둘러대는 대목'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대부분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대목이 들어간 그림책으로 시공주니어 본이 유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글과 그림의 부조화, '옛이야기 보여주기'와 '옛이야기 들려주기'의 차이가 낳은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호랑이는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림에서 해학과 익살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송수정이 그렸어야 할 그림은 달아나는 오누이의 겁먹은 표정이 아니라 어수룩한 호랑이와 기 싸움을 벌이는 오누이의 침착하고 당찬 표정이다. 그림으로 표현해야 할 분위기는 오누이의 마음속에 자리한 거대한 공포가 아니라 오누이와 호랑이가 벌이는 기 싸움을 어른들의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입말로 들으면서 아이들이 느꼈을 이야기판의 분위기다.'라고 꼬집고 있다. 
  
반면에 국민서관 본 <해님달님>'글과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룬 책,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책'으로 분석하고 있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를 잘 살려서 그림이나 글에 놀라울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다'고 하면서 '송재찬의 간결한 글과 디테일을 생략하고 민화기법을 응용한 이종미의 호랑이 그림은 하나로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다.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이 2009년 말에 출간되었는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다룬 부분은 <창비어린이> 2007년 봄호에 실렸던 글이다.  아마 그래서 2007년 이후에 나온 그림책들이 이 글에서 논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2009년 3월에 출간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김성민 글,그림/사계절)가 이 책에서 다뤄지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여우누이>도 같은 작가의 책인데, 사실 난 이 작가의 판화그림이 으스스하면서도 나름 귀염성이 보여서 좀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튼 이 그림책은 '똥이 마렵다고 둘러대는 대목'이 간결한 글로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국민서관 본에도 다른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림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기 손가락' 모티브까지도 담겨 있다.   

'아기 손가락' 모티브는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와 오누이의 젖먹이동생을  안고 가서 잡아 먹는데 '오도독 오도독'소리를 듣고 오누이가 "엄마, 뭐 먹우?" 하니까 "부잣집에서 콩 볶은 거 줘서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누이가 '우리도 좀 주우.'하니까 아기 손가락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원래 구전설화에서 오누이가 호랑이로부터 도망가려고 결심하는 것은 치마 밑으로 삐죽 비어져나온 호랑이 꼬리를 봐서가 아니라 호랑이가 던져준 아기 손가락을 보고서라고 한다. 이 그림책에서는 호랑이가 아기를 잡아먹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다만 호랑이가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를 안고 가는 장면만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한 가지 더 눈에 띈 것은 오누이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서 팔과 다리를 내어주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그림책에서 너무 잔인해서 그런지 이 장면을 아예 생략해버린 책들도 있고 아니면 이 장면을 글로만 이야기하고 지나가는데 이 책은 그림으로도 표현해 놓았다.  

 

 
이 장면은 엄마가 이미 팔다리를 호랑이게 주고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팔을 잃고 헐렁한 저고리 소매와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껑충 달려드는 호랑이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으로는 끔찍하게 상상되는 이 장면이 생각보다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충격일 수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위 책의 저자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머니의 몸이 조금씩 해체되는 과정은 매우 제의적이다. 오누이가 빛을 발하는 해와 달로 탄생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을 어둠의 제물로 바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중략).... 그렇기에 어머니의 몸이 잘려나가는 과정을 어린 영유아에게 들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유년기 이상의 아이들에게는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공주니어 본에서 오누이의 겁에 질린 표정과 크게 과장되게 그려진 호랑이가 문제가 되었었는데 이 그림책에선 어떨까.

똥 마렵다고 둘러대고 오누이가 도망치는 장면이다. 판화라서 절제된 색을 썼기 때문인지 이 그림책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톤으로 되어있다. 요란한 색으로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확대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망가는 오누이의 표정에서도 경계심은 느껴지지만 공포를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앞 그림 속 호랑이의 모습도 아둔해보이고 이야기 내용과는 다르게 그렇게 사납거나 무서워보이진 않는다. 오누이가 꾀를 잘 쓰면 어수룩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을만큼 헛점도 있어 맹수 호랑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골탕 먹여도 좋을만큼 만만해보이기도 한다.  
이만하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이야기라 그림에서까지 공포를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의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가 숨은 오누이의 모습이다. (왼쪽 그림에서 오누이 부분을 좀 더 크게 찍은 것이 오른쪽 그림이다) 어린 누이동생의 입가에서 미소가 번지고 있고 곁에 앉은 오빠의 얼굴엔 살짝 근심이 묻어난다.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며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냐고 묻는 호랑이는 충분히 멍청해보인다.   

글도 간결하다. 나쁜호랑이, 가여운 오누이 어쩌구 하는 구구절절 너저분한 설명도 없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약 이 책이 2007년 이전에 나왔다면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에 분명 좋은 예로 소개되었을 것 같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가 새롭게 패러디된 그림책도 있다.  <호랑이 잡는 도깨비>라는 책인데 '이형진의 옛이야기'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제목에서 눈치를 챈 분들이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과 호랑이의 입장이 바뀐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탐욕스러웠던 호랑이는 이제 피해자가 되고, 호랑이에게 쫓겼던 인간은 호랑이를 사냥하는 가해자, '인간'이라는 이름의 도깨비가 된다. 마을잔치를 도우러 간 엄마 호랑이가 '갑자기 튀어나와 번갯불 한 방'으로 목숨을 앗아가는 도깨비에게 희생당한다. 엄마 호랑이 가죽을 얻은 도깨비는 어린 호랑이 가죽도 얻기 위해 오누이가 있는 호랑이 집을 엄마 호랑이처럼 꾸미고 찾아간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구전설화처럼 인간도깨비는 젖먹이 아기 호랑이를 먼저 해친다. 이것을 본 누이 호랑이가 오빠 호랑이를 다그쳐 썰매를 타고 호수로 달아난다.
 

 

 

 

 

 


하지만 대나무를 갈라서 타고 오는 인간도깨비에게 잡힐 것 같아지자 누이 호랑이가 하늘님께 살려달라고 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호수의 얼음이 갈라지면서 호랑이 오누이는 차가운 호수에 빠져 죽고 인간도깨비는 허둥지둥 호숫가로 몸을 피해 도망간다. 죽은 호랑이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하늘님을 만나 억울함을 따지는데 하늘님은 '목소리는 들렸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단다'하면서 해와 달을 만들기로 한다. 원래의 이야기처럼  게으름뱅이 오빠는 해가 되고 바지런한 누이는 달이 되는데, 오누이가 환생해서 만들어진 해와 달은 단순히 빛을 밝히는 기능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호랑이 잡는 도깨비를 감시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빗대어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오만과 잔인함을 꾸짖는 내용이라서, 어쩌면 하늘의 해와 달도 이미 오래전에 호랑이 편으로 마음을 돌렸을 것 같기도 해서 가슴 뜨끔거리며 불편해지는 책이었지만 그 내용이 담고 있는 경고의 메시지는 의미있게 다가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원래의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는 달리 부지런하고 영리한 누이와 게으르고 둔한 오빠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아마 옛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상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이 좀 거칠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겨서 익살과 해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는 점 (인간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익살과 해학은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해와 달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는 바람에 좀 뜬금없었다는 점이 좀 아쉽다. 너무 어린 아이들에겐 적당하지 않을 것 같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충분히 알고 좀 심각하고 진지한 고통의 패러디를 소화할 수 있을 만한 적어도 초등이상이 읽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책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이담 그림/보리)다.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6.25 전쟁 이야기'라는 부제가 따라 붙은 이 책은 30년 전 6.25 때 죽은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의 영혼이 전쟁과 분단에 대하여 나누는 이야기가 우울하고 어둡다.  그리고 이 그림책 속에 들어있는 '해와 달이 결코 될 수 없었던 오누이 이야기'는 가장 슬프고 비극적이고 무섭다. 이 이야기에서는 호랑이가 두 마리 등장한다. 두 마리가 함께 엄마를 잡아먹고 오누이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앞문과 뒷문에 각자 자리를 잡고 서로 자기가 진짜 엄마라며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등골이 오싹하도록 으스스하며 긴장감이 극으로 치닫는다.

 

 

 

 

 

 

아이들은 서로 이쪽이 진짜 엄마라며 싸우다가 앞문 뒷문을 다 열어버리고 만다.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는 아이 하나씩을 물고 사라진다. 구해주는 하느님도 없고, 구전설화에서 볼 수 있는 익살과 해학도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힘을 모으는 방법,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하지 못 한다. 절대 강자인데다가 음흉스러운 호랑이를 당해내지 못 한다.   

 

 

 

 

 



이 이야기는 민족분단의 비극에 대한 은유다. 그림책 속 오푼돌이 아저씨의 가슴에서 30년 동안 흐르고 있는 피의 근원적 상처를 보여주고 전쟁으로 죽어 이 땅을 떠돌고 있는 아픈 영혼들을 위한 구슬픈 진혼곡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을 읽다보면 이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져 온다. 유난하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시끄러운 요즘의 작태를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지. 갑자기 산처럼 든든한 분들이 그리워진다. 그립지만 다시 뵐 수 없는 분들이 너무 많아졌다.  

옛이야기의 화소들을 확인하고 그 화소들이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 파헤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림과 글이 아이들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독자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좀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착각하는 일 없이 다시 확인하고 점검해서 그 가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 그 견고한 바탕 위에서 더 훌륭한 패러디가, 현대에 맞게 재해석된 이야기들이 쌓여갈 수 있는 게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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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2-10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이달의 당선작으로 강력 추천해요.
그림책 공부가 정말 필요한데 이 책을 선물로 받았으면서 여직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어요.ㅜㅜ

섬사이 2010-12-10 17:13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그렇게까지 마구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옛이야기와 어린이책>, 재미있었어요.
외국 그림책에 대한 논의들은 이루어지는 편인데
사실 옛이야기 그림책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쵸?

토토랑 2010-12-1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나 밖에 못하는게 아쉬울 정도에요~ 잘 보았습니다.

섬사이 2010-12-10 17: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토토랑님.^^

마녀고양이 2010-12-13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섬사이님.

페이퍼를 열심히 읽다보니, 조금 무서워져 버렸습니다.
몇년 전에 <그림 동화>를 뒤집어서 해석한 책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그런 비슷한 느낌인데여. ㅠㅠ. 으아, 아기 손가락.

하지만, 굉장히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에 대한 페이퍼 잘 보았습니다.

섬사이 2010-12-14 10:2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반가워요.
이것 참, 차려진 게 변변하지 않은 서재라
반가우면서도 좀 민망하고 그러네요. ^^;;
아무튼 정말 고맙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뭐지???)
 

마음이 가벼웠다. 읽어야할 책이나 준비해야할 생각 없이 만남에 대한 기대만 안고 가면 됐으니까. 백창우 선생님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는 '시인'보다는 '노래' 쪽에서 백창우 선생님의 존재를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되고>라는 백창우 선생님의 시집도 있지만 송구스럽게도 우리집 꼬맹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라는 백창우 선생님의 노래집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받아보는 <창비어린이> 속에서 손글씨 그대로 인쇄된 백창우 선생님의 글과 악보를 봐왔기 때문인지 '시인'보다는 '노래 만드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꽃은 참 예쁘다 / 풀꽃도 예쁘다 /
  이 꽃 저 꽃 저 꽃 이 꽃 /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이 짧은 노래말은 때때로 내게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해서
  놀이터 아이들이 모두 꽃처럼 예뻐 보이게 만들고
  나를 여유롭고 너그럽고 밝은 사람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이 노래집을 이웃집 일곱살짜리 남자아이에게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는 이 노래집 속에 등장하는 '귀봉이 형'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다. 

 '귀봉이 형은 좋겠네 / 날마다 낚시하니까
 귀봉이 형은 좋겠네 / 날마다 물가에 나가니까 
 귀봉이 형은 좋겠네 / 귀봉이 형은 좋겠네
 날마다 물가에서 물고기들과 노니까 ' 

아마 노래에서 느껴지는 '귀봉이 형'의 빛나는 놀이의 자유가 부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노래집 속엔  잊고 있던 아득한 동심의 세계가 재미있고 신 나게 담겨있어서 꼬맹이와 나의 애창곡이 된 노래가 많다.  <맨날맨날 우리만 자래>라는 노래집에도 유치원 아이들의 귀여운 동심을 엿볼 수 있는 노래들이 많은데, 이 책 뒷 부분에 소개된 '카주'라는 악기를 보고 낙원악기상가에 가서 꼬맹이에게 그 악기를 사준 적이 있다. 대여섯살 아이가 쉽게 가락을 연주할 수 있는 참 착한 악기라서 한동안 얼마나 재미있고도 시끄럽게 불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러니 백창우 선생님이라는 분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목소리는 어떨까,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하니 설레기도 했고.   

백창우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셔서 준비하시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스누피였다. 생각보다 연세가 좀 있어 보였고 (나중에 보니 나보다 8살 위였다), 단발 스타일의 머리, 어쩐지 담배와 커피를 즐기실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자켓을 벗으시자 스누피 티셔츠가, 내려놓는 가방도 스누피 가방, 가방에서 꺼내놓는 파일도 스누피 파일, 볼펜도 스누피 볼펜, 기타에도 스누피가. 선생님의 소지품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스누피 덕분에 선생님에 대한 낯설고 어려운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선생님이 어렸을 적 헤럴드 영자신문에 연재되는 스누피를 무척 좋아하셨고, 지금도 스누피는 선생님의 오랜 친구같은 느낌이라 스누피가 들어간 물건과 인형들만 보면 구입해서 식구처럼 데리고 지내신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감성을 잘 간직하며 사는 분인 것 같다. 나도 어릴 적에 '캔디'며 '빨간 머리 앤'에 열광한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내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엄마들 마음에 '시심'을 깨워보자시면서 '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며 한 줄 짜리 시를 예로 들었다.  

'너무 길다' 

기타 반주를 곁들여서 낭독해주신 단 한 줄의 시,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가 쓴 시라고 한다.  '제목이 뭘까요?'하고 물으시는데 다들 어안이 벙벙. 밤, 넥타이, 국수.... 등등의 대답이 나왔는데 모두 '땡!' 정답은 '뱀'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뱀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른 생생한 느낌이 담긴 시라고 하셨다.  

그럼 두 줄짜리 시.  

'시계 세 개가
제각기 제 길을 간다' 

백창우 선생님의 시다. 한 번 시계를 사면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시간을 다시 맞춰놓는 일이 없어서 어느 날 무심코 보니까 방 안에 있는 시계 세 개가 모두 시간이 제각각이더란다. 그래서 나온 시라고.  

선생님은 세 줄 짜리 시로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네 줄 짜리 시로 아이들이 지은 '감자꽃'이라는 시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시들을 듣고 있다가 어느새 엄마들은 '시'에 대한 경계심을 슬쩍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살아오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잊었던 마음들이 있었다. 그 잊었던 마음들이 노래 속에, 시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스스로 뻑가는 일' 하나쯤 갖고 살라고 하셨다. 그래야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세히 살피는 눈'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래야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을 예쁘게 바라볼 수 있다고. 말썽장이 아이일수록 더 자세히 잘 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 그 아이의 예쁜 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많이 아는 아이로 키우기 보다는 많이 느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아이의 미래를 담보를 현재를 차압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아무 것도 아닌 엄마'가 되지 말라고,
엄마도 자기만의 삶을 따로 가져가야 한다고,
하셨다.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참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예쁜 마음도 내가 가진 잘못된 거울로 비춰봤기 때문에 일그러져 보였던 적도 많았을 것이다. 엄마인 내가 더 커지고 넓어져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는 '어린이 음악 박물관'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하셨다.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거기서 가족들이 함께 와서 들을 수 있는 콘서트도 열고, 꼭! 잔디밭에는 '들어가도 됩니다'라는 팻말을 세울 거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아이들도 꼭 '꿈'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 '꿈'이 꼭 이루어질 거라 믿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정말 마음이 말랑말랑 따끈따끈해지는 시간이었다. 파주출판단지 아시아출판정보센터에서 내년 4월까지 백창우 선생님과 이태수 선생님이 함께 하는 상설전시가 열린다고 한다. 꼭 가볼 것을 약속했다. 전시제목은 '백창우 이태수의 조금 별난 전시회'. 책고르미 엄마들이랑 한 번 뭉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육잠스님의 '생명불식전'도 소개해주셨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고난 바로 그 다음 날, 책고르미 엄마들이 인사동으로 출동했다.  

  

서예작품과 서화가 함께 전시되고 있었는데 단아한 듯 하면서도 힘차고 독특한 서예작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전시된 서예작품들 중에서 '莫問收穫 但問耕耘 (막문수확단문경운; 수확은 묻지 말고 다만 밭갈고 김매는 일만 묻는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읽는 순간 가슴이 뜨끔. 성급히 일을 이루려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지라, 하루하루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서둘지말고 해나가라는, 나에게 딱맞는 맞춤형 경구였다. '생명이 있는 것은 쉬지 않는다'라는 뜻의 生命不息이란 말도 참 좋다.  

'생명불식전'을 보고 바로 옆에서 열린 '세계의 책 전시회'였나, 하는 것도 봤는데 처음으로 갑골문자를 실제로 봤다. 가로세로 1mm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도 보았고, 옛지도며 파피루스, 죽간들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니어처 박물관'도 찾아가봤는데,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민망하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음, 작업실 옆 공간에 작품들을 전시해놓고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한 작은 전시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별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정교하고 예뻐서 다들 놀라워했다. 특히 한 엄마는 중학생 딸이 이런 미니어처를 무척 좋아한다면서 나중에 딸과 함께 다시 와봐야겠다고 했다.   

 

 

 

 

  

  

 

 

 

 

 

 

 

 

인사동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경인미술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아이들 올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돌아왔다.  스스로 뻑 가는 일 하나씩 갖고 사는 '자뻑클럽'을 만들어 볼까, 그럼 '자뻑클럽' 회장은 누가 좋을까, 아이들과 남편을 내려놓고 잠시 나만의 세계에 살짝 들어갔다 나온 느낌에 엄마들 모두 가볍게 즐겁고 행복했다.  

백창우 선생님, 다음에는 꼭 '조금 별난 전시회'에 가서 선생님의 애장품 스누피들과도 꼭 눈맞추고 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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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2-0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간 가지셨네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셨죠? 하하~ 많이 부럽지는 않아요. 왜냐면, 백창우 선생님은 재작년에 우리지역 행사에 오셔서 노래를 듣고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었거든요.^^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참 좋아요~ 구입하고 이벤트 당첨돼 두 개여서 하나는 이웃집 와일드 보이에게 선물했더니 아이도 엄마도 너무 좋다고, 또 다른 이웃에게도 선물했더라고요. 좋은 건 아이들도 다 알아요~ ^^

섬사이 2010-12-09 19:49   좋아요 0 | URL
저는 사인도 못 받았어요. 왜 백창우 선생님 책을 챙겨갈 생각을 못 했는지!!!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정말 좋지요?
굴렁쇠 아이들 중 하나가 지난 여름에 도서관에 와서 일주일 동안 6~7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준 적이 있어요. 중학생인데 얼마나 의젓하던지. 꼬마들이 형이라고 얼마나 잘 따르며 노래를 익혔는지 몰라요.
우리집 꼬맹이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아쉽게도 함께 하질 못했다는...
백창우 선생님의 꿈이 꼭 빨리 이루어졌으면 정말 좋겠어요. ^^

fallin 2011-01-14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신했을 때..백창우 선생님 CD를 즐겨 들었어요. 주변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
이뿌고 고운 음악만큼 아이들에 대한 고운 생각을 하시는 분이였군요..
반갑네요 ^^

섬사이 2011-01-19 13:29   좋아요 0 | URL
동심을 간직한 어른이시죠.
아이들에게 그런 어른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이지, 싶어요.
백창우 선생님의 cd는 주변에 선물하기 참 좋은 것 같아요.
임신했을 때 태교 음악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네요.
 

지난 가을 '그림책으로 만나는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도서관 안에다 책전시 코너를 작게 만들었는데 벌써 12월. 가을 책 전시, 문닫을 시간이 된 것이다.  

겨울 그림책들을 모아서 전시를 할까 했는데 12월에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크리스마스가 아니던가. 그래서 12월에 크리스마스 그림책 전시를 하고 1월에 겨울 그림책 전시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외서 빼고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그림책으로 뽑은 목록이 59권이다.  

전시제목을 '그림책으로 만나는'시리즈로 나가자는 다분히 게으른 발상으로 '그림책으로 만나는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1월엔 '그림책으로 만나는 겨울'이 되겠지.)   

 

 

 

 

 

 

 

가을엔 방화동 길꽃 어린이 도서관에서 소개해주신 어르신들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짚으로 만든 잠자리, 짚공, 계란꾸러미 등등으로 꾸몄었는데, 이번엔 색지를 가지고 눈 결정체를 만들어 낚시줄로 매달았더니 반응들이 꽤 괜찮았다.  내가 봐도 괜찮은 것 같아서 우리집 거실에도 몇 개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크리스마스 그림책들을 찾아보자면... 

 

 

 

 

 

  

 

 

 

    

 

 

 

 

 

 

 

 

 

 

 

 

 

 

 

 

 

 

 

 

 

 

 

 

  

 

 

 

 

 

 

 

 

 

 

 

 

 

 

 

 

 

더 찾아보자면 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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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2-0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관련 그림책들이 엄~~~~청 많네요.^^
읽은 건 겨우 10권 쯤...

섬사이 2010-12-09 19:52   좋아요 0 | URL
예, 어마어마해요.
개인적으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가 빠져서 좀 서운해요. 번역본이 <북극으로 가는 기차>던가? 해서 전집으로 묶여있는데 다니는 도서관에선 전집류를 구매하지 않는 편이라...
저도 다 읽지는 못 했어요.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이 기회에 차근차근 한 권 한 권 읽고 분류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
 

 지난 번에 독서모임에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었다. 그러고 나니 뭔가 괴테의 문학작품으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아서 집에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어 들었다. 사실은 <괴테와의 대화>라는 책을 읽어볼까 했는데 워낙 분량이 많은 책이라 기권. 

중고등학생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는 사랑이야기 치고 참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한창 유행하던 하이틴 로맨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에 비하면 베르테르는 얼마나 초라했던가.  

이 나이에 다시 읽으려니 나의 풋풋했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살짝 감개가 무량해지는 듯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베르테르의 매력은 느껴지지 않고 점점 "베르테르는 오버쟁이~"라는 느낌만 확실하게 다가왔다. 질풍노도문학을 이끌었던 괴테의 낭만주의적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게 독서모임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슬픔'은 제대로 못느끼고 베르테르의 '오버'가 좀 안타깝기는 했다. 미안하지만 나 같아도 베르테르 같은 인물은 사양이다. 뭐, 베르테르도 나를 사양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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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학교때인가 국어선생님이 베르테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엄청 반해가지고 책을 읽었었는데 아주아주아주아주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읽으면 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 때 읽었던 지루함이 너무 생생해서(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지루했다는 느낌만이 살아있어요) 다시 읽어볼 엄두가 안나네요.
그런데 중고등학교때 읽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분이 여기 또 계셨군요! 하핫

섬사이 2010-12-06 11:31   좋아요 0 | URL
베르테르의 안티팬이 여기 또 한 분 계셨군요! ^^

마노아 2010-12-0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어요. 저는 무척 재밌었어요. 막 울면서 봤다능...
근데 지난 주에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당첨되어서 보러 갔는데, 베르테르가 롯데를 사랑했고, 그녀는 시집 갔고, 베르테르가 자살했다는 것 말고는 내용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슬펐어요. 흑... 뮤지컬은 좋았어요. 10만원자리 좌석을 공짜로 봤다는 것이 더 흐뭇했다는 게 맞을 테지만요. ㅎㅎㅎ

섬사이 2010-12-06 11:34   좋아요 0 | URL
젊은 베르테르를 읽으면서 좀 과장된 몸짓이 오가는 연극무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실제 연극에선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막 울면서 읽었다니, 저랑 너무 차이가 나잖아욧!^^
제가 감당하기엔 베르테르의 감정이 너무 넘쳤어요.
제 감성의 그릇이 너무 작나봐요..쩝~!!

비로그인 2010-12-04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들은 죄다 결혼한 여인들이군요.

섬사이 2010-12-06 11:40   좋아요 0 | URL
헉! 그런가요?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치명적 매력이 남아있는 유부녀라...
음....
그거 좋은 거죠? 아닌가?
뭐,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그게 자랑이냐? -.-)
 

 

코엘료의 우리 나라에서 몇 권이나 출간되었는지 찾아보니 대충 20 여 권이 되는 것 같다. 마니아층도 꽤 두터운 듯 한데, 난 <연금술사>랑 <순례자>, 달랑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코엘료의 작품들이 싫었던 건 아닌데, 글쎄,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코엘료의 문장들이 너무 그럴듯한 게 좀 부담스러웠다고나 할까. 마치 종교윤리도서를 읽고 있거나 까마득한 경지에 다다른 은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말씀 한 마디 놓치지 않게 조심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이 책은 <연금술사>나 <순례자>보다는 그 느낌이 조금 덜 했지만.

이 책을 독서모임에 추천한 분은 도서관 관장님이다. 관장님 말씀으로는 요즘 코엘료의 책을 보면 '코엘료도 이제 좀 기운이 빠졌구나'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 책이랑 <11분>은 엄마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욕망하는 식물>로 잠시 현기증을 느꼈던 엄마들이 비교적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한대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책을 읽어왔다.  

선생님은 이 책이 엄마들이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각자 이 책에서 찾아낸 주제를 말해보라고 하셨다. '고정관념 탈피', '틀의 파괴', '자기 존재감 찾기', '죽음에 대한 인식과 삶에 대한 욕구' 등등을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은 이 책이 근대 서양철학에 근거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면서 준비해오신 프린트물을 나눠 주셨다. 그 프린트물에는 인식론과 해석학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을 개념으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서양사상에 대해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문제제기를 하면서 서양철학이 자기반성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양성과 개별성을 인정하는 해석학이 대두되었는데, 따라서 해석학에서는 '보편적 결론'이라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선생님은 현대는 이성과 합리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고, 따라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세상에 대한 '나만의 눈', '나만의 인식'이 중요한 시대라고. 그리고 개별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서양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셨다.  
덧붙여 죽음에 대한 자각은 현대종교의 역할이고 세상은 아직도 사람을 똑같이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개인 하나하나가 모두 똑같아진다면 그 순간 자기의 존재이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가"는 질문을 던지셨다.  

너무너무 어려운 질문이었고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까지 '특별한 나'를 찾기 보다 '평범한 나'에 만족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냥 남들 틈에 눈에 띄지않게 살짝 '묻어가는 인생'이었다는 자괴감.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셨는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특별함'에 대해서 편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질문을 고쳐주셨는데도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다들 당황하며 자신만의 개성과 엉뚱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사람들을 만나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뭔가가 있기는 하다. 그걸 콕 찝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선생님은 책 속의 문장들 몇 개를 짚어주셨다.  
'중요한 건 옳은 답이 아니라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이니까.' (p.128) 
그리고 241쪽의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숲에~'부터 '자연의 순리에 역행합니다.'까지다.(내가 문장을 전부 적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내게 이 책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보충해 써놔야지!)
128쪽의 문장은 사람을 똑같이 만드려는 세상에 재단되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겠고, 241쪽의 이야기는 개인이 가진 '특별함'에 대한 글인 것 같다.
선생님은 이 문장들을 인용하시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세상과 같아지려는 고민과 닿아있는 건 아닌지 조심해서 살피라고 주의를 주셨다.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고 오해하는 부분이라면서 '자아'에 대한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주부들의 독서모임, 사실 가볍게 가려면 한없이 가볍고 쉽게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림하고 애들 키우느라 좁아져버린 주부들의 사고의 차원을 끌어올려주려고 매번 애써주시니, 선생님께 너무 감사하다.  

다음엔 노래하는 시인 백창우 선생님과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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