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어린이/청소년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내일이 어린이날인데도 아직 아이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에게 실바니안 인형과 가구들을 선물받은 딸은 이번에 실바니안 집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무심한 엄마는 이 페이퍼를 쓴답시고 모니터 속 책들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중.    

 

<강은 세상을 만들어요>   
기코 시토시 지음/ 김혜숙 옮김/ 학고재

4대강 문제로 온나라가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4대강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9명이 죽었다는데도, 보류되었다지만 분명 무슨 꼼수가 있을 것 같은 지류사업이 논해질 때에도 세상은 참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강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주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아이들과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맑고 산뜻한 수채화풍 그림과 각 페이지의 그림을 이으면 거대한 하나의 그림이 되는 구성도 눈여겨보면 좋을 듯.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설흔 / 창비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그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던 이옥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옥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그저 정조의 문체반정에 굴복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문체가 무척 여성적이라는 점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확실치가 않다.  
창비 청소년도서상 수상작품이라는 점에도 마음이 끌리지만 무엇보다 세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갔을지도 무척 궁금하다.

  

 

 

  <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
김향금 지음/ 김재홍 그림/ 열린어린이 

열린어린이에서 기획한 '그림책으로 만나는 지리 이야기'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거주지 이동과 가족 형태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사회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이 책은 단순히 '지리'에 대한 지식전달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들의 할머니 세대, 그리고 부모인 우리 세대,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대의 모습을 섬세한 그림과 설명으로 잘 담아놓은 것 같다.
너무 빨리 발전한 우리 나라. 그래서 아이들은 불과 50년 전의 모습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앞으로 문명의 발달 속도에는 더욱 가속이 붙겠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세대간의 삶의 변화를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 책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읽는다면 그것도 참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문학동네어린이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의 작가 김려령.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되는 책이다.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는데, 과연 어떤 이야기로 내 마음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만들어 줄까.  
책을 읽다보면 일상에 찌든 나를 위로하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온기를 전해주는 책들을 만나게 되는데, 책 소개글을 읽어보니 어쩌면 이 책도 그런 온기를 가진 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서니 브라운의 나의 상상미술관>
앤서니 브라운, 조 브라운 지음/ 홍연미 옮김/ 웅진주니어 

고등학생인 우리 큰애들이 어렸을 때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어린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좀 섬뜩하고 무서운 면이 없지 않으니까. 그런데 좀 커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꺼내 읽더니 "엄마, 이 사람 천재 아니야?"라고 물어오더라.
지금 일곱 살인 막내도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자라서 다시 읽는다면 큰애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 큰애들에 의해 '천재'로 불리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삶과 그림책 세계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보는 방법과 '모양 상상 놀이'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그림책을 완성해가는 과정까지 담았다니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일이 걱정이구나. 어디 나들이를 가자니 사람과 차들이 무섭고, 선물을 골라 사주자니 특별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내 맘 같아선 좋은 그림책 몇 권을 선물하고 싶지만, 아이 입장에선 장난감을 장만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을 놓치고 싶지 않을 터. 딸아이도 좋아할 것 같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하고, 두고두고 오랫동안 가지고 놀 수 있겠다 싶은 장난감들은 너~~~~~무 비싸고, 가격대를 맞춰서 사자니 내 아이에게 사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딸아, 좀 더 소박한 어린이날을 보내면 안되겠니?  나무에게 좀 미안해서 그렇지, 세상에 책처럼 좋은 것도 드물단다.      에구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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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5-0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려령 작가 책이 끌리네요. 6학년 아들내미는 어린이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아참 아빠에게 자전거 사달라는 주문은 했네요.
책처럼 좋은 것. ㅋㅋ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 1호 일껄요. 슬프다. ㅠ

섬사이 2011-05-06 07:05   좋아요 0 | URL
어제, 아이가 갖고 싶어하던 실바니안 이층집을 주문했어요.
아무래도 어린이날이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이 입장에선 더 과열되어도 손해볼 게 없다는 아이들 쪽 반론에 부딪쳤습니다.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선물해주고, 재미난 곳 데려가 주고 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정말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제각각의 개성과 꿈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할 텐데 말이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희망으로 2011-05-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애들은 골목에서 늦게까지 놀던 추억이 많지 않아 어른들에게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할 책이라 눈에 띈 책. 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는 그림이 궁금합니다. 김려령의 책이나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죠^^

섬사이 2011-05-11 08:23   좋아요 0 | URL
<동네 이야기>는 지리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아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다섯 권의 책들이 모두 정말 군침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쓰읍~)
어떤 책을 받아볼 수 있을지....
제발 저 다섯 권의 책중에서 선정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답니다.

 

아이들이 모두 제대로 학교며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달이다. 정신없던 겨울이 정리되는 느낌.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돌아왔구나, 하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딸이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청소할 땐 청소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빨래할 땐 빨래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밥을 먹을 땐 오직 먹는 일에만 충실할 수 있는 시간,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아무도 이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에 기뻐할 수 있는 시간..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니 내가 나만의 시간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너무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3월이면 공식적으로는 봄인데, 겨울동안 읽겠다고 했던 <안나 카레니나>를 3월까지 끌고 왔다. <안나 카레니나>가 거장이 쓴 작품이라고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건 인물들의 마음을 미묘한 변화까지도 참 잘도 묘사했다는 점이다.  

레빈은 결혼한 지 석 달째가 되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한 걸음마다 예전에 했던 공상에 대한 환멸과 뜻밖의 새로운 매혹을 찾아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를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어느 쪽을 향해서 갈 것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빈이 키티와 결혼한 후 자신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실제 결혼 생활이 다른 점을 기가막힌 비유를 써서 묘사한 구절이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씩은 다들 공감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이 투사된 인물같았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호감형이긴 하지만 너무 진지하고 반듯한 성격때문에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말하긴 힘든. 그에 비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두 사랑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로 수백수천의 난반사를 일으키니까.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어렵고, 끝난 사랑은 미치도록 아프고, 지나간 사랑은 늘 저만치서 아름답게 손을 흔들어대니까.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등장인물 전체가 반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3권 마지막에 레빈에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레빈의 농장에서 일하는 표도르라는 농부였다.  

"그야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저 자기의 욕심만으로 살고 있고, 미티우하 같은 놈은 그런 치입니다만, 그저 제 배때기에다 처쟁이는 짓만 하고 있습죠. 그런데 포카느이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길래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거야?"레빈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뻔하잖아요. 진리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뿐이에요.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리만 하더라도 사람을 모욕하는 짓은 하지 않으시니까 말예요..."

톨스토이에게 종교, 특히 기독교의 향이 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 권에 걸쳐 진지하게 물어왔던 질문에 대해 작가가 보여주는 해답이 좀 실망스럽기는 했다. 난 교회도 권력이며 종교와 신앙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성당에서 '냉담자'로 분류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교인들의 방문, 전화, 초대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건, 내가 종교생활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언정 신앙생활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내 아이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라'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일까.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이 마지막 문장들을 씁쓰름하게 읽어야 했다. 지난 겨울에 보았던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함께 떠올라서 이 마지막 문장들 사이사이를 배회하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정말 확신하며 눈감았을까.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영화와 소설 속에다 대고 작가에게 당신의 삶이 그랬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고 여기면서도 100년도 전에 죽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숨이 확신 속에서 거두어졌을지 궁금했다.  

봄기운이 스멀거리는 3월까지 <안나 카레니나>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 좀 무안했는데, 그러면서도 애써 아직 민들레를 못 봤으니 봄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정말로 민들레는 4월 6일이 되어서야 만났고, 난 봄이 오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은 거라며 좋아했다. 그동안 <안나 카레니나>를 다 못 읽은 걸 알고 민들레가 내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참 속이 깊은 민들레구나. 그래.. 민들레는 뿌리가 깊지.. ???? (뭐라는 거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신 기생뎐>을 다시 읽었다. 책읽기 모임때문에 읽었는데,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맛이 나는 것 같다. 같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는 것도 좋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책욕심때문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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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1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는 다시 읽고 싶어요. 그리고 몇년뒤에 또 다시 몇년뒤에 또 다시. 인용해주신 문장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섬사이님이 이렇게 쓰신걸 읽으니,

[하지만 두 사랑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로 수백수천의 난반사를 일으키니까.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어렵고, 끝난 사랑은 미치도록 아프고, 지나간 사랑은 늘 저만치서 아름답게 손을 흔들어대니까.]

소주 생각이 간절해져요. 뭔가 길게 쓰다가 다 지워버렸는데요, 섬사이님, 제 요지는 그거에요.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도 아니고 편집자도 아니고, 그저 그의 책을 읽은 또다른 독자에 불과하지만, 섬사이님이 안나 카레니나를 이렇게 읽어주셔서 고맙고 기뻐요. 안나와 브론스키와 그리고 레빈이 섬사이님의 몇개월을 함께했다고 생각하니 참 좋아요. 책들을 읽고 생각을 하고 이렇듯 글로 그것들을 표현해주시는 섬사이님이 좋아요.

그래서 민들레더러 제가 일러뒀어요. 섬사이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섬사이님이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그때 눈에 띄라고. 그거 제가 그런거에요.
:)

섬사이 2011-04-18 12:57   좋아요 0 | URL
어쩐지~~ 민들레가 어디로 꽁꽁 다 숨어버렸나, 했어요.
일본원전의 원자로폭발때문에 민들레도 방사능이 무서워 안 나오는 건가, 하며 남몰래 슬퍼했었다니까요.
다락방님이 시켜서 그런 거라니까 참 다행이에요.

저야말로 다락방님 덕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수 있어서 참 고맙고 기뻤어요. ^^

순오기 2011-04-1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만의 시간은 꼭 있어야 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왜 세계는 굶주리고 있는가는,어머니독서회 토론도서였어요.
안나 카레니나는 언제 차분히 읽게 될런지...

섬사이 2011-04-18 13:0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엄마만의 시간은 너무너무 중요한 거, 맞죠?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집안 일을 하든 정신이 쉴 시간이 필요해요.

알맹이 2011-04-16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 읽고 싶은 사람 여기 또 있네요. 1권 200여 페이지 읽다 만 것 같은데.. 무슨 승마장 장면이었나 거기까지 읽었던 거 같아요. 저희 집에 있는 건 범우사에서 나온 글씨 빽빽한 옛날책인데 저렇게 예쁜 책이 새로 나왔네요. 제가 구할 땐 없었는데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집에 있는데.. 지금 같아선 과연 저 책들을 집어들 날이 올까 싶어요. ㅠㅠ

섬사이 2011-04-18 13:06   좋아요 0 | URL
저도 거의 두 달이 넘어 걸린 것 같아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독서등을 켜놓고 조금씩 매일 꾸준하게 읽었어요. 하루 이틀 안 읽으면 자꾸 레빈이 말을 시키더라구요. 아마도 제가 레빈에게 가장 많이 동일시했나봐요. ^^
 

마트에서 장을 보고 버스를 탔다. 대형마트는 늘 사람으로 넘쳐나고, 그래서 늘 버스정류장도 복잡하다. 내가 타는 마을버스는 대형마트로 들어서는 길에서 오고가는 버스노선이 겹친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큰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대형마트가 있는데 대형마트 가는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같은 번호의 버스가 다 들렀다가 가려다보니, 대형마트로 들어서는 도로에서는 다른 방향의 같은 번호 버스가 서야 하는 정류장이 똑같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전에 어느 방향으로 가는 버스인지 잘 확인하고 타지 않으면 버스가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오늘도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르 몰려들었다. 앞문으로도 타고 뒷문으로도 탄다. 타야할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버스기사들도 마트 앞 정류장에서만큼은 뒷문으로 타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버스가 유턴을 해서 다시 큰길로 빠져나가는 도로 중간에서 어떤 아줌마 같은 할머니, 또는 할머니가 되려는 아줌마(?) - 편의상 젊은 할머니라고 부르자 - 로 보이는 분이 버스를 세웠다. 거긴 버스정류장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버스기사가 앞문을 열자 막 소리를 지르신다.  

"왜 버스정류장에서 사람도 안태우고 그냥 가!"
버스기사가 타서 말씀하시라고 하면서 일단 올라타기를 독촉하니까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젊은 할머니께서 올라타신다. 그러고는 막 소리를 지르시는 거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을 태우고 가야지! 사람도 안태우고 그냥 내빼면 어떡해!"
그러니까 버스기사가
"어디 계셨는데요? 정류장마다 다 섰는데, 어디서 제가 안 태워요?"
"내가 저-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사람도 안태우고 앞에 차 앞질러서 그냥 갔잖어!"  

아마 젊은 할머니는  내가 탄 정류장 바로 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셨던 것 같았다. 그 정류장은 버스 방향에 따라 한 3미터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정류장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 하는 정류장이다. 그러니까 이 젊은 할머니께서는 아래쪽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잘못해서 3미터 위쪽에 있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당연히 버스기사는 앞쪽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만 태운 거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중에 몇 분이
"저 그 정류장에서 탔어요. 이 버스 거기서 섰었는데.."하고 기사를 변호했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라서 그 젊은 할머니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노여움을 잔뜩 안고 버스 뒷편으로 갔는데, 버스기사가 그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얘기했다.  

"거기는요, 정류장이 두 개예요. 이쪽 방향 버스를 타시려면 아래쪽 정류장에서 기다리셔야 하는데, 할머니가 잘못하시고는 저한테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 다음엔 정류장 확인하시고 기다리세요. 아셨어요?" 
할머니가 무안하셨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 그 정류장이 많이 헷갈려. 왜 그렇게 해놨는지 몰라."하면서 수근댔다.  
할머니가 아무 대답도 없자 버스기사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대답하세요!" 

난 그 때 좀 조마조마했다. 버스기사의 말투는 따지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공손하지만 당당한, 그런 말투였다. 난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무척 노여워하고 계셨고, 그래서 버스기사의 "대답하세요!"라는 재촉에 "젊은 사람 운운, 버릇없이 운운.. " 뭐 그럴까봐, 그래서 싸움이 될까봐 두근두근했다. 버스 안엔 정말 바늘 끝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알았어!" 아직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퉁명스러운 할머니의 대답. 일단 할머니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신 셈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향해 버스기사가 마무리짓는 결정적 멘트를 날렸다.  
"왜 운전하는 사람 스트레스 받게 그러세요. 미안하다는 말씀도 안하시고.." 

와, 저 버스기사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내가 지금 저 버스기사였다면 할머니를 따라 나도 화를 냈을 것이고, 할머니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알았어!"하신 걸로 나도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지만 그냥 덮어버렸을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하루종일 내내 짜증을 내며 구시렁댔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버스기사는 은근슬쩍 할머니의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내 뒤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그러게.. 운전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데 그러면 안되지.."하고 버스 기사 편을 들었다.  

젊은 할머니가 버스기사 곁으로 가더니 "알았어!"했을 때의 심술궂음, 노여움, 퉁명스러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목소리로
"거기 버스 정류장이 어떻게 돼있다구?" 하고 물으셨다.
"거기는요, 버스정류장이 두 개라구요. 청계천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위쪽 정류장에서 타셔야 하구요, 이쪽 방향 버스는 아래쪽에서 타셔야 해요."
버스기사가 자분자분 다시 설명을 해드렸다. 버스기사도 원망같은 게 전혀 없는 말투다.
"그래.. 내가 잘 몰랐어. 미안하네.." 

와~~ 할머니가 버스기사에게 사과를 하셨다. 버스기사는 할머니에게 사과를 받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런 싸움이 벌어지면 같이 타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피곤해진다. 그런데 난 오늘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이 갈등과 해소과정이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완벽한 드라마처럼 여겨졌다. 너무 멋졌다. 버스기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공손하면서 당당하게 자기 말을 다 전달하는 것도 대단했고, 젊은 사람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 어르신도 멋있었다.  (게다가 버스기사는 젊은 할머니와 입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버스에 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난 살짝 버스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나이는 30대 초반?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마른 듯하지만 단단한 몸집이다. 앉아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키도 작아보이지 않는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빛을 보지 못한 게 좀 아쉽다. 다음에 버스를 탔을 때 이 버스기사가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꼭 웃으며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착한 사람이 좋다. 그리고 착하면서 당당한 사람들은 더 좋다. 
사람들이 다투는 건 싫지만 기승전결이 있고 해피엔딩으로 깔끔하게 끝나는 싸움이라면 그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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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기사처럼 성정을 가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발끈하고 속으로 움츠리고 두고두고 게워내고,
할 수 있는 지저분한 일은 다 하니까요. 참..... 멋지네요.
기사나 할머니나 이렇게 전달해주시는 섬사이님 두요.

평생, 이 성질머리 고쳐지지 않을까봐 요즘은 걱정스럽답니다, 전.

섬사이 2011-04-13 21:10   좋아요 0 | URL
그 버스기사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어요. 화가 나고 짜증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버스기사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저도 바람직하지 못한 성질이라서.. ^^;;

희망으로 2011-04-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면 저절로 아량이란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제 경우를 보면 고집과 아집이 더 단단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이드신 분들이 사과하는 경우가 드문게 아닌가 해요. 정말 할머니도 멋지고 기사님도 멋지십니다. 싸우는 일이 많아지길 바라는 것은 그렇지만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 바람직하게 이뤄지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건....괜찮은거죠^^

섬사이 2011-04-13 21:16   좋아요 0 | URL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 보다 어린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불필요한 기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더 많죠.
필요하다면 싸워야겠지만 싸움 뒤에 화해가 온다면 더 좋겠지요.

순오기 2011-04-14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 드문 풍경이네요~~ ^^
그 버스기사님 아니어도 같이 인사하면 좋아요~~~~헤헤!^^

섬사이 2011-04-14 10:38   좋아요 0 | URL
인사를 하더라도 버스기사님 얼굴도 안보고 카드 찍으면서 대~충 했거든요.
이제 버스기사님 얼굴을 확인하고, 인사하게 됐어요.
거기다 살짝 웃어줄 거예요. ^^

무스탕 2011-04-1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달에 영화보러 가려고 제가 탔던 버스기사 아저씨랑은 참 비교되네요.
울동네 아저씨는 목적지에 가는 내내 옆차선, 반대차선, 하여간 주변에 지나가는 버스의 기사 아저씨들을 모두 참견하고 심지어는 이어폰을 사용했지만 핸드폰 통화까지 하고 아주 번잡스러워서 불안했는데 말이에요. (글쎄, 이 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를 극장에 갈때 집에 올때 모두 탔다는거 아닙니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젊은이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어른이나 모두 멋지네요!

섬사이 2011-04-14 10:43   좋아요 0 | URL
그런 버스기사를 만나면('님'자가 저절로 탈락하네요!) 정말 불안해요.
제가 만난 그 버스기사님은 '전문가'다웠어요.
화난 승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무조건 참거나 양보하거나 눈감아주는 게 '착함'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그건 잘못하면 '위선'이나 '비겁'에 더 가까워지게 되니까요. 기꺼이 다가가 미안하다고 하신 어르신의 용기도 감동이었구요.

Mephistopheles 2011-04-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마주치는 노인네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할머니시군요. 젊은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할머니 역시 멋지십니다..^^

섬사이 2011-04-15 13:38   좋아요 0 | URL
지하철에서 몇 번 사건이 있었죠? 그 때마다 잘 늙어야지, 생각했어요.
잘못했다면 상대가 나보다 젊건 어리건 사과할 줄 아는 것,
그것도 잘 늙는 비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메피님.^^

Arch 2011-04-1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편의 드라마 같아요.

섬사이 2011-04-15 13:40   좋아요 0 | URL
버스에서 내리면서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그러고보니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드라마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때론 좀 추잡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면면들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영화제작에 손대야 하나....^^;;)
반가워요, 아치님.

감은빛 2011-04-1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기사님이시네요. 잘못을 인정하신 할머니도 대단하구요.
저도 잘못된 상황을 못 참는 성격인데,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다보면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몇번 그러고나면 또 비슷한 상황이 생겨도,
그냥 귀찮아서 참아버리고 말지 하고나서(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나중에 속으로 혼자 속상해하게 되더라구요.

저 기사님의 현명한 태도가 참 부럽네요!

섬사이 2011-04-18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거든요. 겉으론 참고 넘어가는 것 같지만 속은 하루종일 부글부글하죠. 버스기사님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자기전달을 잘 한 것 같아요. 또 버스기사님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할머니가 고깝게 여겨 더 화를 냈다면 일은 또 안좋게 흘러갔을 텐데, 할머니도 자기 잘못을 빨리 인정하시더라구요. 두 분 다 정말 멋졌어요. 싸움구경하고 이렇게 산뜻하기는 정말 흔치 않을 거 같아요.
 

방사능 비가 내리던 어제, 흙살림에서 꾸러미가 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요일마다 채소와 과일, 계란이나 간식거리들이 택배로 배송되어 온다. 내가 주문한 물품이 오는 게 아니라, 그 쪽에서 알아서 보내주는 것을 받는건데 덕분에 지난 가을엔 아욱국을 자주 끓여먹었고, 유황훈증을 하지 않고 곶감 덕장에서 자연건조시킨 곶감을 맛보기도 했다.  어제는 유정란과 두부, 딸기, 시금치, 쪽파, 깐마늘, 무가 왔다.  

현관문을 열고 꾸러미 상자를 받으며 택배기사분에게 죄송했다. 모두 맞기 꺼려하는 저 비를 우비도 입지 않고 생계때문에, 아이 교육비때문에, 자기일에 대한 책임 때문에 우리집까지 왔을 거라 생각하니, 늘 목요일이면 받던 꾸러미 상자가 더 크고 무거워 보인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말로만 했었는데, 어제는 고개까지 꾸벅 저절로 숙여졌다.

목요일 오전은 우리 아파트 재활용품을 내놓는 날이다. 청소아줌마들과 경비아저씨들이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간 재활용품을 정리하느라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저 비는 저 비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팔자좋은 높은 사람들이 맞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꾸러미에서 온 쪽파를 까는데 꼬맹이가 도와주겠다며 나선다. 눈 맵다고, 손 더러워진다고 말려도 극구 곁에와 쪽파를 잡는다. 조금 까다가 관두겠지 했는데, 웬걸, 눈이 맵다면서도 끝까지 앉아서 도와주었다. 많이 컸다는 걸 새삼 다시 느꼈다.   

지난 주에 꾸러미로 온 열무와 얼갈이가 그대로 있어서 꼬맹이딸이 까준 쪽파를 넣어서 얼른 열무물김치를 담갔다. 남은 쪽파로는 냉동실에 있던 홍합살과 굴, 오징어를 넣고 파전을 부쳤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온 아들녀석이 막내와 같이 앉아 맛있게 먹어주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길할수록 이런 저녁식탁을 더욱 지켜주고 싶어진다.   

이보다 더한 징후가 나타나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중에 좋은 쪽만 골라서 살아갈 수는 없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뭔가 석연치않고 찝찝하더라도 옆지기는 일을 하러 나가고, 택배기사는 상자를 들고 뛰어다니고, 우리동네 야쿠르트 아줌마는 집집마다 야쿠르트를 넣은 후 아파트 입구에서 남은 야쿠르트를 팔기 위해 서있고,  환경미화원들은 도로를 비질하고, 버스는 새벽부터 밤까지 정류장을 빼놓지 않고 정해진 노선대로 운행하겠지.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깨지지 않도록, 아주 작은 실금도 가지 않게 지켜주려는 노력을 더 더 보고싶다.  '아, 저 사람들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이 사소한 일상들을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구나. 지켜주려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구나.'하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위로가 될텐데. 아직도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게 나도 참 신기하긴 하지만.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 소식이 또 들려온다. 그 지점까지 가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을텐데, 어쩌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지경까지 몰렸을까. 어쩌다가 우리는 이 지경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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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4-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택배 받으면서 상자에 묻은 빗방울도 꺼림칙한데 이걸 온종일 들고 나르신 분은 얼마나 비를 많이 맞았을까 싶어 미안하고 한숨이 나왔어요. 하루하루의 소중한 일상을 열심히 사시는 분들은 늘 이토록 위험에 내몰리고, 그런 상황을 연출하거나 방조하는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고개만 까딱하고 있네요. 정말, 우리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섬사이 2011-04-08 15:40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 3권을 주문을 하는 게 좋을까, 안하는 게 좋을까, 하고 있어요. 어제 그 택배기사분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책 주문을 미루게 만드네요. 급하게 읽어야 할 책도 아니고, 안하고 지나가면 허전한 이벤트를 치루듯 책을 습관처럼 사는 면도 없지 않아서, 굳이 지금 주문하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꿈꾸는섬 2011-04-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 맞으며 일하시던 분들이 꽤 되시더라구요. 정말 안전할까 의심은 드는데...참, 안타깝네요.

섬사이 2011-04-08 16:34   좋아요 0 | URL
자꾸 약이 올라요.
약이 오르다가 화도 나구요.
언제쯤 끝날까요. ㅠ.ㅠ

무스탕 2011-04-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병원에 가려고 차를 몰고 나가는데 맞은편에서 청소차가 오더라구요. 보니까 아저씨가 차 위에 우산 없이 그냥 서서 이동하던데 저도 아이고, 이 비를 그냥 맞고 계시네.. 하긴, 쓰레기통을 비우려면 몇 번을 내려섰다 올라갔다 해야 하는데 일일이 어떻게 우산을 쓰겠나.. 싶더라구요.
참, 고생이 많으시네, 가족이 걱정 많이 하겠네.. 싶더라구요.

섬사이 2011-04-08 16:55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어제 그 택배기사님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분의 부모님과 아내, 자녀들에게도 내가 못할 짓을 한 것처럼 느꼈어요.
어제같은 비가 내리는 날, 누가 - 그 사람에게 신세진 게 많고 친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 우리 옆지기에게 밖에서 우산없이 해야 할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면 저는 그 사람을 무지무지 원망하고 미워했을 것 같거든요. ㅠ.ㅠ 무스탕님과 옆지기님은 좀 나아지셨나요? 지성이는 괜찮구요?

알맹이 2011-04-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와 닿는 글이네요. 요즘 정말 인류의 미래가 걱정되어요.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할 세상이라 더더욱.. 부모가 되고 보니 그렇네요.

섬사이 2011-04-11 13:20   좋아요 0 | URL
가끔 더이상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원자력발전소 같은 경우는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으니까
문명이 조금 뒷걸음질 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조금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사람들은 살아지지 않을까요?

세실 2011-04-09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한 방울도 안맞으려 애쓰다가 비 맞고 묵묵히 일하는 분들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모두 행복해야죠.

섬사이 2011-04-11 13:2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모두 행복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예요.
오늘은 햇볕과 바람이 둘 다 맑아요.
이 햇볕과 바람 속에 우리에게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만큼요.
 

오늘 아이들을 보내놓고 한가득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다가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조용한 아침이 올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신 커피 잔 하나, 내가 먹은 빵 접시 하나, 커피를 저었던 예쁜 티스푼 하나, 그것만 설거지해도 되는, 그런 조용한 아침.  아이들이 벗어 놓고 간 옷가지들을 주워담으며 언젠가는 일주일동안 빨래를 하지 않아도 빨래통이 다 차지 않는 그런 날도 올거야, 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쓸쓸한 아침. 그 때에는 아침에 한 청소가 다음 날 아침에도 유효할 거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늙어 있겠지만 어쩐지 그런 아침이 기다려진다.   

어제부터 다시 요가를 시작했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한달에 만원만 받고 일주일에 두 번씩 요가 수업이 있다. 춥고 귀찮다고 겨우내 푹 쉬다가 오랜만에 운동이랍시고 했더니 어깨, 팔, 옆구리, 다리 뒤쪽이 땡기고 뻐근하다. 묵묵히 숨어 일하던 근육들이 난데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나서는 것 같다. 근육이 그려진 인체의 그림을 앞에 놓는다면 내가 움직일 때마다 어느 근육이 움직였는지 다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이 조금이라도 빠진다면 이 고통이야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뵌 요가 선생님은 나와는 대조적으로 겨우내 더 말랐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구나, 겨울은 당연히 살이 찌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마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요가를 마치고 아파트 친구랑 같이 한살림에 들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올봄 첫 민들레를 만났다. 보통 3월 15일 전후로 해서 그 해 첫 민들레를 만나는데,(작년엔 3월 17일, 재작년엔 3월 14일에 만났다) 올해는 정말 늦게 만난 셈이다. 그것도 보도블럭 틈새에서 푸른 이파리 하나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서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제 길상사 다녀오는 길에서도 그렇게 두리번대며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더니.  그래, 민들레 너는 그냥 일상의 늘 다니던 길에서 문득 만나야 더 반갑지.  

아파트 단지 앞산에는 개나리도 만개했다. 해마다 개나리 축제가 벌어지는 산인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개나리 축제 때는 정작 산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올해만큼은 꼭! 개나리 만개한 산에 아이 손 붙잡고 오르리라고 겨울부터 작심을 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쌀알처럼 붙어 있던 매화꽃눈들도 하나씩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이제 열그루 매화길을 지날 때마다 코를 들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매화향을 흡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그런데 오늘, 며칠 전 부터 예고했던 비가 내린다. 일찍 집을 나서는 큰애들에게 우산을 챙겨주면서 절대로 비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르고, 어린이집에 가는 막내에게 비옷을 입히고 우산을 씌우고 마스크까지 해줬다.  

꽃은 여기저기서 피고 볕은 따스한데, 자꾸만 이 봄이 불길하다.  

봄날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바랐는데, 문득 불길하지만 않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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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4-0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마다 민들레와 함께 맞닥뜨리는 봄이라니, 참으로 근사해요.
이 불길함이 안심으로 어서 바뀌어야 될 텐데요.

섬사이 2011-04-08 12:49   좋아요 0 | URL
봄이다, 싶으며 민들레가 기다려져요.
민들레를 봐야 정말 봄이 온 것 같구요.
그런데 올해 봄은 정말 심난하고 불길해서 속상해요.

세실 2011-04-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딸내미가 벗어 놓은 옷가지, 어제 신던 스타킹 날리는거 보면서 우울하더라구요.
책상도 엉망이고요. 왜그리 정리를 못하고 사는지...원.
도서관 주변에 어느새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어요!!


섬사이 2011-04-08 12:50   좋아요 0 | URL
우리애들도 그래요.
정말 정리정돈과는 담을 쌓았나봐요.
그런데요,
저도 그땐 그랬던 것 같아요.
뭐, 지금도 깔끔하게 사는 편은 아니예요.

순오기 2011-04-08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건만.... 잔인한 봄이 되고 있어요.
아침에 노인복지관으로 한문공부하러 갔더니,
비 때문인지 지렁이들이 떼죽음을 이루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 불길하고 불안했어요.ㅜㅜ

섬사이 2011-04-08 12:51   좋아요 0 | URL
아, 지렁이들이..
정말 무서워요.
정부에서는 엑스레이 한 번, CT 한 번 찍는 정도의 방사능도 안된다고
안심하라는데, 지렁이는 엑스레이 찍으면 100% 죽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

꿈꾸는섬 2011-04-08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요가 다시 시작하신 건 정말 잘 하신 것 같아요. 저도 요가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 못했거든요. 그래도 몸을 움직여주니 정말 좋더라구요.^^

섬사이 2011-04-08 16:29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해도 잘 한 것 같아요. ^^
아마 더 나이가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가기 싫다가도 막상 다녀오면 잘 갔다왔다,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