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도 꽤 흥미있게.  그래서 같은 작가가 쓴 <욕망하는 식물>은 내 구미를 당겼다.  

선생님은 '인간의 역사가 자연과 끊임없이 맞부딪쳐가는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유 공간안에 '자연'이 많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그런 의미에서 다소 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처음 '마음을 여는 책읽기'를 꾸리려고 준비할 때 엄마들이 독서모임을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어렵지 않은 책들을 선정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역사책들을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역사와 세계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하고 세상을 크고 넓고 깊게 조망할 수 있게 해서 결국엔 나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한다고 하셨다.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계획했던 독서리스트가 수정되었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실 <잡식동물의 딜레마>보다 어려운 것 같기도 했다. 사과, 튤립, 대마초, 감자를 통해서 각각 달콤함, 아름다움, 도취, 지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이 책은 종의 다양성과 단일성,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세계, 산업과 농경 등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변형되고 황폐화되는 식물의 고충과 그 결과  다시 인간에게 돌아올 재앙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더 컸다.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공진화 / 책에 '공진화'라는 말이 나온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만큼 서로 같이 살아가는 '공진화'에 대한 인식이 중요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따뜻하고 밝은 쪽으로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인간의 단일품종화? / 종의 다양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을 두고 보면 인간의 결혼제도나 인종에 대한 편견들, 다른 문화에 대한 경계 등등은 인간의 '단일품종화'에 기여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음, 일리있는 의견이다.   

담배와 커피 / 잠시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교실을 나갔다가 들어오셨는데 한 엄마가 스쳐가는 선생님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선생님께 질문, "선생님, 담배는 무슨 욕망일까요?" 선생님은 갑작스런 질문에 허허 웃으시더니 인디언사회에서 담배는 침묵과 평화의 시간이었고, 인간의 수컷에게 술과 마약은 암컷들에게 '강함'을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또 설명을 하셨는데,,, 음, 기억이 잘 안 난다.
엄마들 사이에서 '그럼 커피는 뭘까?'하는 질문이 나왔다.  엄마들은 대부분 커피를 좋아한다.  아이들을 돌보다 피곤해지면 맘놓고 쓰러져 잘 수도 없으니 잠깐의 '반짝'효과를 보기위해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그건 '휴식'의 욕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담배와 커피는 현대인들의 '휴식'에 대한 욕망이 가장 많이 반영된 건지도 모른다.  잠깐의 온전한 나만의 시간, 방해받지 않는 휴식. 그만큼 우리는 지쳐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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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의 현문우답 

선생님은 책에 나온 네 가지 식물을 포함해서 식물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식물들을 각자 말해보라고 하셨다.  

사실 난 민들레를 보고 감격하곤 했다.  봄기운이 느껴지면 언제 첫 민들레를 만날까,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보도블럭 사이나 아파트 화단 귀퉁이나 전봇대 밑에서 키작은 민들레를 처음 본 날을 달력에 적어놓곤 했다. 그건 아마 내가 추운 겨울을 너무너무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들레를 보면서 '아, 이제 정말 겨울이 끝났구나.'하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돌봄 없이도 그 모진 계절을 이겨낸 작은 민들레에게 아낌없이 격려와 환호를 보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매화도 그랬다. 추위가 아직 다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아니 한 겨울부터 매화는 겨울눈을 꾸준히 조금씩 부풀려간다.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밤에 매화나무는 가로등 조명을 받으며 부풀린 겨울눈을 내게 보여주곤 했다.  '조금만 참아,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어.'하고. 그러다가 아직 겨울이 끝난 것 같지도 않은 어느날 하얀 꽃송이를 성급하게 터뜨리곤 했다.  참으로 고맙게도.  

열매가 열리는 식물들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의 마음을 감춘다는 튤립이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식물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다른 작품들(영화든 책이든 뭐든)이 있었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난 그다지 딱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한 엄마가 영화 '아이언맨'이야기를 했다. 아쉽게도 난 '아이언맨'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공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언맨'에 연관해 이야기했을 때 잘 이해되지가 않았다.  선생님은 발터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기술과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를 언급하셨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왜 폭력의 유전자가 남아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러게, 아예 폭력의 유전자같은 거 없어지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자기 가족과 소속된 사회집단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폭력의 유전자가 여전히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선생님이 우리에게 던진 힌트 비슷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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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이고 그 다음에 읽을 책으로 뽑아주신 책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다.  처음에 선생님이 "다음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때요? 괜찮겠어요?"하고 물으셨을 때 그냥 아무 생각없이, 정말 아무 생각없이 "네"하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가신 후에 도서관 컴퓨터로 책을 찾아보니 두 권짜리 책인데다가 분량이 많았다. 다들 큰일났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읽어!'하는 용감무쌍한 마음도 들었다. 선생님은 이 책이 괴테의 인문학적 내공과 자연과학적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라고 하셨다.  

암튼, 다음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다.  제목이 '죽기로 결심하다'인 걸 보니 아주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코엘료의 책은 <순례자>와 <연금술사>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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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랑 2010-11-2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책 어렵지만 재미나겠는데요~ 섬사이님 덕분에 좋은 책을 또 하나 알고 갑니다.
아 그나저나 독서모임 너무 부러워요~~~

섬사이 2010-11-26 11:03   좋아요 0 | URL
처음엔 욕망하는 식물이라고 해서 식물의 욕망을 기대했다가 한참 헤맸어요. ^^ 독서모임은 이제 두 번 정도 남았답니다. 끝나는 게 아쉽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해요. 암튼 많이 배우고 도움을 받은 건 틀림없구요. ^^

순오기 2010-11-2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계시니까, 우리 맘대로 하는 독서회와는 다르네요.
섬사이님, 부러우면 지는거라지만 섬사이님의 독서회가 부러워요!!^^

섬사이 2010-11-30 17:12   좋아요 0 | URL
이번주가 선생님과의 마지막 독서모임이랍니다.
엄마들이 더 서운해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끌어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독서모임이 아니라
수다모임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프레이야 2010-11-26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독서회네요. 참 좋은 시간 같아요.
이 책도 끌려서 일단 담아갑니다.
확장해서 읽는 것, 좋은 경험이지요.

섬사이 2010-11-30 17:14   좋아요 0 | URL
예, 참 좋은 기회를 얻고 많이 배웠어요.
조금 힘든 점도 없지 않았지만 얻은 게 참 컸죠.
특히 '확장'은 아마 독서모임 최고의 장점이었을 거예요.

꿈꾸는섬 2010-11-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특별한 독서회네요.
이런 모임에 참여하면 참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섬사이 2010-11-30 17:18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독서모임을 마련해 준 거예요.
관장님이 엄마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에요.
엄마들이 애들 독서에는 열성이지만 정작 자신들이 독서를 통해 풍요로워지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물론 알라딘 서재에는 그런 분들이 너무너무 많지만요.
덕분에 좋은 시간들을 보냈어요.
 

한 달도 더 지난 10월 21일에 있었던 모임 이야기를 올리자니 참 쑥스럽다.  내가 컴을 차지하고 있을 시간은 아침에 아이들을 다 챙겨 보내고 난 뒤부터 막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까지인데, 그 시간동안 늘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밀린 집안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뭐, 핑계가 그렇다는 거다.   (게다가 나는 글 쓰는 것에 꽤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새벽 세 시..> 가지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하다는 다락방님과 주드님의 댓글을 뒤늦게 읽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게으름 부린 것에 대한 민망함과 죄송함이 마구마구 밀려왔다.  이제서야 수첩에 적어두었던 메모를 펼쳐놓고 어떻게든 민망함과 죄송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뒤늦게 이러고 있다. '마음을 여는 책 읽기' 모임은 벌써 일곱 번째 모임까지 마쳤다.  그걸 정리해 기록해 놓으려면 으이구, 큰일났다.   

 어쨌든 세 번째 모임,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부터 서둘러 보자.  

모인 엄마들 중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엄마들은 컴을 통한 사적인 접촉의 첫 기억을 하이텔 천리안 통신으로 꼽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전화선 하나에 의지해서 오고간 불안정한 통신이었지만 생각하면 나름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던 시절이었더래서 한창 붐을 일으키던 PC통신에 그다지 열정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한 엄마들 중에는 이 책의 남녀주인공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나눈 감정의 굴곡을 더듬으면서 하이텔 천리안 통신을 통해 동창을 만나고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느꼈던 경험이 생각나기도  했다는 걸 보면....... 내 머리 속에선 영화 '접속'만큼의 알싸한 기억은 아니더라도 모니터의 파란(아니 초록이던가?) 화면만 떠오르니 동시대인들의 보편적인 경험에서 소외된 듯한 아쉬움이 좀 남는다.  어쩌랴, 다시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이런 노친네같은 발언을!!)  

이름 / 엄마들은 이름을 잊고 산다. 처음에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게 영 낯설고 어색하다가 어느새 OO이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해지고 그 다음엔 내 이름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른다.  심지어 누가 "OOO씨!"하고 부르면 경미한 손발 오그라짐 증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에미가 이메일주소를 'like'라고 해야 할 것을 'leike'라고 잘못 치는 바람에 이어지게 된 두 주인공의 인연에서 엄마들은 '이름을 잃은 나'를 떠올렸다.    

에미와의 감정이입불가능 / 에미에 대해서 비호감을 드러내는 엄마들이 많았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별탈없이 적응하며 잘 살아왔다는 것은 어쩌면 보수적 규범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성향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에미가 너무 '들이댄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잘 안됐다고. 에미가 다소곳하고 "어머, 이러시면 안돼요~~"하는 캐릭터였다면 엄마들 마음에 들었을까, 궁금했다.  남자주인공 레오에 대한 반응은 무덤덤덤...  아주 따뜻하고 자상한 상위 극소수의 남자들과 아주 못되먹은 하위 얼마쯤의 남자들을 제외하면, 남자들은 결혼하면 비슷비슷해져, 하는 심정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엄마' / 왜 베른하르트의 두 아이들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거냐. 에미가 레오에게 가버리면 엄마를 두 번 잃게 되는 베른하르트의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이 엄마들. 청승이라고, 주접이라고, 오지랖이라고 비난하기에도 뭣한 이 끈끈한 모정이 주책없이 아무데나 불쑥 끼어드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엄마다, 여자보다 강한 엄마다, 쯧~! 

이 죽일 놈의 외모지상주의 / 귀여운 청년 레오의 사랑을 받는 에미는 매력적이다. 예쁘다. 멋지다. 재치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들이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현실을 떠나 환상의 세계로 뛰어들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욕구를 더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더 속상하다. 불어난 몸무게, 탄력을 잃은 피부, 늘어난 잡티, 생기가 사라진 얼굴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외모지상주의가 못마땅하다고 불평을 했다. 게다가 에미도 어쨌든 살림하는 우리와 같은 주부가 아닌가!  (게다가 난 에미보다 나이까지 훠얼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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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선생님과의 현문우답 

선생님은 우선  이 소설에서 감성적인 문장들이 많아서 감탄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시작된 선생님의 질문.   

바깥세상 /

184쪽에 나온 문장,
'레오, 당신이 돌아와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겐 당신이 필요해요! 저는 제 세계 바깥에서도 움직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해요. 레오, 당신은 저의 바깥세상이에요! ' 

여기서 '바깥세상'이라는 게 무슨 뜻인 것 같냐고 물으셨다. 난 그냥 대수롭지 않게 스쳐지나갔던 문장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소설이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다지 문장의 의미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은 것 같다.  이야기에만 너무 집중했던 거다.  나의 생활을 '안세상'과 '바깥세상'으로 구분짓는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내 마음 속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세상과 남에게 비난받지 않으려고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가는 겉으로 드러난 세상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엄마로서 주부로서의 가정 안에서의 생활과 나 개인의 만족을 위해 꾸려가는, 이를테면 이런 독서모임같은 걸 바깥세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쩌면 가정 안에서의 '나'와는 다른 모습일테니까.  

에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미의 친구 미아를 통해서 본 에미의 실생활은 매우 모범적이고 행복해 보였다는 점에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를 억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은 안쪽의 세상이고 혼자 남겨진 세상이 바깥세상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에미는 자기를 가둔 현재의 삶을 깨뜨리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규율과 관습, 또는 유교적 가치관 / 

규율과 관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아마 이 책의 내용이 우리의 관습이나 규율, 유교적 가치관과 맞서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와 맞지 않는 타이트한 규율은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사회적인 합의라고 볼 수 있는 관습과 규율을 지키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들 했다.  선생님은 규율과 관습을 '편리성'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고 하셨다.  때론 갑갑하기도 하지만 '편리'하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연성'을 잃어서도 안될 것이다.  규율과 관습이 '편리성'을 높이려면 그만큼 우리 몸에 잘 맞는 옷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봉과 수선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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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옛사랑의 추억, 잊었던 향기들이 조금씩 떠올랐을 것이다. 팍팍하고 푸석했던 마음들이 조금이라도 물기를 머금었다면 다행이지 싶다. 실제로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풀어내기도 했으니 잠깐 내가 걸어온 길의 흔적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을 터이다.

<새벽 세시...>의 후속으로 나온 책이 있다. <일곱 번째 파도>. 이 책을 소개할 때 <일곱 번째 파도>도 같이 소개했는데 엄마들 중 몇몇은 <일곱 번째 파도>까지 읽어왔다.  다들 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다음은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이다.  후기가 다락방님과 주드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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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2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원망 한자락. 아니, 섬사이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건만 이제야 오시다니요, 너무해요, 너무해욧!!

엄마라는 위치때문에 저는 이 소설속의 에미에게 크게 감정이입하지 못할거란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군요. 제가 아는 결혼한 여자사람도 이 소설을 불쾌해 하더라구요. 대체 뭐하는 거냐며. 물론 이 책을 엄청 좋아하는 결혼한 여자사람도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에미에게 감정이입 하는 대신, 에미를 그저 에미로만 보았어도, '여자' 에미로 보았어도 좀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흐음.. 뭔가 좀 서운해요. 어쩔 수 없는 '엄마'라는건 저도 잘 알겠지만, 그래도 그들도 '여자'였잖아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여자임을 잃지 않는다는 걸 모두 다 할 수는 없는걸까요? 저도 만약 지금과 다른 입장이었다면 전혀 다른 감상을 갖게 됐을까요? 아니, 그리고 어떻게 레오한테 무덤덤할 수 있을까요? 하아-

새벽 세시의 결말 때문에 가슴 먹먹해하는 그런 '엄마'들은 없었나요, 섬사이님? 아, '엄마'들이 서운해요. 흑 ㅠㅠ

섬사이 2010-11-23 09:57   좋아요 0 | URL
미안해요, 미안.. 싹싹싹(두 손 싹싹 비는 소리 들리죠?)
저도 사실 <새벽 세 시..>를 읽고 엄마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빠져들길 바랐는데 도덕적 기준의 잣대로 책의 내용을 재며 읽었구나, 했어요.
새벽 세 시의 결말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엄마들이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심지어 둘이 헤어져서 정말 다행이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론 두근거리며 끝이 궁금하다는 엄마들도 있어서 <일곱 번째 파도>를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기도 했지만요.
'엄마'들한테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까 이제야 '멋진 남자'들이 보인다며 미키유천과 비와 조인성 등등에 대한 찬양의 시간이 잠시 이어지기도 했으니까요. 알고보면 '여자'인 거 맞아요. ^^

비로그인 2010-11-2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 님
슬퍼요 슬퍼요. 제가 읽은 것과 너무 달라서 놀랐고 제가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그렇게 슬퍼하셨다는 것에 또 놀랐습니다. 엄마, 유교, 자식, 이런 것들을 저는 전혀 생각지 않았거든요. 아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는 에미가 가버리면 엄마를 두 번 잃는다니, 그 생각은 지금 방금 처음 읽었습니다. 아, 결혼하면 다 똑같다니요! 전혀요, 전혀 달라요! 이런 남자와 저런 남자가 있어요. 그리고 결혼 후엔 다른 관계가 있겠지요. 레오는 오직 레오로, 에미는 오직 에미로만 읽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새벽 세 시가 아니라 오후 세 시가 되어버리는 거죠! 북풍이 아니라 마이동풍이지요! 슬퍼요ㅠㅠ

하지만 감상은 다양한 것이고 텍스트는 종이 밖에서 다른 생명을 얻는 것을, 제가 어찌할 방법은 없다는 것도, 어찌 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딱 하나 궁금한 것.

선생님이 다른 이야기는 더 안하시던가요? 뭔가 더! 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하

섬사이 2010-11-24 11:41   좋아요 0 | URL
저도 좀 의외였어요. 언젠가 제 꿈에서 비가 우리집에 와서는 "배고픈데 밥 좀 주세요."해서 밥을 차려준 적 있거든요. 꼭 그 꿈을 다시 보는 것 같았어요. 꿈인데, 로맨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비와 데이트는 못할망정, 밥을 차리다니!!! 소설인데, 에미가 되어서 그 귀여운 남자 레오에게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아이 둘을 걱정하다니!!!
생각보다 우리 엄마들 무척이나 도덕적이던데요.^^ (사실 아이 둘에 대한 생각은 저도 못했었거든요.) 모임의 엄마들이 저보다 다 어린 엄마들인데 말이죠. 제가 철이 덜 든건지...ㅉㅉ
쥬드님인 원하신 다른 그 '뭔가'가 없어서 저도 아쉽답니다. 하하...^^;;

세실 2010-11-25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했어요. 에미가 베른하르트랑 결혼한건 사랑의 감정보다는 가여움, 동정이라는 생각 들었거든요. 레오로 인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거죠.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답니다.

섬사이 2010-11-26 15:4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사랑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더니 이 책을 보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내 진짜 인연인지 아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프레이야 2010-11-2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삶)은 위험한 것,
도덕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삶은 하나의 로맨스이기 때문...
뭐 이런 문장이 생각나요.
정혜윤의 '침대와 책'에서였는데 제가 꽤 동의해서요.ㅎㅎ
이 책 저도 읽었는데 저도 두 아이는 생각 안 했네요.
모정이나 모성이 다른 것보다 우선이어야하는군요.ㅠ(^.~)
결혼은 모순형용이라는 문장이 제일 와닿았어요, 전^^

섬사이 2010-11-30 17:20   좋아요 0 | URL
'삶은 하나의 로맨스'!
갑자기 세상이 따끈따끈 말랑말랑 촉촉해지는 느낌이에요.
그래요, 로맨틱하게 살고 싶어지는 요즘이에요.
그런 마음에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라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지난 주 일요일로 끝났더라구요. ^^
 

 10월14일 목요일 10시.  10명의 주부들이 모여 앉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작품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카모메 식당' 

 

작년에 한 번 본 영화인데, 무척 담백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주먹밥을 주메뉴로 하는 '카모메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가 각자 아프고 답답한 과거를 가진 듯한 미도리, 마사코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내공만땅의 저 따뜻한 밥상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은 사치에가 미도리를 집에 초대해서 밥을 차려주는 장면이다.  사치에가 차려준 밥상을 바라보다가 울먹이는 미도리를 보며 나까지 울컥했다.  언젠가 아프고 지치고 외로울 때 누군가 저렇게 따뜻한 밥상을 내 앞에 놓아준다면, 나도 미도리처럼 울먹이지 않을까. 마음 속까지 저 밥의 온기가 밀려들어와 '에이, 까짓거, 다 잊고 다시 살아줄테다!'하고 다시 힘을 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라깽이 엄마와 살찐 고양이
영화는 사치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서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자기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잘 먹어주는 살찐 고양이가 좋았고,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더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엄마는 말라깽이였다고.  아마 사치에의 엄마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거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아니었나보다.  살찐 고양이와 말라깽이 엄마의 대조되는 이미지는 핀란드 해변의 살찐 갈매기와 카모메 식당을 찾은 말라깽이 두 여자 미도리와 마사코로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사치에마저도 말라깽이가 아닌가. 어딘지 까칠할 것만 같은 세 여자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이야기. 그건 어쩌면 까칠했던 삶과의 악수, 용서, 화해같은 건 아닐까.  

마사코의 잃어버린 짐
항공사의 실수로 짐을 잃어버린 마사코는 사치에와 미도리가 "짐에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을 텐데.."하고 걱정하자  "글쎄요.. 가방에 뭐가 들어있을까요?"하며 잃어버린 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들이 정작 쓸모없는 것들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사코가 찾은 여행가방을 열었을 때 마사코는 그 안에서 핀란드 숲속에서 땄던 황금빛 버섯들을 본다.  아니, 아마도 실제로는 가방을 열자마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나간 삶의 자질구레하고 너저분한 파편들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추레하고 보잘것없어서, 오히려 자기가 선택해야 할 새로운 삶이 황금빛으로 환하고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핀란드의 거대한 숲 속에 들어가 황금빛 버섯을 딴다는 것.  마사코는 지금까지와의 삶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선택했다는 뜻일게다.   

시인선생님과의 현문우답   

모두들 미도리, 마사코, 사치에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며 '일탈'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도 했다. 의무감과 관계에 대한 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도 했다. 가족이 등장하지 않아서 영화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가 선생님이 물으셨다.
"합기도 수련 장면, 수영장 장면이 왜 자꾸 반복해서 나오는 걸까요?"  
"자기를 다져간다는 의미 아닐까요?"  "어릴 적 끊지 못한 습관, 일상 같은 거겠죠."  "아버지와의 추억이요."  "감독이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수영장이 카모메 식당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텅 비었다가 나중엔 사람들로 꽉 차잖아요." 등등의 대답.  
선생님은 그 장면에서 "일상을 다 벗어나 버리자는 게 주제가 아니라 지독한 일상을 견디며 지키는 사람만이 일탈과 변화가 의미 있으며, 그래서 지독한 일상 속에서의 변화가 일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이래서 선생님이 중요한 거다) 

"마사코가 핀란드 여자네 집에 가서 그 여자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는 장면이 있었죠? 마사코는 핀란드 말을 모르는데도 그 여자의 말을 다 이해한 것 같았어요.  그럼 '말'이란 어떤 걸까요?" 
다들 '말'의 덧없음에 대해서, 또는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말은 '나'를 표현하는 동시에 '나'를 감출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시면서 말에서 더 확장하여 'Text는 폭력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셨다.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의문을 가지라고.  아마도 책 앞에서든 영화 앞에서든, Text 앞에서 주눅들고 자신없어 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말씀인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음식이 많이 나오는데, 음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부들이라 음식, 요리에 대해서는 할말들이 많다.  광합성을 꿈꾸는 나 같은 사람부터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까지. 선생님은 "음식을 대상화시키지 말라' 하시면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생명과 생명이 만나는 중요한 행위'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밥상을 나누면서 인간관계가 더욱 편안해지곤 했다. 집으로 초대하거나 아니면 초대받아서 '그 집 밥'을 함께 먹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확실히 광합성만으로는 그런 효과를 얻기가 힘들 것 같다. 그런 효과도 다른 생명이 희생된 밥상을 나누면서 일종의 공범자로서의 유대가 생겨나기 때문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남이 차려주고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는 밥'이 가장 맛있다는 데 만장일치하던 우리들은 그저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모임이 끝나고 나서 시인선생님은 우리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하셨다.  '남이 차려주고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는 밥'을 먹여주겠다시며.  카모메 식당으로는 차마 가지 못하고 대신 근처 곱창집에 몰려가서 모듬구이 두 판을 시켜서 냠냠, 맛있게 먹었다.(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과 맛있는 점심에 보답하는 의미로 우리는 여자가 전화해서 "오늘 저녁 먹고 들어와?"하고 물을 때의 속뜻을 가르쳐 드렸다. 절대로 일찍 들어오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다음 모임에선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다른 엄마들, 오랜만에 이런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좀 설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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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21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속의 카모메 식당같은 그런 식당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런 식당을 운영하는 의미로 갖고 싶다는게 아니라요, 그런 식당의 단골이 되고 싶다는 의미었어요. 커피 한잔을 마셔도 거기서 마신다면 조금 더 아늑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음식 하는 모습 나올때마다 군침 흘리던게 새삼 떠오르네요. 카모메 식당은 참 신기한게요, 보는 사람들 모두 좋다고들 말해요. 안티가 없는 영화, 모두에게 두루두루 사랑받는 영화인것 같아요.

그에 비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보이는데, 다음 모임에서 여러분들이 펼쳐 놓으실 이야기가 아주 궁금해져요. 분명 몇분은 설레였다고 하시겠지만 어떤분들은 비난하실듯도 해요. 빨리 섬사이님의 다음 모임이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히히

섬사이 2010-11-22 13:03   좋아요 0 | URL
이제야 올렸어요, 이제야..
오늘로 한 달하고도 하루가 지났네요.
이건 뭐, 뭐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어요. 이궁~

비로그인 2010-11-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 님, 새벽 세 시 책 모임은 아직 안하셨나요? 저 너무너무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궁금해요!

섬사이 2010-11-22 13:05   좋아요 0 | URL
앗, 주드님. 그렇게 궁금해 하실 줄 몰랐어요.
이제 막 올렸어요.
다락방님과 주드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ㅠ.ㅠ
 

아들이 중3이다.  작년부터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생각을 해왔는데, 사실, 우리 아들은 공부로 성공할 수 있는 케이스는 아니다. 뭐, 고등학교에 가서 갑자기 개과천선을 하면 모를까...  그렇다고 성적이 아주 엉망인 것은 아니고, 어중간하다고 해야할까..  성적표를 보면 우,미가 더 많고, 가끔 수와 양이 끼어있는 정도다.  

어중간한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어중간하게 학교에 다니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대학 어중간한 학과를 졸업해서 어중간하게 취업이라도 하게 되면 좀 낫지만, 그것도 안되면 참 큰일이겠다 싶었다.  아들의 꿈이 요리사라서 공부를 남들보다 경쟁력있게(?) 잘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십대의 마지막 시절, 그 3년을 좀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순 없을까, 그게 내 고민이었다.  기왕이면 졸업과 동시에 아득히 까마득히 지워져버릴 지식을 주입받느라 애쓰기 보다는 요리사가 될 아들이 몸도 쓰고 마음도 쓰고, 잘 생각하기를 배울 수 있는 학교가 필요한 것 같았다.   

처음엔 산청 간디학교를 생각했다.  여름에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청에 잠시 들러 학교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어쩐일인지 아들이 싫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지가 싫다는 걸 내가 강제로 가자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다가 도서관 선생님에게 '산마을 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강화도에 있어서 일단 산청보다 훨씬 가까워 좋았다.  아들이 따로 검정고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인가받은 특성화 대안학교라서 더욱 좋았다.  학교의 교육목표가 자연, 평화, 상생을 바탕으로 '사유하는 학교, 땀 흘리는 학교, 마음 나누는 학교'라는 것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바라던 바를 어쩌면 이렇게 쏙쏙 뽑아서 교육목표로 만들어 놓았는지!!!)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리 저리 구경을 하고 다니다가 10월 9일에 입학설명회가 열린다는 공지에 얼른 신청댓글을 달아놓았다.  

10월 9일, 남편, 아들, 그리고 막내 유빈이와 함께 강화도 산마을 고등학교에 다녀왔다.   

 

 

 

 

 

 

  

가장 먼저 야트막한 집들이 눈에 띄었다.  홈페이지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서 보니 푸른산 푸른 하늘 아래 야트막한 지붕의 집들이라...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학교 건물과는 참 달랐다.  인간관계가 수직의 상하관계가 아니라 평등하게 어우러지는 관계라는 것,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게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걸 아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학교를 지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건축 특성상 식당도 따로 집 한채, 교실도 따로따로 집 한채, 도서관도 따로 집 한 채, 교무실도 따로 집 한 채, 컴퓨터 실도 따로 집 한 채, 기숙사도 학년별 성별로 따로따로 집 한 채 씩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왼쪽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도서관, 교실, 식당, 컴퓨터실이다. 물론 아이들 밥은 채식위주의 유기농 식단으로 제공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들 사이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길들이 참 정겹고 예뻤다.

 

 

 

 

 

 

 

 

왼쪽 사진은 기숙사로 가는 길, 오른쪽 사진은 도서관 앞 모퉁이 화단이었던 것 같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자연과의 상생을 배울 수 있겠다고 느끼게 한 장소가 세 군데가 있었는데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학교에 들어서면 운동장 스텐드 지붕처럼 보이는 태양광 집열판들이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학교에서 쓰고 남은 전기를 인천시에 판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3평씩 주어진다는 학교 텃밭.  텃밭 옆에는 삽이며 호미등이 즐비한 농기구 창고가 있었고, 작은 트랙터(맞는지 모르겠다)도 두어 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유난했던 날씨 때문에 아이들의 농사도 신통치 않았던 걸까?  밭이 좀 볼품이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학교를 떠나올 때쯤 화장실에 들렀을 때였다.  나무로 지어진 화장실 건물이 특이하다 싶긴 했는데 안에 내부도 나무.  나무로 사람이 앉을만한 높이로 정육면체모양의 틀을 짜서 좌변기의 윗틀만 얹어 놓은 모양의 재래식 화장실이다.  게다가 화장실에 앉았을 때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뚫어놓은 20센티미터짜리 자 크기 만큼의 창문. 하하하, 볼일 보면서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라는 배려란다.  그리고 화장실 한 쪽 구석 고무통에 쌀겨가 들어있는데, 볼일을 보고난 후 쌀겨를 바가지로 퍼서 넉넉히 뿌려주는 게 이 학교 화장실의 에티켓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퇴비로 변한 우리의 신성한 자연물은 아이들의 생태농업에 쓰인단다.  신기하게도 화장실에선 냄새가 거의 없었다.   말로만 상생과 평화를 외치는 학교는 아니구나 하는 신뢰가 생겼다.
 

 

학교를 나서면서 아들에게 뭐가 제일 맘에 들었냐고 물었더니 기숙사가 가장 좋았단다. 우리가 들어간 기숙사 동은 1학년 남자아이들만 쓰고 있는 통나무 집이었던 것 같다. 한 방을 4명이 쓰고 세탁실에 장애인 전용 화장실, 한쪽에 책들이 즐비한 거실, 그리고 외국인이 왔을 때 묵어가는 방까지 갖췄고, 깔끔했다.

 

 

 

 

 

 

 

이 학교는 30년 전통의 일본 자유노모리학교와 교류하고 있고,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미국, 영국, 프랑스, 싱가폴, 중국, 이스라엘 등지에서 우퍼들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우퍼(WWOOFER)란 유기농업을 하는 농장에서 하루 4시간의 일을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여행자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학생들과 함께 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수업도 함께 듣는단다.  

이렇게 엄마, 아빠, 오빠가 학교를 설명회에 참석하고 학교를 둘러보는 동안, 막내는 뭘했을까?
 

 

 

 

 

 

아기 고양이들과 놀고, 이 학교 아이들이 10월 초에 있었던 축제에 지었다는 인디언 천막에 들어가서도 놀고.. ^^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갯벌에서 오누이는 정답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들이 꼭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학생을 남녀 합쳐서 단 20명밖에 뽑질 않는다.  
게다가 학교 스텐드를 꽉 채워서 뒤에 서서 듣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입학설명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많았다.  경쟁율이 너무 세다.  윽, 여기서도 '경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다니!!! 
어떻게 되든 입학원서는 내볼 생각이다. 정말 탐난다, 그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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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10-13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페이퍼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와 입시의 지옥으로 내몰지 않고 이렇게 자연을 벗삼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모두의 로망일텐데 이런저런 핑계 현실의 직시 등으로 짓눌려 있던 마음이 눈녹듯 녹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쌩유 ^*^

섬사이 2010-10-20 23:38   좋아요 1 | URL
어제 아이의 입학원서를 우편으로 부쳤습니다. 입학정원에 비해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떨어지면 아이의 실망이 클 것 같아서요.
저런 학교가 '로망'이 아니라 '일반적'인 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점도 한동안 싱숭생숭했습니다. ^^

치유 2010-10-15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학교가 이래야 되는데 말이죠..아이들을 위한 학교말여요...

섬사이 2010-10-20 23:41   좋아요 1 | URL
아, 배꽃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와락, 안아드려요. ^^
'모든 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교육이 펼쳐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다양함 속에서 차별받지 않는 교육이요.
너무 꿈같은 이야기일까요...???

BRINY 2010-12-20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쟁이 없는 곳이 없네요. 공부에 뜻이 없으면 차라리 자유롭고 즐겁게 대안학교에서 학창생활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안이했군요.
 

지난 주에 내 생애 첫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  도서관 관장님이 멍석깔고 판을 벌여서 내가 속해있는 책고르미 모임에게 독서모임의 주도적 역할을 부탁해서 시작된 거다.  돌이켜보면 애서가 축에는 끼지 못하더라도 책 읽기를 나름 즐기는 편이었는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독서모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책읽는 건 좋지만 읽은 책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건 피곤하고, 남들 앞에서 책 읽고 난 후의 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인다는 것도 탐탁치 않았고.. 뭐, 이런 저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도서관 모임이 '마음을 여는 책읽기'라는 엄마들의 독서모임을 주관하게 되어 얼떨결에 하게된 모임이지만, 부담이 덜 했던 건, 우리가 주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신동호 시인이 함께 모임을 진행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뭔가 한 수 배우게 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 

독서모임의 첫번째 책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였다.  10명의 엄마들이 서로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이야기 했는데, 다행이었던 건, 그 책을 읽고 울었다는 사람은 단 두세명에 불과했다는 것.  나만 메마른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난 28쪽의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들 공감해주었다.   

신동호 시인은 우물에 대한 이야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덧붙이셨다.  
1. 우리의 여성으로서의 감정의 우물을 시멘트로 덮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2. 실재의 우물은 누가 덮는가. 
3. 우물을 덮고 있는 시멘트를 걷어낼 생각은 없는가.
  

대부분의 엄마들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우물을 덮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재의 우물은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산업개발주의에 의해 덮였다는 설명이 있었고, 시멘트를 걷어내고 내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걷어내기가 두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시인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은 "모성은 절대불변의 영원성의 가치를 지녔는가"였다.  여러 엄마들이 희생이 곧 모성은 아니며 모성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는데, 시인선생님은 "모성은 근대산업사회의 산물이다"라는 미셀 푸코의 말을 인용하면서 근대이전의 사회에서 아이는 곧 노동력일 뿐이었으며 근대산업사회의 규격화의 시기가 '갇힌 여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시대의 우물을 걷는 여성'이 되라고.  자기의 추억을 만들어가며 사회 안에서의 나, 통시적인 시각에서의 내 인생을 조망하는 여성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모임을 끝내고 나니 <엄마를 부탁해>라는 책이 단순히 가족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끌어주는 분이 계시니 책을 읽고 나서의 생각도 한차원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다.  

다음 목요일에 있을 두 번째 모임의 텍스트는  오기가니 나오코 감독의 일본영화 '카모메 식당'이다. <엄마를 부탁해>모임 그 다음 날 오전에 도서관에 모여서 미리 영화를 봤다.  작년인가에 봤던 영화인데 두 번째 보니 더 좋다.  난 왜 <엄마를 부탁해>보다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더 콧등이 시큰해지는 걸까. 작년에 볼 때에도 사치에가 미도리에게 밥을 차려주는 장면에서 울컥했더랬다.   

'마음을 여는 책 읽기'모임의 커리큘럼이 조정될 예정이다.  시인선생님이 자연과학과 인문학 책을 좀 넣어보자고 하셨고, 우리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모메 식당 다음에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그러고나서 <욕망하는 식물>을 가지고 모임을 갖기로 했다.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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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1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책을 읽고 감동하고 마는 것 보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의견을 주고 받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어 이런 모임 참 좋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내 생각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고요. 시인께서 함께 하셨다니 더 멋져요.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서 '모성'에 대해 저런 생각까지 저는 못해보았네요. 모성하면 바로 희생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의 이면을 생각해보게 되어요.
잘 읽었습니다. <카모메 식당> 역시 저 혼자 보고 만 영화인데 어떤 의견들이 오갈지 기대되네요 ^^

섬사이 2010-10-11 21:45   좋아요 0 | URL
네, 첫 독서모임이었는데 참 괜찮았어요.
앞으로도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아요.

무스탕 2010-10-1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부분이 모질런 사람이지만 특히나 이런 부분에서 취약점을 보이는 저는 독서모임 같은건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지요.
그저 혼자 읽고 혼자 평하고 혼자 결론 내리고..;;; 한없이 주관적인 탕이죠? ^^;;
강의 듣는건 좋아하는데 '네 의견을 말해' 라고 하면 정말 자신이 없어져요.
그래서 이렇게 섬님이나 다른분들이 올려주는 글들에 참 감사해요, 전.
<카모메 식당>은 제목만 아는데 더 찾아봐야 겠어요 :)

섬사이 2010-10-11 21: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책을 읽고 모여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죠. 게다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지정된 책을 말이에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괜찮더라구요. <카모메 식당>, 제 개인적으로는 참 괜찮은 영화였어요.

토토랑 2010-10-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서 이런 얘기를 나눌 수도 있는거군요~

역시 멋진기회 부럽습니다.
전..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와 그 자전거 도둑 아저씨와의 인연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았는데 말이죠 ^^;; 곰소였던거 염전으로 이사간 아저씨를 찾아나선 엄마의 모습이. 그 엄마를 마주하고 숨이 딱 막혀하더라는 아저씨의 그 짧은 장면이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요. 정신을 놓고도 엄마의 이름을 부르던 그 모습도요..

여튼 멋진 기회 부럽습니다~

섬사이 2010-10-11 21:49   좋아요 0 | URL
자전거 도둑 아저씨와의 만남이 엄마의 두껍게 덮힌 우물 바닥에 흐르고 있는 찰랑이는 우물물 아니었을까요. 저도 책 속의 엄마에게 그 아저씨와의 만남이 있어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

순오기 2010-10-12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첫 독서모임 하셨군요. 이끌어주는 분이 있다니 좋겠어요.^^
내일은 중학교 독서모임인데...

섬사이 2010-10-12 11:34   좋아요 0 | URL
네, 엄마들끼리만 했으면 독서모임이 아닌 수다모임이 될 확률이 높았을 거예요. 순오기님같은 분이 계시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