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매주 두 번, 화요일 목요일마다 ㄷ 대학에 간다. 아침에 서둘러서 꼬맹이 딸 학교에 보내고 나서 화장도 하고 옷도 신경써서 골라 입고 지하철 타고 가서 풋풋하고 상큼한 대학 캠퍼스 안에 발을 딛는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이어지는 강의를 듣고 있으면 딱딱한 강의실 의자와 내 넉넉한 엉덩이가 서로 싸워서 아프기도 하지만 점심시간에 맛볼 수 있는 5천원짜리 깔끔한 대학식당 밥이 아픈 엉덩이도 다 잊을 수 있게 해준다. 점심을 먹고 강의실까지 걸어오는 길에 싱싱한(?) 청년들의 씩씩한 뒷모습과 잔디밭 벤치에 가을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그들의 환한 얼굴에 내가 힐링이 되는 걸 느낀다.  말마따나 대학 캠퍼스를 걸으면서 이 중년의 아줌마는 젊은 기를 흡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섭다.  강의실 뒷편에 준비된 커피와 녹차는 또 얼마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지.  난 사소한 것에 감동할 줄 아는 여자다. 원두커피나 믹스커피나, 다기에 우려낸 녹차나 티백 녹차나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한 한 잔을 즐길 줄 아는 여자다. 난 이런 내가 좋다.

 

올해는 도서관에서 인연을 쌓아온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고, 운이 좋으면 그 그림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는 걸로 마무리가 될 거라고 여기고 이제 연말까지 내가 걷던 걸음의 속도로 느긋하게 시간 위를 걸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덕분에 "누가 올 한 해동안 한 일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늘 한 가지 정도 대답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게 한해가 저물어 갈 때마다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막판에 도서관 관장님의 추천으로 ㄷ 대학에서 '육아실무코칭과정'을 12월까지 주 2회씩 듣게 됐다. 사실 뭘 하는 건지도 제대로 모르고 일단 시작을 해 본 건데, 첫 날 나눠준 커리큘럼을 보니까 유아동기의 발달과정과 다양한 놀이와 교육에 대해 배우고 나서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와 접목을 시켜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같다.  같이 강의를 배우는 분들 중에는 아동미술심리치료라든가 영어교육, 혹은 유아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도 많았다.  관장님이 내게 이 교육과정을 추천한 것은 이런 일련의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그림책을 비롯한 어린이 문학에 대한 정리를 해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사실 지난해에 초등과정에 알맞는 각 분야의 책을 추천하는 목록을 만드느라 어린이책을 급하게 많이 읽었더래서 그런지 올해는 어린이책들을 좀 뜸하게 읽었던 게 사실이다. 

 

이 교육과정을 듣고 내가 뭘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좀 안이해져 있던 내가 확실히 자극을 받고 있기는 하다. 강의에 오신 분들이 어찌나 열심히 살고 계신 분들인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 마지막에는 배운 것과 내 관심분야를 접목시켜서 발표를 해야 하니 미리미리 자료도 찾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기분이 좋다. 

얼린 샤베트를 깨문 기분. 

싸늘한 초겨울 밤에 혼자 달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

뜨거운 여름날 얼음짱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근 기분.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풀기 전의 기분.

좋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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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었다. 몇 해 전부터 유명세를 탔던 소설이다. 누군가 추리소설이라고 그랬다. 난 추리소설이랑 잘 안맞아, 하고 서점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자주 마주치던 이 책을 외면하고 지냈다. 누군가 아주 재미있다고 그랬다.  그 '재미'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더 읽고 싶지 않아졌다. 재미있는 건 좋지만 재미밖에 없을까봐 꺼렸다.

얼마 전에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딸아이를 기다리다가 이 책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도구로 삼아볼까 싶은 마음으로 서가에서 뽑았다.  그러다가 집에까지 데려왔다.

이런 책을 추리소설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을 믿지 말아야 했다.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을 단서와 증거를 따라가며 해결하는 얼개를 가진 소설이다.  이 소설도 단서를 찾고 퍼즐을 맞추듯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겐 그것보다 인간의 내면을 후벼파는 이야기로 읽혔다.  추리소설도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겠지만 이 책은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사건보다 사람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는 거다.

아주 재미있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도 듣지 말아야 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아팠고, 그 아픈 이야기가 분노의 질주처럼 전개돼서 나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숨이 가빳다. 다 읽고 책의 마지막 장까지 덮고 나니까 거친 길을 온몸에 힘을 주고 엉덩이가 아프도록 달리다가 차에서 내린 기분이었다. 

남성적 이야기라 더 그런건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도 거의 남성이고 여성이라곤 그나마 비중있는 인물이 악착같은 김은주나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문하영 정도니까.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덩치좋은 남자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매고 다닌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에 휘말려서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기에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없었던 것 같은, 혹은 LTE급 속도감에 음미할 시간이 부족했던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잠시 호흡을 멈추고 음미할 부분을 찾을 새도 없이 숨차게 읽고 끝낸 느낌.  그게 좀 아쉽다.  소설 한 권을 두고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걸까?  그래도 '흡!'하고 숨이 멎는 결정적 한 줄을 발견하는 것도 책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인데 말이다.  

 

그래도 사건을 풀어가는 핵심인물 승환과 서원이 잠수에 능하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심연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더랬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떠올랐고.

사건이 해결되는 장소가 등대마을에 있는 등대 안이라는 것도. 어둠 속으로 길게 하얗게 찰나의 빛선을 긋는 등대는 그 본연의 목적성 때문에 서원이 한솔등 쌍둥이 소나무에 묶여 정신을 잃었을 때 세령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환상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진실은 빛선이 지나며 보여주는 찰나의 장면처럼 간파하기가 쉽지 않은 거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조금 느리게 다시 읽어봐야 하는 걸까?  ............. 뭐,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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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맞이하여 도서관에서 3회의 책모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어제가 그 첫 시간.  몇 년 전에 책읽기 모임을 이끌어 주시던 신동호 시인께서 오셨다.

어제 이야기를 나눈 책은 [3시의 나].

 

선생님까지 9명이 모여 앉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각자 꽁꽁 묶어 간직했던 9개의 자루들이 한쪽 귀퉁이 실밥이 풀리면서 안에 담아두었던 뭔가가 흘러나와 각각의 서로 다른 향기를 풍기며 섞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자루에서 흘러나오는 느낌과 생각의 향기들이 신선하게 다가와 이 시간이 좋아질 것만 같다.  

숙제를 받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을 딱 1주일 동안 기록하는 거다. 이 책의 작가처럼.....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했다. 책상 위를 찍어도 좋고, 주방을 찍어도 좋고, 거리를 찍어도 좋고...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체국에 들러 우편물을 보내고, 터벅터벅 햇살을 받으며 정류장까지 걸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일매일 '다름'이 있다고,

또는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다름'이 있다고 그랬다.

수많은 오늘의 '다름'과 수많은 나의 '다름'이 중첩되면서 반짝이는 물결이 되어 흘러가나 보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고프다 할 아들의 간식으로 KFC 매장에 들러 할인행사중인 신메뉴 버거를 주문했다.  주문이 밀려서 패스트푸드의 면모를 읽고 15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포기하고 돌아나왔을 텐데, 15분의 기다림이 여유를 선물받은 듯 싫지 않았다. 주문한 버거가 나올 때까지 전면 유리창 앞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나의 '다름'이다.

 

어제 모임에서 눈물을 보인 K가 마음에 걸린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몸도 마음도 아픈 모양이다. 언제나 의연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줬던 사람이라 더 안쓰럽고 마음이 간다.  카톡으로 '우리 같이 커피 마실까?'라고 보내려다 말았다. 너무 작위적인 냄새를 풍기는 공허한 멘트라고 느낄 것 같았다.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에 적당한 때에 조용히 다가가 '커피 마실래?'하는 편이 나도 K도 더 편할 것 같았다. 아니면 따끈한 곰탕이라도...  시린 속을 채우고 데워주기엔 곰탕이 더 나으려나?

 

10월 중에 우리가 그린 그림들이 더미북 형태로 만들어져 11월에 있을 북페스티벌에 공개될 것 같다.  분주했던 지난 해가 따오른다. 11월까지는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야할 듯.

 

 

이 그림은 일부분을 작업진행을 보기 위해 시험삼아 컬러프린트로 뽑아본 것이다.  이 부분에는 큰딸의 그림이 가장 많이 담겨 있다.  중국에 있는 큰딸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줬더니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아들이 큰딸의 스케치북 귀퉁이에 낙서처럼 끄적여 그려놓았던 새도 운 좋게 자리를 잡았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가는 걸 보며 한 해가 또 저물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2013년도, 그림 작업도 저어기 끝이 보인다. 서운함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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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되었다.  중년에 이른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꿈이나 꾸었을까.  그렇다고 내가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거나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도서관 모임의 사람들과 함께 멋진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되는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다.

 

저번 주에 나는 소나무를 한 그루 그려가야 했다.  소나무 말고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연산군과 연산군의 묘, 손병희 선생님과 손병희 선생님의 묘, 남산 팔각정, 낙타의 머리 등등도 그려야 했는데, 그런 것들을 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소나무를 그리려 할 때엔 아직 날이 밝기 전 캄캄한 새벽이었다.  (그림 그리는 여자일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느라 밤도 샐 줄 아는 중년의 여자라는 사실이 기쁘다.)

 

핸드폰으로 소나무 이미지를 검색했는데 키 큰 소나무가 밑둥부터 꼭대기까지 잘리지 않고 나온 사진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잘리거나 하지 않으면 겹겹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진이라 소나무들의 가지와 잎이 뒤엉켜 한 그루 소나무의 형태를 제대로 떠오기 힘들거나.

그래서 최대한 내 머리 속에 소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애를 쓰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나무 막대기에 강아지풀을 꽂아 놓은 모양...  혹시 모임을 같이 하는 다름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오해할까봐 '무지 어색한 소나무'라고 소심하게 해설을 달아놨다. 더러워진 빈 병을 닦기에 딱 좋을 것 같이 생긴 저 소나무를 사람들 앞에 내놓은 생각을 하니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가지고 갈 그림들을 체크하다가 저 소나무 그림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직접 보고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나 아이 자전거를 끌거나 무거운 장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가던 단지 길에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려니 이것 또한 어색하고 민망하고 쪼그라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열정을 가진 화가처럼 마음을 무장하고 소나무를 스케치했다.  그래서 탄생한 소나무 그림은 이랬다.

 

 

이 소나무도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강아지풀 꽂아놓은 막대기 같은 소나무보다야 백배천배 훨씬 나아졌다.  자세히 보니 소나무는 가지가 어긋나지를 않는다.  나란히 같은 높이에서 뻗어 나온다.  그리고 쭉 뻗은 가지 끝에 잔가지들이 뻗고, 거기에 바늘같은 이파리가 다닥다닥 무더기로 붙는 편이다.  소나무다운 소나무(?)를 그리려면 역시 '잘 보고' 그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날 미워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난 항상 도대체 쟤는 날 뭘로 보고 함부로 구는지 궁금했었다.  그 때 '날 좀 잘 봐봐.' 라고 얘기했으면 좀 나았을까? 그 아이 마음 속에 있던 나는 강아지풀을 꽂아 놓은 막대기같이 생긴 저 꼴사나운 소나무같은 것이었을까? 

혹시 내 마음 속 누군가도?

 

집중해서 잘 본다고 그대로 똑같게 그려지지 않는 그림처럼 (똑같이 잘 그린다고 해도 가령 앞모습을 그리면 뒷모습은 가려지니까)  제대로 잘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방향에서의 모습에서는 오해의 여지를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도 나무처럼 그 모양이 해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다른 방향에서 본 그 사람의 모습은 내가 모를 수 있으니까.  잘 본다는 건 중요하지만 본다고 그 사람의 면면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그 사람의 면면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어쩐지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기가 아쉽지만 그림 그리는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모이는 사람들 모두 열심히 그리느라 고생했는데 결과가 멋지게 잘 나왔으면 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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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0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그림 완전 잘그리셨는데요!! 멋져요!! >.<
그림그리는 여자라니, 환상적이네요!!!

섬사이 2013-10-03 00:00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이후로 물감, 붓, 물통, 빠레트 펼쳐놓고 그림을 그린 건 정말 오랜만이였어요.
네, 잘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는 시간만큼은 환상적이에요! ^^

프레이야 2013-10-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샐 줄 아는 중년여자사람, 아름다워요. ^^ 저도 시월부터 수채화에 도전해볼까하고 있는데 뭐가 잘 안 맞네요.

섬사이 2013-10-03 00:03   좋아요 0 | URL
언젠가부터 밤을 새고 나면 그 여파가 너무 길게 가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밤을 새본지 참 오래됐는데 그림 그리면서 밤을 세 번이나 샜어요.
학교다닐 때 미술시간에 그렸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요.
수채화, 도전해보세요.
프레이야님의 치밀한 감성이 그림으로는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해요.
 

 

 

이 책을 읽고 있다.

「3시의 나」, 아사오 하루밍이라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가

1년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오후 3시에 자기가 뭘 했는지를 짧게 기록해 둔 것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글의 기획이, 아이디어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그것도 막내가 이제 겨우 초등 2학년인 나같은 아줌마는

오후 3시에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 뻔해서

오히려 오전 11시쯤에 벌어지는 일들을 써야 글이 다양해질 수 있겠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궁리로 머리를 굴려보기도 했다.

 

책에 쓰여진 작가의 사는 모습이 활발하고 다양해서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읽다가 중간에 작가 소개글을 확인해보니 1966년생,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았다. 

이런 나이에도 이런 글이 나올 수 있구나,

난 나에게 다양한 무게의 추를 너무 많이 올려놓고 사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내 사는 모습을 돌아보며 고민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읽는 기분이 든다.

40대인 내가 10대나 20대 혹은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던 30대에 써놓은 일기들을 읽으면

당시엔 힘들고 지겹게 느끼던 것들이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뭐, 때론 창피하고 부끄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두툼하게 쌓인 지나온 시간의 더께가 그런 것들 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해줘서,

오래된 일기장을 읽고 나면  조금은 내가 대견하고 심지어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일들을 잘 견디며 살아줘서 고마워, 하는 기분이랄까.

오래된 일기같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지금의 내 모습에 그렇게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내 곁에서 따뜻한 인연이 되어준 사람들과 날카로운 상처가 되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의 작가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며 '간장 끼얹는 걸 깜빡 잊은 두부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난 한번도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너무 강하게 나를 휘감아서

거리를 두고 표현하고 묘사할 만큼의 여유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정말 작가구나, 싶었다.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넘치지 않도록 가스불을 지켜보며 조절하듯

분노와 미움을 객관화해서 표현하는 것이 작가적 능력이 아니고 뭘까. 

일반인인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이르지 못한 경지다.

그나마 이 작가가 나보다 나이가 쬐끔 더 많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 쬐끔의 차이 동안 과연 나는 감정의 가스불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될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그 느낌을 소중히 기록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게를 자르고 있는 엄마의 손가락에 끼워진 핑거코트, 자주 가는 식당이나 카페, 상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다정하거나 의아하거나 꼴불견인 모습들, 산책하다가 발견한 네모난 유채꽃밭, 같이 사는 고양이 냥코, 

지인들과 어울려 함께 한 식사와 여행 그리고 여러가지 일과 업무들. 읽은 책들에 대한 글들이 짧지만 친근하다.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서, 얼마전 한 종교방송에서 하느님을 섬길 줄 모르는 일본 같은 국가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부르짖던 어느 성직자의 주장이 정말 이루어진다면. 이 작가가 너무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성직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다.  TV를 보면서도 저 성직자 좀 오버한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일본에서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라면 나와는 사는 모습이 참 많이 다르겠지만

때론 우울에 빠지고, 지독한 감기로 고생하고, 무력감에 시달리고, 일에 지치고, 실수하고, 속상해하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힘을 빼고 쓴 글이라서인지 이질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내 인생이야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지금까지 살아온 모양대로 그렇게 주욱 이어가겠지만

그런 삶이라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마치 나태주 시인의 <풀꽃>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나온다. 

'수수한 것은 가까이 다가가야만 눈에 보인다.'라고.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일상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정하게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치게 만드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내가 생각한 건

우리의 일상은 소소할지언정 시시하지는 않다는 것.

나름 잔잔하게 빛나며 흘러가고 있다는 것.

 

음,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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