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에서 나온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이라는 책이 있다. 옛이야기 그림책들을 조목조목 비교하고 살펴서 구전된 옛이야기의 화소들을 지나치게 생략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잘 담아냈는지, 글과 그림이 서로 소통하며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지 등등을 분석해 놓은 책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지만, 어떤 그림책이 제대로 된 그림책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꽤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를 다루면서 오누이가 똥이 마렵다고 둘러대면서 호랑이로부터 도망치는 대목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이 대목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용기로 호랑이와 맞서 처음으로 이기는 통쾌한 대목'이라면서 '옛사람들의 이야기철학, 삶의 지혜, 해학을 잘 느낄 수' 있으며 '공포와 웃음이 교차하는, 긴장미와 골계미가 절묘하게 배합된 대목'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서 '똥 마렵다고 둘러대는 대목'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대부분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대목이 들어간 그림책으로 시공주니어 본이 유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글과 그림의 부조화, '옛이야기 보여주기'와 '옛이야기 들려주기'의 차이가 낳은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호랑이는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림에서 해학과 익살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송수정이 그렸어야 할 그림은 달아나는 오누이의 겁먹은 표정이 아니라 어수룩한 호랑이와 기 싸움을 벌이는 오누이의 침착하고 당찬 표정이다. 그림으로 표현해야 할 분위기는 오누이의 마음속에 자리한 거대한 공포가 아니라 오누이와 호랑이가 벌이는 기 싸움을 어른들의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입말로 들으면서 아이들이 느꼈을 이야기판의 분위기다.'라고 꼬집고 있다.
반면에 국민서관 본 <해님달님>은 '글과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룬 책,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책'으로 분석하고 있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를 잘 살려서 그림이나 글에 놀라울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다'고 하면서 '송재찬의 간결한 글과 디테일을 생략하고 민화기법을 응용한 이종미의 호랑이 그림은 하나로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다.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이 2009년 말에 출간되었는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다룬 부분은 <창비어린이> 2007년 봄호에 실렸던 글이다. 아마 그래서 2007년 이후에 나온 그림책들이 이 글에서 논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2009년 3월에 출간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김성민 글,그림/사계절)가 이 책에서 다뤄지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여우누이>도 같은 작가의 책인데, 사실 난 이 작가의 판화그림이 으스스하면서도 나름 귀염성이 보여서 좀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튼 이 그림책은 '똥이 마렵다고 둘러대는 대목'이 간결한 글로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국민서관 본에도 다른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림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기 손가락' 모티브까지도 담겨 있다.
'아기 손가락' 모티브는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와 오누이의 젖먹이동생을 안고 가서 잡아 먹는데 '오도독 오도독'소리를 듣고 오누이가 "엄마, 뭐 먹우?" 하니까 "부잣집에서 콩 볶은 거 줘서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누이가 '우리도 좀 주우.'하니까 아기 손가락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원래 구전설화에서 오누이가 호랑이로부터 도망가려고 결심하는 것은 치마 밑으로 삐죽 비어져나온 호랑이 꼬리를 봐서가 아니라 호랑이가 던져준 아기 손가락을 보고서라고 한다. 이 그림책에서는 호랑이가 아기를 잡아먹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다만 호랑이가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를 안고 가는 장면만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한 가지 더 눈에 띈 것은 오누이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서 팔과 다리를 내어주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그림책에서 너무 잔인해서 그런지 이 장면을 아예 생략해버린 책들도 있고 아니면 이 장면을 글로만 이야기하고 지나가는데 이 책은 그림으로도 표현해 놓았다.
이 장면은 엄마가 이미 팔다리를 호랑이게 주고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팔을 잃고 헐렁한 저고리 소매와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껑충 달려드는 호랑이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으로는 끔찍하게 상상되는 이 장면이 생각보다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충격일 수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위 책의 저자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머니의 몸이 조금씩 해체되는 과정은 매우 제의적이다. 오누이가 빛을 발하는 해와 달로 탄생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을 어둠의 제물로 바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중략).... 그렇기에 어머니의 몸이 잘려나가는 과정을 어린 영유아에게 들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유년기 이상의 아이들에게는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공주니어 본에서 오누이의 겁에 질린 표정과 크게 과장되게 그려진 호랑이가 문제가 되었었는데 이 그림책에선 어떨까.
똥 마렵다고 둘러대고 오누이가 도망치는 장면이다. 판화라서 절제된 색을 썼기 때문인지 이 그림책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톤으로 되어있다. 요란한 색으로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확대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망가는 오누이의 표정에서도 경계심은 느껴지지만 공포를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앞 그림 속 호랑이의 모습도 아둔해보이고 이야기 내용과는 다르게 그렇게 사납거나 무서워보이진 않는다. 오누이가 꾀를 잘 쓰면 어수룩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을만큼 헛점도 있어 맹수 호랑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골탕 먹여도 좋을만큼 만만해보이기도 한다.
이만하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이야기라 그림에서까지 공포를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의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가 숨은 오누이의 모습이다. (왼쪽 그림에서 오누이 부분을 좀 더 크게 찍은 것이 오른쪽 그림이다) 어린 누이동생의 입가에서 미소가 번지고 있고 곁에 앉은 오빠의 얼굴엔 살짝 근심이 묻어난다.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며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냐고 묻는 호랑이는 충분히 멍청해보인다.
글도 간결하다. 나쁜호랑이, 가여운 오누이 어쩌구 하는 구구절절 너저분한 설명도 없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약 이 책이 2007년 이전에 나왔다면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에 분명 좋은 예로 소개되었을 것 같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가 새롭게 패러디된 그림책도 있다. <호랑이 잡는 도깨비>라는 책인데 '이형진의 옛이야기'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제목에서 눈치를 챈 분들이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과 호랑이의 입장이 바뀐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탐욕스러웠던 호랑이는 이제 피해자가 되고, 호랑이에게 쫓겼던 인간은 호랑이를 사냥하는 가해자, '인간'이라는 이름의 도깨비가 된다. 마을잔치를 도우러 간 엄마 호랑이가 '갑자기 튀어나와 번갯불 한 방'으로 목숨을 앗아가는 도깨비에게 희생당한다. 엄마 호랑이 가죽을 얻은 도깨비는 어린 호랑이 가죽도 얻기 위해 오누이가 있는 호랑이 집을 엄마 호랑이처럼 꾸미고 찾아간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구전설화처럼 인간도깨비는 젖먹이 아기 호랑이를 먼저 해친다. 이것을 본 누이 호랑이가 오빠 호랑이를 다그쳐 썰매를 타고 호수로 달아난다.
하지만 대나무를 갈라서 타고 오는 인간도깨비에게 잡힐 것 같아지자 누이 호랑이가 하늘님께 살려달라고 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호수의 얼음이 갈라지면서 호랑이 오누이는 차가운 호수에 빠져 죽고 인간도깨비는 허둥지둥 호숫가로 몸을 피해 도망간다. 죽은 호랑이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하늘님을 만나 억울함을 따지는데 하늘님은 '목소리는 들렸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단다'하면서 해와 달을 만들기로 한다. 원래의 이야기처럼 게으름뱅이 오빠는 해가 되고 바지런한 누이는 달이 되는데, 오누이가 환생해서 만들어진 해와 달은 단순히 빛을 밝히는 기능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호랑이 잡는 도깨비를 감시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빗대어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오만과 잔인함을 꾸짖는 내용이라서, 어쩌면 하늘의 해와 달도 이미 오래전에 호랑이 편으로 마음을 돌렸을 것 같기도 해서 가슴 뜨끔거리며 불편해지는 책이었지만 그 내용이 담고 있는 경고의 메시지는 의미있게 다가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원래의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는 달리 부지런하고 영리한 누이와 게으르고 둔한 오빠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아마 옛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상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이 좀 거칠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겨서 익살과 해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는 점 (인간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익살과 해학은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해와 달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는 바람에 좀 뜬금없었다는 점이 좀 아쉽다. 너무 어린 아이들에겐 적당하지 않을 것 같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충분히 알고 좀 심각하고 진지한 고통의 패러디를 소화할 수 있을 만한 적어도 초등이상이 읽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책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이담 그림/보리)다.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6.25 전쟁 이야기'라는 부제가 따라 붙은 이 책은 30년 전 6.25 때 죽은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의 영혼이 전쟁과 분단에 대하여 나누는 이야기가 우울하고 어둡다. 그리고 이 그림책 속에 들어있는 '해와 달이 결코 될 수 없었던 오누이 이야기'는 가장 슬프고 비극적이고 무섭다. 이 이야기에서는 호랑이가 두 마리 등장한다. 두 마리가 함께 엄마를 잡아먹고 오누이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앞문과 뒷문에 각자 자리를 잡고 서로 자기가 진짜 엄마라며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등골이 오싹하도록 으스스하며 긴장감이 극으로 치닫는다.
아이들은 서로 이쪽이 진짜 엄마라며 싸우다가 앞문 뒷문을 다 열어버리고 만다.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는 아이 하나씩을 물고 사라진다. 구해주는 하느님도 없고, 구전설화에서 볼 수 있는 익살과 해학도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힘을 모으는 방법,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하지 못 한다. 절대 강자인데다가 음흉스러운 호랑이를 당해내지 못 한다.
이 이야기는 민족분단의 비극에 대한 은유다. 그림책 속 오푼돌이 아저씨의 가슴에서 30년 동안 흐르고 있는 피의 근원적 상처를 보여주고 전쟁으로 죽어 이 땅을 떠돌고 있는 아픈 영혼들을 위한 구슬픈 진혼곡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을 읽다보면 이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져 온다. 유난하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시끄러운 요즘의 작태를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지. 갑자기 산처럼 든든한 분들이 그리워진다. 그립지만 다시 뵐 수 없는 분들이 너무 많아졌다.
옛이야기의 화소들을 확인하고 그 화소들이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 파헤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림과 글이 아이들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독자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좀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착각하는 일 없이 다시 확인하고 점검해서 그 가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 그 견고한 바탕 위에서 더 훌륭한 패러디가, 현대에 맞게 재해석된 이야기들이 쌓여갈 수 있는 게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