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벼웠다. 읽어야할 책이나 준비해야할 생각 없이 만남에 대한 기대만 안고 가면 됐으니까. 백창우 선생님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는 '시인'보다는 '노래' 쪽에서 백창우 선생님의 존재를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되고>라는 백창우 선생님의 시집도 있지만 송구스럽게도 우리집 꼬맹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라는 백창우 선생님의 노래집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받아보는 <창비어린이> 속에서 손글씨 그대로 인쇄된 백창우 선생님의 글과 악보를 봐왔기 때문인지 '시인'보다는 '노래 만드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꽃은 참 예쁘다 / 풀꽃도 예쁘다 /
이 꽃 저 꽃 저 꽃 이 꽃 /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이 짧은 노래말은 때때로 내게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해서
놀이터 아이들이 모두 꽃처럼 예뻐 보이게 만들고
나를 여유롭고 너그럽고 밝은 사람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이 노래집을 이웃집 일곱살짜리 남자아이에게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는 이 노래집 속에 등장하는 '귀봉이 형'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다.
'귀봉이 형은 좋겠네 / 날마다 낚시하니까
귀봉이 형은 좋겠네 / 날마다 물가에 나가니까
귀봉이 형은 좋겠네 / 귀봉이 형은 좋겠네
날마다 물가에서 물고기들과 노니까 '
아마 노래에서 느껴지는 '귀봉이 형'의 빛나는 놀이의 자유가 부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노래집 속엔 잊고 있던 아득한 동심의 세계가 재미있고 신 나게 담겨있어서 꼬맹이와 나의 애창곡이 된 노래가 많다. <맨날맨날 우리만 자래>라는 노래집에도 유치원 아이들의 귀여운 동심을 엿볼 수 있는 노래들이 많은데, 이 책 뒷 부분에 소개된 '카주'라는 악기를 보고 낙원악기상가에 가서 꼬맹이에게 그 악기를 사준 적이 있다. 대여섯살 아이가 쉽게 가락을 연주할 수 있는 참 착한 악기라서 한동안 얼마나 재미있고도 시끄럽게 불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러니 백창우 선생님이라는 분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목소리는 어떨까,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하니 설레기도 했고.
백창우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셔서 준비하시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스누피였다. 생각보다 연세가 좀 있어 보였고 (나중에 보니 나보다 8살 위였다), 단발 스타일의 머리, 어쩐지 담배와 커피를 즐기실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자켓을 벗으시자 스누피 티셔츠가, 내려놓는 가방도 스누피 가방, 가방에서 꺼내놓는 파일도 스누피 파일, 볼펜도 스누피 볼펜, 기타에도 스누피가. 선생님의 소지품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스누피 덕분에 선생님에 대한 낯설고 어려운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선생님이 어렸을 적 헤럴드 영자신문에 연재되는 스누피를 무척 좋아하셨고, 지금도 스누피는 선생님의 오랜 친구같은 느낌이라 스누피가 들어간 물건과 인형들만 보면 구입해서 식구처럼 데리고 지내신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감성을 잘 간직하며 사는 분인 것 같다. 나도 어릴 적에 '캔디'며 '빨간 머리 앤'에 열광한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내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엄마들 마음에 '시심'을 깨워보자시면서 '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며 한 줄 짜리 시를 예로 들었다.
'너무 길다'
기타 반주를 곁들여서 낭독해주신 단 한 줄의 시,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가 쓴 시라고 한다. '제목이 뭘까요?'하고 물으시는데 다들 어안이 벙벙. 밤, 넥타이, 국수.... 등등의 대답이 나왔는데 모두 '땡!' 정답은 '뱀'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뱀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른 생생한 느낌이 담긴 시라고 하셨다.
그럼 두 줄짜리 시.
'시계 세 개가
제각기 제 길을 간다'
백창우 선생님의 시다. 한 번 시계를 사면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시간을 다시 맞춰놓는 일이 없어서 어느 날 무심코 보니까 방 안에 있는 시계 세 개가 모두 시간이 제각각이더란다. 그래서 나온 시라고.
선생님은 세 줄 짜리 시로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네 줄 짜리 시로 아이들이 지은 '감자꽃'이라는 시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시들을 듣고 있다가 어느새 엄마들은 '시'에 대한 경계심을 슬쩍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살아오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잊었던 마음들이 있었다. 그 잊었던 마음들이 노래 속에, 시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스스로 뻑가는 일' 하나쯤 갖고 살라고 하셨다. 그래야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세히 살피는 눈'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래야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을 예쁘게 바라볼 수 있다고. 말썽장이 아이일수록 더 자세히 잘 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 그 아이의 예쁜 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많이 아는 아이로 키우기 보다는 많이 느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아이의 미래를 담보를 현재를 차압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아무 것도 아닌 엄마'가 되지 말라고,
엄마도 자기만의 삶을 따로 가져가야 한다고,
하셨다.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참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예쁜 마음도 내가 가진 잘못된 거울로 비춰봤기 때문에 일그러져 보였던 적도 많았을 것이다. 엄마인 내가 더 커지고 넓어져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는 '어린이 음악 박물관'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하셨다.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거기서 가족들이 함께 와서 들을 수 있는 콘서트도 열고, 꼭! 잔디밭에는 '들어가도 됩니다'라는 팻말을 세울 거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아이들도 꼭 '꿈'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 '꿈'이 꼭 이루어질 거라 믿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정말 마음이 말랑말랑 따끈따끈해지는 시간이었다. 파주출판단지 아시아출판정보센터에서 내년 4월까지 백창우 선생님과 이태수 선생님이 함께 하는 상설전시가 열린다고 한다. 꼭 가볼 것을 약속했다. 전시제목은 '백창우 이태수의 조금 별난 전시회'. 책고르미 엄마들이랑 한 번 뭉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육잠스님의 '생명불식전'도 소개해주셨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고난 바로 그 다음 날, 책고르미 엄마들이 인사동으로 출동했다.
서예작품과 서화가 함께 전시되고 있었는데 단아한 듯 하면서도 힘차고 독특한 서예작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전시된 서예작품들 중에서 '莫問收穫 但問耕耘 (막문수확단문경운; 수확은 묻지 말고 다만 밭갈고 김매는 일만 묻는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읽는 순간 가슴이 뜨끔. 성급히 일을 이루려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지라, 하루하루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서둘지말고 해나가라는, 나에게 딱맞는 맞춤형 경구였다. '생명이 있는 것은 쉬지 않는다'라는 뜻의 生命不息이란 말도 참 좋다.
'생명불식전'을 보고 바로 옆에서 열린 '세계의 책 전시회'였나, 하는 것도 봤는데 처음으로 갑골문자를 실제로 봤다. 가로세로 1mm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도 보았고, 옛지도며 파피루스, 죽간들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니어처 박물관'도 찾아가봤는데,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민망하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음, 작업실 옆 공간에 작품들을 전시해놓고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한 작은 전시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별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정교하고 예뻐서 다들 놀라워했다. 특히 한 엄마는 중학생 딸이 이런 미니어처를 무척 좋아한다면서 나중에 딸과 함께 다시 와봐야겠다고 했다.
인사동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경인미술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아이들 올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돌아왔다. 스스로 뻑 가는 일 하나씩 갖고 사는 '자뻑클럽'을 만들어 볼까, 그럼 '자뻑클럽' 회장은 누가 좋을까, 아이들과 남편을 내려놓고 잠시 나만의 세계에 살짝 들어갔다 나온 느낌에 엄마들 모두 가볍게 즐겁고 행복했다.
백창우 선생님, 다음에는 꼭 '조금 별난 전시회'에 가서 선생님의 애장품 스누피들과도 꼭 눈맞추고 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