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I
캉프 부인이 공부방에 들어서면서 문을 하도 세게 닫는 바람에 샹들리에 유리 장식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맑고 가벼운 방울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책상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처박은 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캉프 부인은 아무 말없이 잠시 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앙투아네트 앞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넌 엄마가 왔는데 고개도 안 드니? 계속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거야? 참 대단도 하지. 미스 베티는 어디있니?" - P9

이제 앙투아네트는 일어서서 짝다리를 짚은 채 건들건들몸을 흔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열네 살 여자아이, 젖살이 빠져서 어른들 눈에는 이목구비가 또렷이 구별되지 않아 둥글고 밝은 얼룩처럼 보이는 그 나이 특유의 창백한 얼굴, 그늘진 두 눈 위로 내리깐 눈꺼풀, 꽉 다문 작은 입을... 그리고 꽉 끼는 교복 아래로 봉긋 솟아올라, 가냘픈 아이의 몸을 부끄럽고 불편하게 하는 가슴, 커다란 두 발, 붉은 손과 잉크가 묻은 손가락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팔이 될지 모를(누가 알겠는가?), 긴 작대기 같은 양팔, 가느다란 목, 특색 없이 푸석하고 가벼운 단발. 그랬다. 앙투아네트는 사춘기였다. - P10

.....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무서워했다. 앙투아네트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으며 쓰다듬어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 대신 그녀는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난 목소리의 파편들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 P11

<로즈 씨 이야기>
로즈 씨는 고양이처럼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는 순탄한삶을 살았고, 독신에다 부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깔보는 것 같은 거만한 표정을 지어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 P89

 그는 세상이 멍청이들로 가득하다고 믿는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싶을 정도로.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이었다. 그는매사에 몸을 사리고 앞뒤를 쟀다. 그의 지하창고는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그는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아주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한 남자를 알려면, 그가 식탁에서,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구는지 봐야 한다. 로즈씨는 과일을 깎을 때나 여자의 손을 어루만질 때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드러움과 신중함을 보였고, 섬세하지만 오래가진 못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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