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
성주체성장애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1980년에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DSM-III)에 아동기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of childhood)와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재되었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은 이후 청소년과 성인의 성주체성장애에 대한 진단명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성주체성장애라는 진단명은 ‘장애’라는 표현으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병리화하고, 트랜스젠더에게 정신장애라는 낙인을 추가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P10

이에 따라, 2013년 개정된 DSM-5에서 성주체성장애는 성별위화감으로 바뀌었다. 성별위화감은 출생 시의 법적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불일치함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 또는 위화감을 가리킨다. 성별위화감이라는 진단명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자체는 장애가 아니며,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것은 성별위화감으로 인해 트랜스젠더 본인이 느끼는 고통임을 강조한다. - P11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 - P18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는 과정은 모든 게 새로웠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고 그 뜻을 배워야 했던 면도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그 고정관념을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로서 쓴수많은 논문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는 남과 여로 고정된 것이었으니까.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 P19

연구실 학생들과 연구를 기획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할 때, 충분한 사전 검토와 고민이 없으면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동안 소방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조사나 전공의 근무 환경조사 같은 여러 연구를 진행하면서 애초 의도했던 계획이 실패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학생들이 막연히 궁금한 내용을 설문 문항에 포함시키도록 허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해서는 아직 설문조사를 진행할 만큼 당시 우리의 고민과 공부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았다. - P23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이 글을 논문으로 받아 줄 학술지가 있을까요?" 학생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이 한국 사회에 학술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는 점은 확신하지? 그러면 믿고 가자. 그런 글은 학술지가 분명 알아볼 거야." - P26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좀 더 준비를 하며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부족함을 감수하며 현재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의 연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만약 우리 연구가 세계의 구성원리를 파악하는 물리학 연구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건학은 인구 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응용학문이다.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집단은 그 공동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현재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방법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 P29

준비해 간 연구팀 소개글과 연재글을 보여 줬을 때 매니저분은 "대학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시죠?"라고 말하고는 우리의 눈을 피했다. 이혜민 선생님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희 글이 그 정도로 이상한가요?" 매니저분은 글이 나쁜 건 아닌데 많은 분들이 핸드폰으로 보실 텐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라고 했다. 나름 부드럽게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연구자스러운 글이었던 것이다. - P31

2017년 3월 23일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 우리가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대안적인 연구 형태로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던 우리의 여정이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받은 것 같았다. - P33

2016년 12월 <청소년 건강 학술지(Journal of Adolescent Health)》에 실린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와 하버드대의 공동연구였다. 10대 트랜스젠더 73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기 전에, 난자·정자 보관(Fertilitypreservation)을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것이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는데,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하고 나면 자신의 난자와 정자로 아이를 갖기 어려우니 그 전에 난자와 정자를 추출해서 보관해 놓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조사한 연구였다. 연구에 참여한 73명 중 72명이 난자·정자 보관 상담을 했고, 2명은 실제로 난자·정자 보관을 했으며, 45%는 나중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야 나는 트랜스젠더의 가족구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 P36

몇몇 분들이 "그냥 브로슈어를 보내시지, 부담스럽게 교수님이 직접 오셨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부담드리려고요. 도와주세요.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데이터 수집이 끝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병원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반쪽짜리 설문조사가 될 뻔했다. - P38

그러나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체성을 두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적 기호‘라는 잘못된 단어로 표현하거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의료적 조치를 ‘미용성형‘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한국의 의과대학 교육 과정과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는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실력이 좋은 의사에게 수술받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태국에서 수술받고 한국에 돌아온 뒤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대책이 마땅치 않았다. - P44

의료적 트랜지션을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시키는 결정은,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역사를 감당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그들에게 한국 사회가 보내는 작은 전언이 될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에 무지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겠다고. 늦었지만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겠다고. 그러니 당신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 P46

"저도 사실 법적 성별정정 때문에 수술을 한 거라서. 수술 없이도 가능했다면 저도 수술을 안 하고 정정하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어차피 생식기를 뭐 보여 주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거고." (20대 젠더퀴어 K) - P51

"한국에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2013년, 청소년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를 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낯설게 느끼고, ‘청소년기에도 성전환 수술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성전환 수술과 같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회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긴 고민과 협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다수 트랜스젠더는 아동기나 청소년기 - P54

에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깨닫고 형성하며 성장한다. 또한 자신의 성별정체성으로 인해 가족이나 또래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 때론 폭력을 경험하며, 의료적 트랜지션과 법적 성별정정을 비롯해 미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P55

연구 참여자들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으로 몸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나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막연하게 갖고 있던 다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자기인식과 충돌하며, 불안과 불편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어린 시절 "자고 일어나면"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트랜스여성F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의 데뷔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실제 존재하며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 P59

처음 생리가 왔을 땐 어땠어요? 아, 키는 망했구나 했죠. - 트랜스남성 D - P60

연구 참여자들에게 청소년기에 찾아온 2차 성징은 다른 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본인이 깨달았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이들은 이미 어딘가 ‘달랐지만’, 몸의 2차 성징으로 인해 더욱 ‘달라졌고’, 따라서 이 차이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 채 현실로 소환되었다. ‘나는 누구‘라는 말을 찾기 위해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도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쉽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의 성별을 둘 - P61

러싼 경합과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무엇이 아닌‘ 나를 넘어 ‘나는 누구다‘라는 감정을 형성하고 스스로 명명하는 행위는, 연구 참여자들이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62

주로 방과 후까지 화장실 가는 걸 다 참고 학교에서 나간 다음에 해결을 한다거나, 아니면 수업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체육시간 같을 때에 자유시간을 준다 그러거나 하면 그때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 안 가니까. 그런 식으로 다들 안 들어가는 시간에 해결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 트랜스여성 A - P62

중학교 때 조용히 지냈던 편인데, 그때도 상담 선생님과 말을 해 본 적이 있었어요. "제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예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할 거다라고 설명을 드리면서……, 제 입장에서는 설명을 잘 드린 거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딱 한마디를 했어요. "이 개새끼……" 따졌죠. 제가……… 왜 개새끼냐고요. 그러니까 "니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 종교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 종교인데, 내가 어떻게너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 이러시더라고요. - 트랜스여성 E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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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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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은 부의 죽음 후 2달만에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천박한 여자라 원망하나, 그녀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 햄릿은 오필리아의 죽음을 애도하나, 그녀를 진정 사랑했었나. 그녀들은 햄릿의 삼촌에 대한 분노, 울분, 복수를 대신 받고 희생된 것이 아닌가. 읽는 내내 배우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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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8-19 1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햄릿이 오필리아를 사랑?
ㅎㅎㅎㅎ 제가 오필리아였다면 시장 노점에서 배추 파는 총각 꼬드겨서 아빠한테 받은 귀금속 패물 몽땅 챙겨 덴마크 보다 더 북쪽 스칸디나비아나 갈리아 혹은 라인 동쪽 땅으로 도망쳤을 거 같습니다.
1도 사랑하지 않았던 듯. ^^;; 당시 왕도에는 사랑이란 단어는 아예 처음부터 포함되지 않았던 거로. -_-;;;

햇살과함께 2022-08-19 20:4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자기 감정을 분출하는 쓰레기통으로 사용한 듯요. 역시 왕자. 역시 동등한 관계가 아니구나 다시 느꼈네요.

새파랑 2022-08-19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셨군요 ㅋ 더 재미있었을거 같아요~!!
이 책은 표지도 너무 좋습니다~!!

햇살과함께 2022-08-19 20:43   좋아요 2 | URL
오디오북 아니고^^ 연극 본 장면과 배우들 대사가 계속 들려요~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세익스피어 비극은 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봐야겠어요!
 

재판과정에서 가해자의 사망. 잔인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놈들이다.
조민기도, 박원순도!

그리고 저 어이없는 도표라니! 합의가 성사되든 안되든 가해자의 형량에 유리하게 반영되는 한국 사법 현실…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문제, 수사 과정에서의 무고 인지 문제, 원 피해 사건 재판 과정에서의 양형 반영 문제 등 풀어가야 할 다양한 숙제들이 쌓여 있다. 피해자의 말을 막고 연대와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해자들의 ‘보복’을, 이 사회는 어떻게든 막고 책임을 지울 것이다. - P74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 가해자(정신과 의사)는 피해자의 말과 글을 막기 위해 가처분신청까지 했다. 공론화를 무력화하고 법적 절차를 밟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가해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이 모든 법적 절차를 피해자 혼자서, 그것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피해자가 알아서 대응하기는 어려웠기에 성폭력위기센터를 통한 무료법률구조를 권했고, 피해자와 함께 하나씩 차분하게 대응하려 노력했다. - P80

그러다 2020년 봄, 가해자는 사망했다. 자신의 가해에 대한 그 어떤 인정도, 반성도, 회복을 위한 노력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고 사법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피해자들의 허탈감은 얼마나 컸을까. 죽음에 관대한 한국 사회의 정서상 오히려 가해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이들도 있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지 않았냐며 피해자들에게 망각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죽음 그 자체가 곧바로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의 재구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죽음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 P84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한 법적 단죄가 마무리되면 저절로 피해가 회복되며 일상이 재구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지리멸렬하고 이해받지 못하기도 한다. 지원은 끊기고 관심도 사라진 상태에서 피해자 혼자 덩그러니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 끝났는데 왜 그러고 있냐는 핀잔을 듣기 쉽다. 왜 아직 못 벗어났냐고, 이제 열심히 회복하고 사회로 복귀해야 하는것 아니냐고. 피해자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 P86

지은 씨는 기록을 시작으로 하나씩 일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세상 밖으로 편하게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출판을 권유한 것은 ‘이후의 삶’에서 주도권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외부 평가에 의해 박제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았다. 내 연대의 지향은 피해자들이 ‘이후의 삶’에서 주체적이고 안정적으로, 안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것이다. 그래서 찾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기록과 영상이다. 《김지은입니다》는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 그가 선택한 첫걸음이자, 개인 연대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연대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기가 어렵다. - P88

피해자가 숨을 고르고 사회 복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사회는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 ‘회복적 사법 restorative justice‘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피해자의 실질적 회복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이다. 신변보호, 주거와 생활비 등 경제적 지원,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관련된 각종 의료적 지원, 직업교육 등 사회 복귀를 위한 지원, 안전망 구축 등 아주 기본적인 회복 지원도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긴 ‘응보적 사법 retributive justice‘ 역시 제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아직은 지나치게 큰 기대일 수 있다. 그렇기에 ‘법대로‘ 하는 것은 피해자가 여전히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지다. 법적 절차가 종료된 후 피해자가 사회로 복귀하기까지 사법 시스템은,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 P89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고통, 충격)"라는 표현을 쉽게 내뱉는다. 이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책임 회피이자, 피해회복을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의 비겁한 변명이기도 하다. 시스템에 기반해 정의를 제때 실현하고, 응보적 측면의 책임부터 견고히 해야 한다. 아울러 다양한 사회적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싸움 이후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사회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P90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고인 퇴정 등 공간 분리를 요구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재판 참여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같은 공간에 차폐막만 쳐놓고 피해자 증인신문을 강행하기도 한다.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70세, 남) 전 연극연출가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차폐막 너머에서 헛기침을 하거나 차폐막을 발로 차며 위압감을 주는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증인신문을 견뎌야 했다. 이런 형태로 피고인이 피해자를 압박하고 신문을 방해하는 행위가 잦기 때문에 피고인 퇴정 등 공간 분리는 매우 중요하다. - P97

피고인 쪽의 부적절한 신문을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아 고통을 겪는 일도 다반사다. 실제로 2019년 이후 성폭력 사건 재판의 증인신문과정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동의로 받아들일 수있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클럽에 가거나 모텔에 남성과 - P98

투숙하는 것은 성관계 동의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남성 혐오감을 갖고 있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는 모두 2016년 사법정책연구표시의원 연구보고서에서 부적절한 신문 유형으로 지적된 것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과도하게 괴롭히거나 겁을 주거나 공격적인 질문", "빈정거리거나 모욕하거나 폄하하는 질문", "집요하고 반복적인 질문", "성관계 행위 내지 신체적 특징을 불필요하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하는 질문", "피해자의 사생활 내지 성적 행위 이력에 관한 질문" 등은 모두 부적절한 신문 유형이다. - P99

이처럼 피고인(가해자)이 범죄 혐의를 인정한다는 조건을 걸어 피해자로부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낸 후, 재판 결과가 유리하게 나오면 돌변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그런데도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 합의내용, 합의 이후(공소제기 이전일 경우) 피의자 또는 공소제기 이후일 경우) 피고인의 태도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합의‘는 가해자의 족쇄를 풀어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 P105

가해자들이 수사와 재판의 과정에서 ‘합의‘를 이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수사 과정에서는 소의 취하를 유도하기 위해 합의를 요구하지만, 실상 합의에 실패해도 불리할 것이 없다.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가 금전적 요구를 했거나 금전적 보상 제안에 응했다면, 그 사실을 내세워 피해자가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것으로 몰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는 합의해야 공소사실(범행 내용)을 인정하겠다고 버티거나, 합의를 해야 법정 싸움이 길어지는 걸 막고 피해의 일부라도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피해자를 밀어붙인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도, 합의에 실패한 피고인은 불리하지 않다. ‘진지한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국 법원은 합의에 성공해도, 합의에 실패해도 피고인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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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왕 지금 당신 말한 대로 생각한다 믿지마는
우리들이 작심한 바 우린 자주 깨뜨리오.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그 힘이란 미약하오.
그 열매가 시퍼럴 땐 나무 위에 달렸지만,
익게 되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법이라오.
부대우리들이 자신에게 빚진 것을 잊어버려
못 갚는 건 정말이지 피할 수가 없는 거요.
격정 속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제안한 건
그 걱정이 사라지면 결심조차 없어지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격렬하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자체가 소멸되오.
기쁜 마음 광분하면 슬픈 마음 통탄하고,
별것 아닌 사건으로 슬픔 기쁨 엇갈리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아니하며, 사랑조차
운에 따라 바뀌는 건 이상할 것 하나 없소. - P111

햄릿 마마, 극이 마음에 드시옵니까?

왕비 내 생각엔 왕비의 맹세가 너무 과하구나.

햄릿 허나 약속을 지킬 겁니다.

왕 줄거리를 들어봤느냐? 거기에 무슨 악의는 없더냐?

햄릿 예, 예. 농담일 뿐입니다――농담 속의 독이랄까.
절대 악행은 없습니다.

왕 극의 제목은 무엇이냐?

햄릿 「쥐덫」이오. 거 참, 기막힌 비유지요! 이 극은 비
엔나에서 있었던 살인을 본뜬 겁니다―공작의 이름
은 곤자고, 그의 부인은 밥티스타이며—곧 보시게
될 겁니다. 악랄한 작품이지만, 그게 뭔 상관입니
까? 그것이 전하와, 죄없는 영혼을 가진 저희들은
건드리지 못한다구요. 찔리는 게 있는 놈이 움츠리
지, 우린 떳떳합니다. - P113

길든스턴 허나 그것들을 구사하여 어떤 화음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기술이 없습니다.

햄릿 그래, 이 보라고. 자네가 날 얼마나 형편없는 물
건으로 생각하나. 자넨 날 연주하고 싶지. 내게서
소리나는 구멍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자넨 내
신비의 핵심을 뽑아내고 싶어해. 나의 최저음에서
내 음역의 최고까지 울려보고 싶어. 그렇다면, 여기
이 조그만 악기 속엔 많은 음악이, 빼어난 소리가
길 들어 있어. 그런데도 자넨 그걸 노래 부르게 못해.
빌어먹을, 자넨 날 피리보다 더 쉽게 연주할 수 있
다고 생각해? 나를 무슨 악기로 불러도 좋아. 허나,
나를 만지작거릴 순 있어도 연주할 순 없어. - P119

왕 자 햄릿, 폴로니어스는 어딨느냐?

햄릿 야식중이오.

왕 야식중? 어디서?

햄릿 그가 먹는 곳이 아니라,먹히는 곳에서. 정치꾼
같은 버러지 한 무리가 회동, 이 순간에도 그를 차
지하고 있지요. 먹는 데에는 구더기가 유일한 황제
랍니다. 우린 우리가 살찌려고 다른 모든 짐승들을
살찌우며, 우리 자신은 구더기를 위해 살찌웁니다.
뚱보 왕과 마른 거지란 다양한 식사에 불과한데——
음식은 둘이나, 한상에 오르지요. 그렇게 끝난답
니다. - P144

레어티즈 왜 그걸 물으시죠?

왕 부친을 사랑하지 않았다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발단은 시간임을 알며,
레어 그 불꽃과 열기도 시간 가면 줄어듦을
실제 증거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제풀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우리를 해치니까. 허나 궤양의 뿌리로.
햄릿이 돌아온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버지의 아들임을 보여주기 위해
넌 뭘 하겠느냐? - P168

햄릿 여보게, 날 용서하게.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자네는 신사이니, 용서하게.
내가 정신이상으로 어떻게 벌받는지
여러분이 알고 자네도 필시 들었겠지.
내가 했던 일,
자네의 효성,명예심, 그리고 반감을
거칠게 일깨웠을 그 일은 광기였음을
여기서 공언하네.
햄릿이 레어티즈에게 잘못해? 햄릿은 절대 아냐.
햄릿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자기가 아닐 때 레어티즈에게 잘못하면,
그건 햄릿 짓이 아니라고.
햄릿은 그걸 부인하네. 그럼 누가 했지?
그의 광기야. 그렇다면
햄릿은 피해를 입은 쪽에 속한 거지.
그의 광기가 불쌍한 햄릿의 적이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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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셀러스 그게 선왕 같지 않던가?

호레이쇼 자네가 자네인 것처럼.
바로 그런 갑옷을 선왕께서 입으셨지,
저 야심 많은 노르웨이 왕과 싸웠을 때.
그런 인상 쓰셨지, 담판중 노하여 썰매 탄
폴란드 놈들을 얼음 위에 때려눕혔을 때.
이건 이상해. - P13

왕 좋은 때를 즐겨라 레어티즈, 네 시간을.
네 훌륭한 자질을 마음대로 발휘해라.
그런데, 내 조카이자 아들인 햄릿———

햄릿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 - P21

햄릿 보이다뇨, 마마? 아뇨, 유별납니다.
전 〈보이는 건〉 모릅니다. 어머니,
저를 진실로 나타낼 수 있는 건 검정 외투,
관습적인 엄숙한 상복, 힘줘 뱉는 헛바람
한숨만도 아니고, 또 강물 같은 눈물과
낙담한 얼굴 표정, 거기에다 비애의
모든 격식과 상태와 모습을
합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보이지요,
누구나 연기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허나 제겐 겉모습 이상의 무엇이 있으며,
그런 건 비통의 옷이요 치장일 뿐입니다. - P22

햄릿 제발 놀리지 말게, 학우여.내 어머니의
결혼식을 보려고 온 것으로 생각되네.

호레이쇼 정말이지 왕자님, 연달아 있었지요.

햄릿 절약이야 절약, 호레이쇼.
장례식 때 구운 고기, 혼례상에 차갑게 내놓았지.
호레이쇼, 그런 날을 맞느니 차라리
내 철천지 원수를 천국에서 만났으면
아버님―내 아버님을 보는 것 같아— - P27

레어티즈 햄릿 왕자와 그의 하찮은 호의란 건
유행이요 젊음의 객기이며 청춘기의 꽃송이라,
빨리 피나 영원하진 못하고
달콤하나 오래가진 못하니,
한순간의 향기요 시간 때우기 이상은 아니다
생각해라. - P31

오필리아 이 훌륭한 교훈의 골자를 제 마음의
파수꾼 삼을게요. 그러나 오라버님,
은총 잃은 어떤 목사들처럼 나에게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 보여주고,
자기는 허풍선이 무모한 탕아처럼
환락의 꽃길을 밟으며, 자신의 설교를
저버리진 마세요. - P33

폴로니어스 이 일은 잘 끝났습니다.
전하, 마마, 왕의 지위는 무엇이고
임무는 무엇이며, 왜 낮은 낮, 밤은 밤,
시간은 시간인지를 규명해 보는 것은
밤과 낮과 시간 낭비일 뿐이옵니다.
그러므로 기지의 핵심은 간결함이요
장황함은 팔다리와 겉치레인지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자님은
미쳤습니다. 미쳤다고요, 왜냐하면
진짜 광기를 정의함에 있어 그런 상태를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왕비 말재주보다는 요점을. - P65

폴로니어스 정말, 그게 바람 없는 곳이지요. ——(방백) 때론 얼
마나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지——이런 재치 있는 응
답은 광기에 빠진 사람이 종종 하는 거라고. 이성이
나 맑은 정신 가지고는 이렇게 꼭 들어맞는 말을 할
순 없지. 그를 떠나 곧장 그와 내 딸이 만날 방법을
주선해야겠다. ―저하, 소신이 물러가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 P71

폴로니어스 이 세상에 으뜸가는 배우들입니다. 비극, 희극,
사극, 목가극, 희극적 목가극, 목가극적 사극, 사극
적 비극, 목가극적 사극적 희극적 비극과, 무슨 극
인지 알 수 없거나, 끝없이 긴 연극도 좋습니다. 세
네카의 비극이 아무리 무거워도, 플로터스의 희극이
아무리 가벼워도 좋습니다. 극작법을 따른 극이든
무시한 극이든, 이들이 유일한 배우들입니다. - P79

폴로니어스 저하, 그들의 값어치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겠나
이다.

햄릿 나 원 참, 봐요, 훨씬 더 낫게 해야지. 모든 사람
을 각자의 값어치대로만 대접하면, 태형을 피할 사
람 있어요? 당신의 명예와 가치에 버금가게 그들을
대접하시오, 그들의 자격이 모자랄수록 당신의 선심
은 더욱 값질 테니까. 안으로 데려가시오. - P85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P94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ㅡ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 P94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가만있자, 고운 오필리아!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를 잊지 말아주소서. - P96

왕 그리 할 것이오.
높은 자들의 광기는 방관하면 아니되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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