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 어머니 짱!!

이모들은 이기동의 집에 자주 찾아왔다. 형편이 좋았던 이모들은 그들이 집을 구할 때 목돈을 빌려주었다. 그는 이모들이 사 온 과자를 먹으며 어머니와 이모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가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아무도 그의 이해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이모들은 주로 그의 아버지를 흉봤다. 그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이모부들을 흉보는 분위기로 전환되어서야 비로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모들은 빌려간 돈은 언제 갚을 생각이냐고 자주 물었다. 어머니는 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못 갚으면 쟤가 갚을 거야. 우리 아들 못 믿어? 장래희망이 의사라고."
"너 공부 잘하니?"
둘째 이모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P11

- 이기동의 어머니는 아들이 의대에 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믿었다. 시험 점수가 평균 70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성적표에 사인할 때마다 한참 동안 망설였다. 오른손에 볼펜을 쥐고 성적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어머니의 심장에 총을 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망을 잃지 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더 잘할 수 있어."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희망을 믿고 하던 대로 열심히 했지만, 존 케이지와 그의 제자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존 케이지의 제자인 백남준은 이런 말을 남겼다.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꾸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아직 존 케이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곳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더 걸어야 한다. - P27

그러면 그녀는 두툼한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가 펄럭일 정도로 빠르게 돌아서며 대꾸했다.
"뭐겠어? 나한테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여보, 난 단지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물은 것뿐이야."
"왜 나만 보면 다들 똑같은 걸 묻는 거지? 젠장, 나도 다른 사람한테 오늘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물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 P29

"엄마는요?"
"내 뒤에 태우면 되지."
아버지는 웃으며 맥주를 더 주문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아버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족을 대했다. 그는 아버지를 관찰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며 하는 모든 희망적인 말들은 사실 이루어질 가망성이 거의 없는 것이며, 그걸절실히 깨달은 사람만이 술을 마시고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는거라고,
그는 술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희망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만은 그의 아버지를 보건대 어렴풋하게나마 알수 있었다. - P31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덫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었다. 이기동은 창밖을 보면서 그것의 존재를 눈으로 더듬었다.
-존 케이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빠져나갈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덫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었다. 존 케이지는 창밖을 보면서 그것의 존재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 존재는 바로 그였다. - P35

-종일 시내를 싸돌아다니면서 뭘 했니? 본다는 영화는 봤니?"
존 케이지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했다.
"네, 봤어요. 착취에 대한 얘기였어요."
"오렌지농장 얘기로구나."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에 대한 얘기예요. 어머니는 착취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반대말은 모르지만 비슷한 상황은 하나 알지.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어. 돈 한 푼 못 받고 말이야."
그는 아들의 접시에 으깬 감자 한 덩어리를 툭 떨어뜨리며 말했다. - P46

존 케이지와 그의 아버지는 잠자코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따라 맛이 기가 막힌데? 시카고에서 아들이 온다고 특별히 신경 썼나보군."
존 케이지의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포크를 든 채로 그릇만 노려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맙소사,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무도 모르다니."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P47

- 존 케이지는 시애틀로 떠나기 전 그레이스와 함께 극장을 방문했다. 〈모던 타임즈>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찰리 채플린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급식 기계의 오작동으로 찰리가 고생하는 장면과 톱니바퀴에 끼어버린 동료에게 통닭과 수프를 먹여주는 장면이었다. 다른 몇몇 장면에서도 그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그의 표정은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그녀가 물었다.
"영화가 별로였어?"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별로야. 원래부터 알긴 했지만 이젠 더 확실히 알겠어. 이 세계는 잘못됐어."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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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만화의 제목은 360도.
나도 연필을 부러뜨리고 접시를 깨트리고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걸 치우고 뒷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니깐. 제대로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럴 땐 내가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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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말까지 읽으려고 책상에 쌓아둔 탑.
1권 읽고 2권 쌓기 중..
지난주 회사 근처 주민센터 위층에 작은도서관이 있다는 걸 몇 년 만에 발견!!
도서관카드 신청하고 오늘 카드 받으러 오라는 연락에 도서관에 갔다가 오늘 신간 많이 들어왔다는 사서님의 말에 또 빌려왔네.
다행히(?) 작은도서관이라 1인 3권만 대출가능. 2권은 사서님에게 도로 드림..
이제 도서관 3군데 순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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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23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4월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꼭 다 읽으실거라 믿습니다 ㅋ

햇살과함께 2022-04-23 09:20   좋아요 2 | URL
계획은 창대하게~! ㅎㅎ 다음주에 휴가라도 내야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4-23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세 군데!!!!!!
1 권 읽고 2 권 쌓기 중!!!!
ㅋㅋㅋ
어쩜 다들...우린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도서관 새로 발견하신 건 감축드릴 일이옵니다^^

햇살과함께 2022-04-23 12:07   좋아요 1 | URL
한군데는 어린이도서관이라 주로 둘째 책 빌리는 곳이요.
동네 도서관은 주중에 퇴근하고 가기 번거로웠는데 회사 근처는 평일에 빌리기 편할 듯 해요~
다들 증세가 심해지고 있죠?! ㅎㅎ
 

부인이 왈,
"어찌 속지 않으시리오? 다만 겁내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려 하였는데 심히 눈이 멀어 귀신을 꺼릴 줄 모르니 호색(好色)하는 사람을 여색(女色)에 굶은 귀신이라고 하는 옛말이 틀리지 않으니 귀신이 어찌 귀신을 두려워하리이까?"
모두 크게 웃더라. - P184

섬월과 경홍이 들어온 후 승상을 모시는 사람이 많은지라. 승상이 각각 거처하는 곳을 정했다. 정당의 이름은 경북당이니 유 부인이 계신 곳이고, 그 앞은 연희당이니 좌부인 정 부인이 처하고 경북당의 서쪽은 봉수궁이니 난양공주가 거했다. 연희당 앞은 응향각이니 그 앞은 정하루라. 이 두 집은 승상이 거처하며 궁중에서 잔치하는 곳이고, 누각 앞은 치사당이고 그 앞은 예현당이니 이 두 집은 승상이 빈객을 맞이하고 일을 하는 곳이다. 봉수당 남쪽에 해진원이 있으니 숙인 진채봉이 거처하는 곳이고 연희당 동남쪽은 영춘함이니 가춘운의 집이고, 청하루 동서에 각각 작은 누각이 있으니 녹색 창과 붉은 난간이 극히 화려하고 행각을 지어 청하루와 응향각에 연결되어 있으니 동쪽은 화산루요 서쪽은 대궐루라. 계섬월과 적경홍이 있는 곳이더라 - P193

두 부인이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관음화상으로 나아가 분향하고 말하되,
"유(維) 연월일(年月日)에 제자 경파 정 씨, 소화 이 씨, 채봉 진 씨, 춘운 가 씨, 섬월 계 씨, 경홍 적 씨, 요연 심 씨, 능파 백 씨는 삼가 남해대사께 아뢰나이다. 제자 여덟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나서 자랐으나 한 사람을 섬겨 마음이 합해져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한 나무의 꽃이 바람에 날려 궁궐에 떨어지고, 혹은 규중에 떨어지고, 혹은 촌가(村家)에 떨어지고, 혹은 길거리에 떨어지고, 혹은 변방에 떨어지고 혹은 강호에 떨어졌지만 근본을 찾으면 어찌 다름이 있으리오? - P221

오늘로부터 맹세하여 형제 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두구든지 다른 마음이 있으면 천지가 용납하지 않으리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사는 복을 내려주시고 재앙을 없이 하여 백 년 후 함께 극락세계로 가게 하소서."
하였더라. - P222

"사부는 어찌 소유를 정도로 인도하지 않고 환술(幻術)로 희롱하나뇨?"
대답을 듣기도 전에 구름이 날아가니 중은 간 곳이 없고 좌우를 돌아보니 여덟 낭자 또한 간 곳이 없는지라. 놀라고 당황해하더니 높은 누대와 많은 집이 한순간에 없어지고, 향로에 불이 이미 꺼지고 지는 달이 창에 이미 비치었더라. 스스로 자기 몸을 보니 백팔염주가 손목에 걸렸고 머리를 만지니 깎은 머리털이 까칠까칠하였으니 완연히 소화상의 몸이지 대승상의 위의가 아니더라. 정신이 멍하여 오랜 후에 비로소 제 몸이 연화도장 성진 행자인 줄 알고 생각하니, 처음에 스승의 책망을 듣고 풍도로 가고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 씨집의 아들이 되어 장원 급제 한림학사를 하고 출장입상하여 공을 이루고 벼슬에서 물러나 두 공주와 여섯 낭장하 같이 즐기던 것이 다 하룻밤 꿈이라.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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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새뮤얼 R. 서머스와 마이클 I. 노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지된 반흑인 편견이 감소했다고 대답한 백인 응답자들은 반백인 편견은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인종주의를 제로섬 게임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관점은 너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면 나에 대한 적대감이 늘어난다는 제프 세션스 전법무장관의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던 당시 미국 백인들은 실제로 반백인 편견을 반흑인 편견보다 더 큰사회문제로 여겼다. 오로지 한 명을 제외한 미국 대통령 전원이 백인이고, 역사적으로 의석의 90퍼센트를 백인이 차지해왔고, 백인이 보유하는 평균 순자산이 비백인보다 10~13배 높은데도그렇게 믿었다. 사실 인종 간 소득 격차는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30년 전 중위 흑인 가구의 보유 자산은 6,800달러였으나 지금은 불과 1,700달러이며, 이에 반해 중위 백인 가구의 자산은 같은 기간 10만 2,000달러에서 11만 6,800달러로 증가했다. 자원의 축적이 너무 불균형해서 백인성이라는 인종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백인 과두체제를 뜻한다고 철학자 린다 마틴앨코프는 표현한다. - P119

2016년은 몇 가지 요인 때문에 백인성이 가시화된 해였다. 미국에서 백인이 머지않아 소수자가 되는 인구학적 전환이 닥쳐오고 있고, 평생고용이 줄어 무력감을 느낀 일부 백인이 이민자에게 화풀이를 했으며, 퍼거슨 판결(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인종 분리 원칙을 확립한 1896년연방대법원 판례로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례에 의해 폐기되었다 - 옮긴이) 이래로 사법제도,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인종적 불의에 항거해온 흑인과 갈색인 운동가들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높아졌다. 미국 백인은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자기들도 피부색으로 표시된다고 느꼈고, 그런 방식의 노출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바는 - 수치심이었다. - P123

2017년 2월 1일, 5세의 이란계 아이가 워싱턴 DC 덜레스 공항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로 다섯 시간이나 억류됐다. 미성년자임에도 "위협 가능성이 확인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슬림이 다수인 7개국 여행자의 입국을 금지한 트럼프 행정명령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 소년은 메릴랜드주에사는 미국 시민이었는데도 당국은 상관하지 않았다. 공보 비서는 "단지 연령과 성별을 이유로 그들이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것은 잘못되고 그릇된 판단"이라고 말했다. 트럼프행정부에 대한 분노는 그날따라 더욱더 생생하고 선명했다. - P125

시인으로서 나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영어를 권력 투쟁을 위한 무기로 취급해왔고, 나보다 더 힘센 자를 상대로 그 무기를 휘둘렀다. 그래서 영어로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서투르다. 집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다 보니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안으로 들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고통과 불가분하게 뒤얽힌 사랑으로 양육된 나머지, 그 사랑을 공기 중에 일단 노출해버리면 그것이 산화되어 괜히 내가 영어로 내 가족을 배신하는 꼴이 될까 봐 두렵다. - P140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이 나라는 좌우 양편에서 정체성의 축소를 겪었다. 백인 국가주의가 발흥하자 수많은 비백인이 분노와 자존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방어하는 한편 수 세기에 걸친 백인의 비서구 문화 착취에 대해 보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정당한 분노에서 초래된 한 가지 부작용은 예술가와 작가에게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인종적 체험만을 근거로 발언하라고 요구하는 "자기 차선 지키기" 정치였다. 그런 정치는 - 인종집단이 깔끔히 나뉘지 않고 중첩되는 삶의 복잡한 현실을 무시한채 - 인종 정체성의 순수성을 가정할 뿐만 아니라 인종 정체성을지적 재산권으로 전락시킨다. - P141

말을 이렇게 하지만, 전례도 별로 없는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일에 관해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다문화적 합일성이라는 안이한 환상이나 도덕성을 과시하는 살균된 언어에 기대지 않고서 쓸 수 있을까?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 P151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려서 내가 10대가 됐을 때 우리 가족은 교외 백인 거주지 내 수영장 있는 집에 살았다. 나는참새가 염소 소독제 섞인 수영장 물을 한 모금 마시러 휙내려왔다가 다시 휙 올라가는 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보곤 했다. 거기로 이사했다고 해서 우리 집에 감돌던 불행이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그런 고립된 생활 환경이 모종의 안도감을 주었다. 내 사춘기 불행의 원인을 분석하려면 엄마에 관해 써야하는데, 이 책에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 내 안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 수 있을까? 아시아계 미국인의 내러티브는 항상 엄마로 귀결되어야 하나? 시인 호아응우옌을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제일 먼저 물은 것이 "엄마에 대해 말해봐요"였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어색함을 깨주는 질문이군요." - P164

"엄마가 아시아인이잖아요." 그가 말했다. "흥미로운 분일 것이 틀림없어요."
엄마 얘기는 일단 미루자. 그보다 아시아 여성들과 맺은 우정에 대해 먼저 쓰려고 한다. 안 그러면 엄마가 책을 아예 장악하고 이 에세이들을 전부 관통하여, 결국에는 오로지 엄마에 관한 책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전에 나는 먼저 원한부터 풀어야겠다. 이 나라에 대해서, 이 나라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미리 정해진 대본을 안겼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엄마가 당시 망가진 상태였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어쩌다 그리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병이 병으로 명백히 진단되지 않으면 자식이 그 멍에를 짊어진다. 이를테면 엄마가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며 차선을 급변경해서 다른 차를 받을 뻔했을 때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던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 P165

영진 리는 풍자극 『용비어천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백인 남자가 아시아 여자를 사귀는 이유는 백인 여자보다 용모가 더 나은 아시아 여자를 사귈 수 있어서이다. 우리는 사귀자는 말에 쉽게 응하고 자존감도 낮기 때문이다. 저급 브랜드를 택함으로써 더 호화로운 사양을 누리는 것과도 같다. 게다가 아시아 여자는 백인 여자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백인 남자와도 데이트할 의향이 있다." - P183

에린과 나는 명미 킴이 가르치는 시 과목에 등록했다. 킴은 짧게 친 머리에 긴 검정 치마를 입어 성직자처럼 보이는 30대 후반의 객원교수였다. 첫날 교수가 침묵에 관해 강의했는데 그것이 문학사에 대한 나의 인식을 완전히 박살 냈다. 교수는 어떻게 해서 시형(poetic form)이라는 회로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해 충전되는지 논했다. 시라는 것은 완벽하게 형성된 구절보다는 더듬거림, 주저함을 잡아내는 그물이라고 했다.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심문이라고 했다.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유대계 시인으로서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한 파울 첼란의 경우 "그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의 불가능성과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단을 찾는 작업 사이에서 방향을 잡아갔다"라고 킴은 설명했다. - P190

바로 그 점을 명미 킴이 내게 최초로 가르쳐주었다. 내가 눌변으로 여기는 부분- 내가 이중언어 사용자라는 점, 어렸을 때 영어 때문에 고생한 점 -을 역이용해 영어를 두드리고, 그것을 나의 갈등하는 의식에 가장 근접한 나만의 어휘소 목록 속으로 녹아들게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 P191

이것은 그 애가 지닌 가장 한국적인 속성으로, 죽음과 생존을 동시에 격렬하게 욕망하는 충동이 서로 상쇄되지 않고 합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얘와 함께 지내기가 참 괴로웠다. 헬렌은 에린과 나를맹렬히 몰아세웠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자기가 미술가가 되면안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다. - P198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을자극하는 고통은 일단 그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면 신체로부터 분리된다고 본다. 고통을 명명하면, 일어났던 일에서 아픔이덜어지고, 한계가 그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고 심지어 소멸까지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는 마치 말이 치유법이 아니라 남을 오염하는 독인 양, 자칫 고통을 언급했다가는 정신적 외상을 또한 번 입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입히게 되는 문화에서 자랐다. 이런 비밀과 수치의 문화에서성폭행을 고발할 만큼 대담한 아시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 부정은 항상 상처에 바르는 연고가 되어주지만, 그건 국소적 요법에 불과하다. 겪은 일이 꿈에 나오거나 다른 더치명적이고 만성적인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213

그런데 왜 나는 차의 살인 사건을 더 일찍 찾아볼 생각을 안 했지? 나도 서평을 쓸 때 차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살인 앞에 강간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삭제하지 않았나? 강간이라는 단어는 글에 손상을 가하면서 어떤 주장이든 엎어버린다. 강간을 넘어서 분석을 이어가고 이해를 도모할 방도가 없다. 그것을 직시하든지 아니면 시선을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죽음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때때로 나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피해자가 아시아인이면 일부러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그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관하기 싫다. 왜냐하면 분노속에 방치되기 싫기 때문이다. - P231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신이 내 조상의 나라를 둘로 쪼개놓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설픈 중간급 미군 장교 두 명이 1945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놓고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을 자의적으로 그었고, 결과적으로 이 분단은 우리 할머니의 가족을 비롯해 수백만 가족을 갈라놓았다. 그 후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역에서 일본군에게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과 네이팜을 자유의 기치 아래 좁은 우리 땅에 투하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며 화상 피해자를 치료했던 미국 외과 의사 데이비드 랠프 밀러드가 바로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드는 쌍꺼풀 수술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수술법을 한국 성노동자들에게 시술하여 미군 병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 쌍꺼풀 수술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수술이다. 내 조상의 나라는 당신이 영구적 전쟁과 초국가적 자본주의를 통해 필리핀, 캄보디아, 온두라스, 멕시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엘살바도르,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나라에서 저지른 살상과 자원 착취의 작은 예시에 불과하며, 이것은 주로 미국 국내 주식 투자자들의 배를 불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은혜를 논하지 말란 말이다. - P259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마술적 사고가 드러나는 공상과학 영화의 한 예다. 즉 백인이 흑인과 갈색인에게 저지른그 모든 죄가 자기들에게 열 배로 되돌아올 것이 두려워서, 백인종은 절대로 몰락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일종의 예방 조처로서 자신들의 몰락을 지레 상상하는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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