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지다: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고 점잖아서 무게가 있다.
오만과 허영의 차이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 P9

베넷 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부인은 조바심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고 싶은가 본데, 못 들어줄 거야 없소이다."
이 정도 반응이면 충분했다. - P10

지적인 능력에서는 다아시가 더 뛰어났다. 빙리도 결코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아시는 총명했다. 동시에 그는 콧대 높고, 드레지고, 까다로웠으며, 매너가 훌륭하기는 했지만 친근감을 주지는 않았다. - P26

"다음번에는, 리지야."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너라면, 그딴 인간하고는 춤을 안 출 거다."
"그 사람과는 절대 춤 같은 거 안 출 테니까 염려 놓으세요, 엄마."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 하고 샬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권리가 있어."
"그건 맞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사람의 오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거야."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 P31

제가 어미라서 이러는 건 아니지요. 제인이 겨우 열다섯 살일 때 런던에 사는 제 남동생 가드너네 집에한 신사가 머물렀었는데 제인한테 완전히 반해서 제 올케는 그분이 우리 식구가 그 집에서 떠나오기 전에 제인한테청혼을 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렇지만 실제로청혼을 하지는 않았지요. 아마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겠죠. 그렇지만 그분이 제인에 대해서 시를 몇 편 지었었는데, 참 멋진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시들과 더불어 그분의 사랑도 끝났죠." 엘리자베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같은 방식으로 사랑이 끝나버린 예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가 사랑을 몰아내는데 효과적이라는 걸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항상 시가 사랑의 양식(糧食)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다아시가 말했다.
"훌륭하고 굳건하며 건강한 사랑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겠지요. 원래 강한 사랑이라면 무엇이든 흡수해서 살찔 수 - P65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단지 얄팍하고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라면, 훌륭한 소네트를 한 편 짓고 나면 모조리 고갈되고 마는 게 당연하겠지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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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치 도약을 위해서_이헌석

혹자들은 기후정치가 이미 ‘오염된 표현‘이며,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중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가 진보진영만의 표현이 아닌 것처럼, 기후정치도 기후정의 진영만의 ‘신줏단지‘가 아니다. 기후정치는 혹여 잡티가 튈까 애지중지 모시는귀중품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 양당 기후정치의 한계를 비판하며 싸워야 하는 마당이다. 이번 총선은 국회의원 선거 사상 처음으로 기후위기를 중심으로 작은 마당이 벌어졌으나,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기후정의 진영과 진보정당이 철저히 패배한 선거였다. 기후정치 마당을만든 것은 기후정의운동 진영이었으나, 정작 마당을 만든 이들이 그 공간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정치적 중립에서 정치참여 운동으로
여기서 하나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최근 급격히 변화된 정치지형이다.
시민단체 등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대변형 운동이 최근 급격히 직접적인 정치참여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표가 정당가입률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정당가입률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 P121

홍세화 선생이 지은 삶_오창익

홍세화 선생이 돌아가셨다. 2024년 4월 18일. 봄꽃 좋은 날이 그의기일이 되었다. 이름은 세계(世界) 평화(平和)에서 한 자씩 따서 세화(世和)라 지었지만, 참혹한 전쟁은 어머니와 동생을 앗아갔다. 가난했던성장과정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20년 넘게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았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다. - P125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비참한 감옥행을 막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레미제라블>의장발장이 과잉 형벌의 대명사가 되었듯,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사람들도 과잉 형벌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범죄자여서 또는죄질이 나쁜 범죄자여서 감옥에 보내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징역형을 선고할 만큼 나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그저 기초질서 위반행위쯤 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선고받은 벌금형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감옥에 가면 생계 박탈, 가정 파괴 등 후유증도심각하지만,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감옥에 끌려왔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매년 감옥에 가는 사람이 4~5만 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 P127

선생의 일관된 태도는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회의(懷疑)하자, 항상의문을 품자"는 다짐과 짝하는 태도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어떻게 하는 게 나 자신과 이웃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일인지 돌이켜보자는 거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해줬던 좋은 말씀을삶의 원동력을 삼았던 거다. 외할아버지는 늘 "착한 사람은 항상 손해본다. 그렇지만 너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제삼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라"는 등의 깨우침을 주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의 지혜로운 말씀을 늘 기억하며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떤지 등을 계속 살폈던 것이다. 물론 끊임없는 긴장이 필요한 일이다.
홍세화 선생은 ‘짓다‘는 동사를 곱씹곤 했다. 의식주, 곧 입고 먹고자는 일을 목적어로 하는 ‘짓다‘는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거다. 그렇다. 우리는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도 짓는다. 선생은 의식주처럼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것도 잘 지어야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어떤 사람으로 지을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나 자신을 짓는 과정에서 환경이나 조건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자신을 좀더 아름다운 존재로, 더 바람직한 인간이 되게 만드는 과정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거다. 나를 짓는 과정은 전적으로 내 몫이기에 선생은 부단히 자신을 제대로 짓기 위해 노력했다. - P230

지역의 자치, 왜 중요한가_로라 로스

낸시 프레이저가지적했듯이, 정치적 행위는 단지 ‘사회적 보호‘(좌파)나 ‘자유‘(우)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즉 보통사람들이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가되는 것을 뜻한다(여기서 ‘정치‘는 공동체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 P135

따라서 다음 세 가지를 사회운동의 중심적 요소로 두는 일은 반드시필요하다. 첫째, 약자들을 돌보는 일은 사회화돼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성들도 그들의 삶 속에 보살피는 활동을 포함시킴으로써 남성화된 방식의 삶과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일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행복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들이있어야 한다. 셋째로, 변화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도 그 프로젝트 내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고, 일이 수행되고, 해야 할 일들이 분배되고 있는지, 그리고 활동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고 있는지 모두 중요하다.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긴급성이나 효율성 때문에 이 원칙이 뒷전으로 밀려선 안된다. 물론 지역 단위라고해서 이런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실현될 가능성은 훨씬 크다. (김정현 옮김) - P141

정의로운 산림보호지역 확대를 논의할 때_오충현

금년 봄, 사과값이 상승하면서 드디어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 문제가 기후변화라기보다는단순한 농산물 유통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은 대구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주변에 사과나무를 심고 주민들에게 보급한 것이 대구 사과가유명해지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변화로 인해대구지역 사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사과 산지가 북상하여충주나 포천 지역이 주요 사과 산지가 되었다. - P143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이와 같은 인간활동의 결론은 인간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멸종되지 않고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와 생물종, 서식처를 다양하게 유지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그는 권하였다. 이런 권유를 기반으로 1992년 생물다양성 조약이 체결되었다.
생물다양성 조약 체결 이후 전지구적으로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다양한 활동을 진행했지만 WWF 보고와 같이 아직도 생물종 감소는 지속되고 있다. 2020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와 ‘생물다양성 과학기구(IPBES)‘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이라고 하는 공동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보전이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생물다양성 손실과 기후변화를 동시에 해결하고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해법으로 ‘자연기반해법‘을 제시하였다. - P146

자연기반해법이란 현존하는 자연자산을 최대한 잘 관리하고, 부족한부분은 더욱 확충해서 관리하는 방법을 통해 기후변화 문제와 같은 환경문제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 P147

자연과 노동에서 배운다_천종현 최하정 한종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가 유대인 강제수용소 입구에내걸었던 표어는 원래 실현될 수 없는 거였는데 우리 또한 그랬다. 비닐하우스 안이라 춥지는 않았지만 노동은 힘겨웠고 한미리스쿨로 돌아와 야간 수업을 할 때는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대학이나 MBC저널리즘스쿨에서 몇 시간 강연을 듣고 귀가하던 때와는 비교가 안되는 강행군이었다. - P152

장 대표는 몇 번이고 중간 크기의 ‘중과‘가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들 선물용으로 ‘대과‘를 선호한다. 그래서 겨우내 잘라둔 가지가 봄에 다시 나도 잘라버린다. 굵은 가지는 계속 큰 열매를 맺고, 작은 가지는잘려 나가는 모습에서 괜스레 취업을 준비하는 처지가 떠올라 위축된다. 작고 못난 열매도 음료가 되고 잼이 되는데…. 육지로 가는 제주 월동무는 규격을 벗어나면 크건 작건 밭에 버려진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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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정말 덥다. 집에서 에어컨 잘 켜지 않는 우리 집도 오늘은 오전부터 내내 에어컨을 켤 수 밖에 없는 날씨다. 청소하느라 정리하느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난다.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샀다. 교보문고 여성학 컬렉션은 정말 빈약하구나 하고 돌아서다 매대에 마리아 미즈의 신간 <마을과 세계>, 12월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책이 있어서 반갑게 집어 들었다.
















지하철 탈 때마다 나오는 '전장연 시위로 인해 지하철이 지연된다'는 방송을 들으며, <출근길 지하철>이란 이 책 제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휴가 갈 땐, 주기율표> 팟빵이나 유투브를 자주 듣는 남편이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 방송 출연자의 책을 고르다가 곽재식 작가에게 빚진 마음을 갚으러 이 책을 골랐다. 곧 있을 휴가에 주기율표와 함께 하기로.


















지난 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매한 책. 둘 다 일본 관련 책이네. 어쩌다 보니...는 아니고 여름휴가 무의식의 발로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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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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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가 제인 오스틴의 다른 여주에 비해 비호감이긴 하지만, 그녀가 결혼에 목맬 필요 없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하루종일 징징거리며 앓는 소리하는 아버지 우드하우스 씨를 평생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과업에 매여있긴 매한가지. 남편이냐 아버지냐.

에마를 마지막으로 제인 오스틴 전작 읽기 완료했다(총 7권). 오래전 읽은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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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7-28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 완독 기념 페이퍼 작성해주세요. 저도 참고 좀 하게요 ㅎㅎ

근데 에마... 뭔가 말이 많았던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햇살과함께 2024-07-28 22:12   좋아요 1 | URL
ㅎㅎ 다 까먹었어요
에마가 가장 비호감 캐릭터인 것 같아요 ㅎㅎ
 

며칠 후


며칠 후에 나는 서울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서 자전거를 타고 갔던
지난번을 기억하면서. 그때는
흘러내리는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으며 찬바람을 맞았지.
역 앞에서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었지.
그때 누군가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서 있었다.
추웠지만 잘 몰랐다.

며칠 후부터 그 역은 운행이 중단되었다.
가던 곳에 가려면 우선 서울을 경유해야 했다.

며칠 후에 나는 읽던 책을 다 읽는다. 다음 챕터는 「비중에서 가장 이상한 비」이다. 한 페이지에 담긴 광활한시간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바라본다.
그러다 참고 문헌에 적힌 또 다른 책을 읽겠지. 안경을 - P13

쓰고. 또 잠시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 동안에 우리 동네 재개발이 확정되고 애청하던 드라마는 끝나가고
무언가를 챙겨 먹고

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
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
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마지기다리던 며칠 후는
감쪽같이 지나가버렸다.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 안 내린다면 눈이 내리는 나라로 가보고 싶겠지.
지난번에 가보았던 그 숙소 앞 골목에서 눈사람을 만들겠지. 눈사람에게 - P14

목도리를 둘러줄지 말지 잠시 머뭇거리겠지.

너무 추웠고
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유자차를 마셨다. 목도리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목도리가 없네 했다.

*프랑시스 잠의 시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시선집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김진경 외 옮김, 잍다, 2018)에는 "레오폴드 보비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레오폴드 보비가 답시를 적는다는 마음으로 이 시를 적어보았다. - P15

2층 관객 라운지


오늘은 화분의 귀퉁이가 깨진 걸 발견했는데
깨진 조각은 찾지 못했다

돌돌 말린 잎을 화들짝 펴고 있는 잎사귀들
하얗게 하얗게 퍼져 나가는 입김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문을 열어
먼지처럼 부유하는 생각들을 손바닥에 얹어
벌레를 내보내듯 날려 보냈다 - P30

어둠 속에 손을 넣어
악수를 청한다

과학자의 ‘모릅니다‘는
설명이 가능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식탁 옆 조제약 봉투들처럼 수북한 것
기계의 뒷면으로 기어 들어가 헝클어진 선 정리를 시작하는 것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아도 돼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도 돼

그럴듯함과
그러지 못함과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 - P31

모두가 듣고 있다고 외치는 바람에
외치던 사람도 계속 외치고 듣는 사람도 외치기 시작......
듣기만 하는 사람 더 이상 없음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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