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서 점점 알아가게 되는 '알고 싶지 않은, 그러나 알 수 밖에 없는 것들', 남아공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태어난 백인으로 유년시절부터 백인과 백인 아닌 것의 차별을 알아가게 되고, 영국으로 이주해 영국인과 영국인 아닌 것의 틈새에서 방황하게 되고, 여성으로서 남성과 남성 아닌 것의 간극을 느끼게 되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한 작가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3부도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웬일로 시원시원하게 답하네. 여자애들은 큰 소리로 말해야 돼, 우리가 뭐라건 어차피 아무도 안 듣거든." - P69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니? 난 모르겠다고 답했고, 수녀님은 읽고 쓰기처럼 "초월적인"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은 통찰력이 있었다, 내 안에는 글쓰기의 힘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으니까. 초월적인 것이란 ‘너머‘를 뜻했고 내가 만일 ‘너머‘를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게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간에, 그럼 난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 P93

정치와 빈곤이 마리아를 자기 자식들로부터 격리시켰고 그 대신 돌봐야 하는 백인 아이들로 인해, 자기의 돌봄 아래 있던 모든 사람과 사물로 인해 마리아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야 그는 삶의 활력을 빼앗고 피로감을 안기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인품과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신화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 P100

나는 겉도는 존재였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실제보다 더 지혜로워졌다고 느꼈다. 지혜롭고 슬픈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게 작가란 그런존재여야 했다. 게다가 난 어차피 슬펐다. 내가 쓰는 문장들보다도 더 슬픈 애였다. 나는 슬픈 여자애를 연기하는 슬픈여자애였다. 그맘때 엄마와 아빠가 막 별거에 들어간 참이었다. 장롱에는 아빠의 옷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윗옷, 구두, 옷걸이 가득 걸린 넥타이) 책은 선반에서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욕실 벽장 안에 쓸쓸하게 남겨진 면도솔과 편두통 약의 모습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은 영국에 와서 엇나갔다. 샘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우리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사랑이 엇나갈때 우리는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은 노상 서로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 가족식탁에 같이 앉아서조차 따로따로인 외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 P110

우유 배달원이 문 앞 계단에 우유병을 그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난 불현듯 깨달았다. 우리 집에 꿀과 케첩과 땅콩버터 병뚜껑이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는 이유를, 뚜껑들도 우리처럼 제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에서 자랐고, 내가 어느 쪽에 속한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내가 아는 것이었다. 뚜껑을 닫는 것이 우리 엄마 아빠가 다시 합친 척을 하는 것 - P125

과 같다는 것, 틀어져 버렸는데도 여전히 한데 붙어 있는 양 흉내 내는 것과 같다는 것 말이다. - P129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의 이름을 아는 것은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에 해당했다. - P127

얼마 후에 중국인 가게 주인이 산길을 올라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게 다시 한 번, "살다 보면 간혹, 어디서 시작하느냐보다는 어디서 그만둬야 좋을지 알아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지요"라고 말했다. - P130

여성 작가는 자기 인생을 지나치게 또렷이 느낄 형편이 못 된다. 그리할 경우 그는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분노에 차 글을 쓰게된다.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그는 분노하며 글을 쓸 것이다. 현명히 써야 할 때 어리석게 쓸 것이다. 인물들에 대해 써야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세와 전쟁 중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 - P135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지적했듯이, 실은 런던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에 이미 아프리카가 내게 돌아왔던 셈이었다. 과거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과거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나무 아래서 싸구려 에스파냐산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는 편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마음을 추스르려 아등바등하는 편보다 월등히 나았다. 안 그래도 인생길을 헤매고있던 시기에 정말로 길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이 묘하게도나를 위안했고 그날 밤은 산에서 잠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 P12

본인이 원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라는 뜻이죠. 우리는 원하는 게 있을 때 기어이 주저하고말죠. 난 작품에서 그러한 머뭇거림을 숨기지 않고 보여 주고자 해요. 머뭇거림은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과는 달라요. 주저한다는 건 소망을 물리치려는 시도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그 소망을 붙들어 언어로 표현할 준비가 되면, 그땐 속삭여 말해도 관객이 반드시 여러분 말을 듣게 돼 있어요." - P19

‘사회 구조’가 상상하고 정치화한 ‘어머니’는 망상임을 미처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은 어머니보다 이 망상을 더 사랑했다. - P24

신가부장제는 우리에게 수동적이되 야심 찰 것을, 모성적이되 성적 활력이 넘칠 것을, 자기희생적이되 충족을 알 것을 요구했다. 즉 경제와 가정 영역에서 두루두루 멸시받으며 사는 와중에도 우리는 강인한 현대 여성‘이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만사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게 일상사였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P25

마침 그 무렵 읽고 있던 아드리엔 리치는 이를 정확히 짚어 냈다: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 안에 진정으로 인사이더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기이했다. 점차나는 ‘모성‘이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서 남성 의식은 곧 남성 무의식이었다. 남성 무/의식은여자이자 또한 엄마이기도 한 동반자가 자기 욕망일랑 밟아 끄고 그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그런 뒤에 다른 온갖 사람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요했다. 우리는 욕망을 거두어 보려했고, 우리가 그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삶의 활력 가운데 상당량을 아이와 남자 들을 위한 집을 꾸리는 데 투입했다. - P26

내가 모성 본능과 사랑의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아니다. 난 단지 여자들에게 진실하게 그리고 자유로이 이를 겪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종종 그렇듯 구실 삼아 그 안으로 도피했다가 막상 그 감정들이 고갈된뒤에야 피난처로 여기던 곳에 자신이 갇히고 말았음을 깨닫는 대신에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상황의 힘』 La Force des choses, 1963 - P29

두 눈이 머리통 깊숙이 숨어들려는 것처럼보이는 것도 어쩌면 본인이 맹목으로 동조하는 현실이 자칫하면 자기를 살해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는 내 눈은 어떻고? 에스컬레이터만 탔다 하면 단숨에 그렁그렁해지는 내 눈도 내 처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오 하느님, 달리 눈 둘 곳을 알았어야지. - P31

그가 실은 다른 걸 묻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나부터가 실은 다른 걸 묻고있는 건지도 몰랐다. 에스컬레이터만 탔다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를 여전히 간파할 수가 없었으니까. - P36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에 더해 주체가 되는 법을 터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렵고 진 빠지는 일이랍니다. - P38

백인은 흑인을 무서워했는데 이건 백인이 흑인에게 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한테 못되게 굴면안전하지 못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기분이 들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고 1년 후에 일어난샤프빌 학살에 대해, 백인 경찰이 흑인 아이와 여자와 남자들을 총으로 쏜 일과 그 이후에 내린 비와 그 비가 피를 다쓸어간 이야기에 대해 나는 다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할 즈음에 교장 선생님은 이미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고 있었고 난 선생님이 정상이 아닌 기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가 가장 잘 읽히지 않았다. 1부는 주로 몸, 통증, 고통, 용서에 대한 책을 얘기하는데, 정희진 선생님 특유의 머리를 마구 찌르는 질문들에 온통 의문투성이로, 계속 혼란을 느끼며 읽었다. 2,3부는 그 혼돈에 익숙해진 것인지, 폐미니즘에 대한 글이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잘 읽혔지만, 여전히 내 머리 속에 고여있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생각들을 계속 퍼내고 새로운 의문들을 담아내야 했다(그렇지만 그 의문들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정희진 선생님의 책은 그냥 서평 책이 아니다. 계속 나를 파괴하는 힘이 있다.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에 나온 27권 중에서 이미 읽은 책은 [빨래하는 페미니즘]과 [인 콜드 블러드] 2권이다. [빨래하는 폐미니즘]은 재작년에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고, [아내가뭄]과 [페이드 포]가 가장 관심 간다. 물론 계속 언급되는 베티 프리던과 보부아르와 주디스 버틀러 등등을 읽어야 한다는 부채감도(계속 외면 중입니다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2-02-09 1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드 포>강추합니다~♡
여성 스스로 가지고있는 가부장적 편견을 깨는게 쉽지 않은듯해요.
저도 이런 책들 읽고 나서야 그런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고 놀라고...
정희진님의 3부작 읽어봤는데 여기 담긴 책들은 계속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요.ㅠ 덕분에 재찜해갑니다^^*

햇살과함께 2022-02-09 17:40   좋아요 3 | URL
페이드 포, 이 책 미미님 읽는 거 보고도 관심 있었는데^^ 조만간 이 책 사러 동네서점 가야겠어요 ㅎㅎ
 

탈감정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라 재생된 감정이다. 《탈감정사회》는 감정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제조된 가짜 감정들로 충만하고 그러한 감정을 소비하는 사회, 소비재로서 감정, 감정 제조 산업이 제도화된 사회에 대한 고찰이다. - P198

‘군 위안부‘ 역사처럼 여성은 언제나 전쟁 혹은 ‘나라 없는 설움‘의 가장 큰 희생자일까? 인류 역사상 여성이 노동 시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시기는 여성 운동이 활발했던 때가 아니라 전쟁 때였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노동력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 간) 전쟁이 끝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1990년대 초 소말리아 내전에서 여성들이 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집보다 밥을 주는 군대가 낫기 때문이었다. 유랑 중인 쿠르드족 여성 운동가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립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 P2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