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아래서 싸구려 에스파냐산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는 편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마음을 추스르려 아등바등하는 편보다 월등히 나았다. 안 그래도 인생길을 헤매고있던 시기에 정말로 길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이 묘하게도나를 위안했고 그날 밤은 산에서 잠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 P12

본인이 원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라는 뜻이죠. 우리는 원하는 게 있을 때 기어이 주저하고말죠. 난 작품에서 그러한 머뭇거림을 숨기지 않고 보여 주고자 해요. 머뭇거림은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과는 달라요. 주저한다는 건 소망을 물리치려는 시도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그 소망을 붙들어 언어로 표현할 준비가 되면, 그땐 속삭여 말해도 관객이 반드시 여러분 말을 듣게 돼 있어요." - P19

‘사회 구조’가 상상하고 정치화한 ‘어머니’는 망상임을 미처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은 어머니보다 이 망상을 더 사랑했다. - P24

신가부장제는 우리에게 수동적이되 야심 찰 것을, 모성적이되 성적 활력이 넘칠 것을, 자기희생적이되 충족을 알 것을 요구했다. 즉 경제와 가정 영역에서 두루두루 멸시받으며 사는 와중에도 우리는 강인한 현대 여성‘이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만사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게 일상사였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P25

마침 그 무렵 읽고 있던 아드리엔 리치는 이를 정확히 짚어 냈다: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 안에 진정으로 인사이더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기이했다. 점차나는 ‘모성‘이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서 남성 의식은 곧 남성 무의식이었다. 남성 무/의식은여자이자 또한 엄마이기도 한 동반자가 자기 욕망일랑 밟아 끄고 그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그런 뒤에 다른 온갖 사람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요했다. 우리는 욕망을 거두어 보려했고, 우리가 그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삶의 활력 가운데 상당량을 아이와 남자 들을 위한 집을 꾸리는 데 투입했다. - P26

내가 모성 본능과 사랑의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아니다. 난 단지 여자들에게 진실하게 그리고 자유로이 이를 겪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종종 그렇듯 구실 삼아 그 안으로 도피했다가 막상 그 감정들이 고갈된뒤에야 피난처로 여기던 곳에 자신이 갇히고 말았음을 깨닫는 대신에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상황의 힘』 La Force des choses, 1963 - P29

두 눈이 머리통 깊숙이 숨어들려는 것처럼보이는 것도 어쩌면 본인이 맹목으로 동조하는 현실이 자칫하면 자기를 살해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는 내 눈은 어떻고? 에스컬레이터만 탔다 하면 단숨에 그렁그렁해지는 내 눈도 내 처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오 하느님, 달리 눈 둘 곳을 알았어야지. - P31

그가 실은 다른 걸 묻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나부터가 실은 다른 걸 묻고있는 건지도 몰랐다. 에스컬레이터만 탔다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를 여전히 간파할 수가 없었으니까. - P36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에 더해 주체가 되는 법을 터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렵고 진 빠지는 일이랍니다. - P38

백인은 흑인을 무서워했는데 이건 백인이 흑인에게 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한테 못되게 굴면안전하지 못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기분이 들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고 1년 후에 일어난샤프빌 학살에 대해, 백인 경찰이 흑인 아이와 여자와 남자들을 총으로 쏜 일과 그 이후에 내린 비와 그 비가 피를 다쓸어간 이야기에 대해 나는 다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할 즈음에 교장 선생님은 이미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고 있었고 난 선생님이 정상이 아닌 기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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