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로 시원시원하게 답하네. 여자애들은 큰 소리로 말해야 돼, 우리가 뭐라건 어차피 아무도 안 듣거든." - P69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니? 난 모르겠다고 답했고, 수녀님은 읽고 쓰기처럼 "초월적인"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은 통찰력이 있었다, 내 안에는 글쓰기의 힘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으니까. 초월적인 것이란 ‘너머‘를 뜻했고 내가 만일 ‘너머‘를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게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간에, 그럼 난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 P93
정치와 빈곤이 마리아를 자기 자식들로부터 격리시켰고 그 대신 돌봐야 하는 백인 아이들로 인해, 자기의 돌봄 아래 있던 모든 사람과 사물로 인해 마리아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야 그는 삶의 활력을 빼앗고 피로감을 안기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인품과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신화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 P100
나는 겉도는 존재였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실제보다 더 지혜로워졌다고 느꼈다. 지혜롭고 슬픈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게 작가란 그런존재여야 했다. 게다가 난 어차피 슬펐다. 내가 쓰는 문장들보다도 더 슬픈 애였다. 나는 슬픈 여자애를 연기하는 슬픈여자애였다. 그맘때 엄마와 아빠가 막 별거에 들어간 참이었다. 장롱에는 아빠의 옷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윗옷, 구두, 옷걸이 가득 걸린 넥타이) 책은 선반에서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욕실 벽장 안에 쓸쓸하게 남겨진 면도솔과 편두통 약의 모습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은 영국에 와서 엇나갔다. 샘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우리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사랑이 엇나갈때 우리는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은 노상 서로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 가족식탁에 같이 앉아서조차 따로따로인 외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 P110
우유 배달원이 문 앞 계단에 우유병을 그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난 불현듯 깨달았다. 우리 집에 꿀과 케첩과 땅콩버터 병뚜껑이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는 이유를, 뚜껑들도 우리처럼 제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에서 자랐고, 내가 어느 쪽에 속한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내가 아는 것이었다. 뚜껑을 닫는 것이 우리 엄마 아빠가 다시 합친 척을 하는 것 - P125
과 같다는 것, 틀어져 버렸는데도 여전히 한데 붙어 있는 양 흉내 내는 것과 같다는 것 말이다. - P129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의 이름을 아는 것은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에 해당했다. - P127
얼마 후에 중국인 가게 주인이 산길을 올라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게 다시 한 번, "살다 보면 간혹, 어디서 시작하느냐보다는 어디서 그만둬야 좋을지 알아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지요"라고 말했다. - P130
여성 작가는 자기 인생을 지나치게 또렷이 느낄 형편이 못 된다. 그리할 경우 그는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분노에 차 글을 쓰게된다.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그는 분노하며 글을 쓸 것이다. 현명히 써야 할 때 어리석게 쓸 것이다. 인물들에 대해 써야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세와 전쟁 중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 - P135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지적했듯이, 실은 런던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에 이미 아프리카가 내게 돌아왔던 셈이었다. 과거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과거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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