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 팽창을 향한 야망과 예정된 결말
브래드 글로서먼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을 읽은 후, 내친 김에 브래드 글로서먼의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을 이어 읽다.. 그러고보니 이번 주 초에 읽은 R. 맥그리거,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와 시기에 있어서나, 대상에 있어서, 그리고 접근방법에 있어서도 다소 겹치는 책이다..

 

구미 출신의 소위 '일본통',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일본 사회 인식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1970-80년대에 일본에서 살았다면,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과 같은 책을 썼을 것이다(실제로 하버드 교수가 쓴 동명 저서가 있다)..

당대 구미 학계에서 나오던 <일본론>의 주류가, 일본의 경제적 풍요를 부러워하고/질투하면서 그 경제적 잠식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양가감정이 뒤섞인 것들이었다고 한다면, 2010년대 이후의 <일본론>은 "너희들.. 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된 거야.. 뭐가 문제니.. 내가 분석해줘?"라고 걱정해주면서, 일본형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적인) 중국의 부상과 같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그래도 (중국보다는 믿을 수 있는) 너네들이 좀 버텨줘야 하지 않겠니"라고 온정의 시선으로 다독여주는 텍스트들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

 

이 책 역시 1990년대 중반 버블 붕괴 이후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채(잃어버린 10년+ 또 10년 하면서) 방황하는 일본 사회에 불어닥친 쇼크들- 리먼 쇼크, 정치 쇼크, 센카쿠 쇼크, 동일본대지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현재적 전망을 제시하는 다소 '안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저자가 국제정치 전문가이다보니, 아무래도 내부적 문제들에 대한 검토 역시 자민당으로 대표되는(물론 3년간의 민주당 시절은 아마추어들의 막간극으로 처리되지만) 일본 정치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정치 이외의 다른 층위들에 대한 검토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당장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80년대까지 일본 사회가 잘 나갔던 것은 일본 정치가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항상 그 때도 일본 정치는 문제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글로벌 사회, 그리고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정치'의 영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인가? 이런 '엉뚱한'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일본형 시스템>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데, 대개 그렇듯이 이 <일본형 시스템>이 마치 자동인형처럼 계속 설명 없이 등장하면서 문제를 정리해버리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결과 80년대까지는 전세계적으로 상찬되던 <일본형 시스템>이 지금은 일본 사회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과연 일본형 시스템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지만, 나 역시 <한국형 시스템>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책이 끝날 때 쯤에야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피크 저팬>으로 정한 이유를 말해주는데.. 쉽게 말하면 '지금'의 일본사회야말로, "잃을 것이 너무 많으며, 자신들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는 생각에 점차 물들어가면서도 큰 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보다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선호하는 사회"라는 것인데.. 그래서 지금이 피크야.. 음.. 왠지 후루이치 노리토시와 같은 20대 사회학자가 썼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같은 모순형용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그러한 진단이 진정 옳은 것이라면, 정작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할 지점은 과연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부분일 것이고, 이는 정말 구체적 현장의 경험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일텐데.. 현재의 국제정치학적 방법론으로는 풀 수 없는 과제인 듯 싶다(그렇다고 국제정치학의 프레임이 무용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현대 일본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나니 부쩍 일본에 가서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눈으로 그들의 삶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일본에 못 간지 벌써 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 헤이세이 30년의 기록
사토 마사루.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 그동안 <현대 일본 사회>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하며..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일본의 나름 알려진 두 논객 사토 마사루,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대담집인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과 미국의 국제문제연구 전문가인 브래드 글로서먼의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이렇게 두 권이다.. 읽다보니 뭔가가 쓰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100자가 넘는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향상 그다지 대담집을 선호하지 않지만-꼭 그런 건 아니다.. 푸코나 부르디외와 같은 대가들의 대담은 가끔 원저보다 깔끔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참고한다-,

현대 일본 사회.. 특히 '헤이세이' 시기 일본 사회문화에 대한 좋은 책들을 찾아보기 어렵고, 또 무엇보다 주말에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누워서도 볼 수 있는 책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책을 들고 침대로 갔다..

 

가타야마 모리히데는 예전 <미완의 파시즘>이라는 책으로 한 번 접한 적 있는데.. 그 책 자체가 지극히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전쟁 사관의 한 변종에 입각해서 씌어진 책이었기 때문에,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냥 지나치게 편향되지는 않은, 나름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는 느낌이었고, 그 면모는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한편 사토 마사루는, 예전 일본 서점의 신서 코너에서 저자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어 흘깃 본 적이 있었는데, 그 풍채나 느낌이 전형적인 일본의 우익 인사같아서 굳이 이런 책들까지 읽어야 하나.. 하며 지나쳤던 저자였다.. 이번에 이 대담집을 읽고 관심이 생겨 검색해봤더니 한국에 의외로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는 걸 보고 다소 놀랐다.. <국가의 함정: 외무성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며>이라는 책이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데, 이 책은 미번역이지만, 이 책을 토대로 한 사토 마사루*이토 준지의 <우국의 라스푸틴>이 번역된 적이 있었다(일부 품절이다).

풍채나 느낌이 과거 사이고 다카모리의 그것과 비슷해서.. 사토가 약간 의식하며 따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야말로 일본 우익의 정신적 아버지니까) 동시대를 읽어내는 '동물적' 감각은 책상물림, 즉 학자이자 교수인 가타야마보다 사토 쪽이 몇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그 감각은 러시아 대사관, 외무성 국제 정보국 분석 1과 근무, 그리고 국내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되어 그 '덕분'에 꽤 긴(512일) 수감생활도 했던 '독특한' 이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헤이세이 30년이라는 꽤 긴 시간을 두 저자가 훑어내듯이 대담하는 기획이니만큼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고, 다만 1989-2019년.. 즉 동시대의 일본 사회를 사적이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리한 연표(역시 연표를 만들어내는 데는 일본인들을 따라갈 수 없다..)와 그 연표에 기대어 30년의 역사를 거칠게 리뷰해나가는 대담은 꽤나 신선했다.. 가타야마가 개략적으로 리뷰를 하면, 사토가 자신의 견해를 푹 찔러넣고, 거기에 가타야마가 자신의 배경지식으로 부연하는 만담식 구성이 나쁘지 않았고, 가끔씩 지나치다는 느낌도 받지만, 그래도 40-50대 아저씨들이 여전히 이정도로 발랄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적어도 알쓸신잡, 꼬꼬무 같은 정도의 프로그램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국사회보다는 지성적으로 몇 수 위인 것은 분명한 사실.. 무엇보다 당대에 유행했던 영화나 책들 같은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아마 이 책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는 헤이세이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문화에서 모호한 존재나 중간단체가 배제되고, 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관례의 영역이나 관습의 세계가 인정되지 않는, 그래서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칫 투명한 것처럼 보이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일텐데..

하지만 저자들의 그 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이전의 일본 사회에 그런 모호한 존재나 중간단체가 존재했던 것인지, 그리고 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관례나 관습의 영역이 진정 올바른(just)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왠지 다나카 가쿠에이나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상징되는, 자민당의 예전 좋았던 시절, 부패해지만, 적당히 결단력도 있는 보스형 정치가들이 군림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이런 관례나 관습의 영역이 사라지고 법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싸움의 무대로서 광장을 빼앗기고 법정만이 남은, 모든 싸움에서 법의 언어에만 의존하는, 그리고 그 결과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마저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동시대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메시지는 어떤 울림을 준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계속되는 소송들이 잘 보여주듯(굳이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법은, 소송은 결코 약자에게 유리한 싸움의 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기에 누워 읽다가,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인터넷으로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영화, 소설들을 검색도 해가면서 나름 흥미롭게 읽었다.. 책이 다루는 시기가 예전 일본에 살았던 시기와 일부 겹치기도 해서 옛날 생각들을 떠올리며 몽상에 잠기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책 읽는데 이틀이 꼬박 걸렸다.

 

책을 덮고 나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읽어보는 기획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뜬금 없는' 생각도 해봤는데.. -강만길, 서중석, 혹은 (계통은 조금 다르지만) 강준만과 같은 할아버지들의 지나치게 '올바른' 현대사 읽기 방식이 아니라-, 장르를 넘나드는 이런 대담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식견의 논객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게 진지한, 그래서 유머 감각이 떨어지고 사람들을 무조건 가르치려 드는, 더구나 자신의 분야를 제외하고는 지식이 빈약한 자칭 '진보'와, 그저 무식할 뿐인 '우파'(우리 사회에 '보수'의 품격 같은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사이의 '회색지대'가 필요한데.. 그래도 다소 풍자 감각은 가지고 있던 진중권도 저렇게 타락해버리고.. 사실 한국사회에 논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ps. 글로서먼의 <피크 저팬>은 장을 바꿔 쓰기로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3-08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놀라운 책! 미제국주의에 대한 책은 낯설지 않지만, ‘영토‘(territory)라는 단위를 통해 은폐된 제국의 역사를 이렇게 통렬하게 기술해낸 저자의 탁월한 역량에 경의를.. ‘확장된 미국 영토‘, ‘영토 점묘주의‘, 표준 설정 등 곰씹어봄직한 많은 문제들을 던져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 미중일 3국의 패권전쟁 70년 메디치 WEA 총서 7
리처드 맥그레거 지음, 송예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전후 70년에 걸친 미, 일, 중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통사식으로 정리한 책. 상층부 외교 비사를 적절하게 엮어내는 솜씨에 일단 한 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과거사‘ 문제가 정말 그만큼 중요한 것인지는 분명 논쟁적! 호주 출신이라는 포지셔닝의 정치적 함의를 파악하는 것은 독자의 몫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변혁 1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6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의 마지막 10일을 이 책과 함께 보내다. 19세기의 브로델이라는 평가는 분명 과장된 것이다. 전체사를 아우르는 체계의 결여가 파노라마 서술로 흐르는 지점은 특히 아쉽다. 하지만 유럽에 한정하지 않고,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로까지 시야를 확대한 것은 분명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